좌익의 李承晩 지우기와 金九 띄우기
위대한 이승만을 고의적으로 폄훼하는 좌익의 저급한 수작
 
델모나코 엔파람 논설가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쯤에 北아프리카 모로코에 주재하는 미국 영사관에 말을 탄 일단의 현지 부족戰士들이 기습적으로 처들어와 영사관직원을 무차별적으로 칼로 찔러죽이고 美 領事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들은 미국정부를 향해 모든 미국인들이 철수하지 않는다면 납치한 領事를 죽이겠다고 통고했고 이를 접한 미국의 대통령은 '굴복하지 않는다. 만일 美 領事를 살해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하겠다.'며 모로코 연안으로 美함정을 파견했는데, 지리한 신경전 끝에 마침내 美 領事는 석방되고 미국의 함포를 앞세운 엄포외교가 승리하는 것으로 끝났었다.
 
헐리웃의 映畵제작자들이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납치된 領事 대신 미모의 領事夫人으로 대체하고 납치한 부족장과 납치된 領事夫人 사이에서 로맨스가 일어난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를 만들어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바로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이 주연한 '바람과 라이언'이다. 숀 코네리가 모로코의 무자비한 부족장으로 출연하고 납치된 영사부인役에는 캔디스 버겐이 출연했는데, 부족장과 대척점에 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당시의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役까지 포함해 이 세 사람의 熱演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한국관객들 중 이때 쯤에 이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1905년의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조성한 장본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하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해군기지를 만들려는 러시아의 야망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던 상태였는데 고종이 러시아쪽으로 완전히 기울자 차라리 親美的인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게 美國益에 낫다고 판단해 러.일 戰爭에서 일본이 승리하자마자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 줬는데  밀약이 체결되고 난 5일이 지나서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은 먼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젊은 청년을 백악관에서 면담하게 된다. 
 
이 낯선 청년은 일본의 조선침략의도를 설명하면서 미국이 이를 막아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테프트는 당시 국무장관이었는데, 테오도르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미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밀약을 맺은 마당에 이 말이 먹혀들리는 없었지만....
 
머나먼 나라에서 화물선을 타고 기차를 타고 그리고 미국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8개월의 시간을 허비한 끝에 마침내 백악관에서 미국대통령과 면담하는 데 성공한 이 젊은 청년이 나중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으로 당시 30세였다.
 
저물어가는 조선정부에 반항적이었던 이유로 6년 넘게 감옥살이했던 이 젊은이를 당시 조선의 권력실세들이 특사로 선발한 것은 국내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데 미국 선교사들한테 배운 이승만의 영어실력이라야 사실 초보적인 수준이었겠지만 젊은 이승만은 투철한 애국심으로 백방으로 뛰어 백악관으로 들어가 美대통령을 상대로 조선을 지켜줄 것을 호소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열강들끼리 벌이는 국제외교무대를 너무나 몰랐던 것이다. 이때의 쓰라린 실패를 맛본 덕분인지 이승만은 '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정치인으로서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이후 미정부요인과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만나고 친교를 유지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부지런했던 선각자였다.
 
급작스레 다가온 1945년의 해방과 3년간의 美軍政, 그리고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한 혼란기에 미국의 국내사정과 워싱턴政街를 꿰뚫어보고 있던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혼란'이 어떻게 끝났을지 생각하면 아찔할 때가 많다.
 
赤化세력들이 우상으로 떠받드는 金九가 만일 그때의 대통령이었다면, 과연 어떤 결정을 했을까?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싸울 수는 없다며 탱크을 앞세우고 물밀듯이 내려오는 북괴군에 항복하지나 않았을까?
 
서울엔 金九의 아호를 딴 백범기념관이 있고 백범로가 있고 저 남산에 백범광장이 있다. 한국은행은 새로 찍어내는 10만원권에 金九의 초상화를 넣기로 했단다. 해방후 상해에서 돌아와 피습 때까지 거주했던 일제때 만들었던 석조건물인 경교장은 史蹟 465로 지정되어 이곳을 김구기념관으로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기념비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했던 이화장은 史蹟으로 지정받지도 못하고 고작 '지방문화재  서울시 기념물 6호'로 지정되어 김구의 경교장과는 그 格에 있어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화장은 중종때의 신광한의 옛 집터로 오랜 중수를 거쳐 현재의 건물은 1920년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韓屋이며 건국내각의 조각본부라는 역사적 흔적이 담긴 사적지임에도 지방문화재라니.....
 
뿐만 아니라 金九의 추모일엔 국무총리가 참석해서 추모사를 낭독하는데 이승만대통령의 추모식엔 장관도 아니고 국가보훈처장도 아닌 보훈차장이 온다니 이런 모욕이 어디 있으며 이런 노골적이 국가모독이 어디 있는가?
 
金九를 이렇게 우상화하면서 이승만의 흔적은 지울려하는 그 底意가 무엇인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赤化환경조성의 일환 아닌가? 金九가 단순히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우상화하는 것일가? 金九의 업적으로 가장 내세우고 싶은 것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평양으로 김일성을 찾아간 것이라고 붉은 세력들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국가조직 곳곳에, 특히 언론, 문화계에 숨어들어 赤化운동을 전방위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붉은 세력들은 이제 당당히 '민주인사' '진보인사' '개혁세력'이라는 명찰을 달고 노골적으로 대한민국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족의 이름으로 북한정권을 옹호하고 나서고 있다.
 
金九우상화운동도 이런 적화운동의 일환일 뿐이다. 정부는 金九우상화운동세력을 적출해서 제거하는 한편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합당한 위상을 정립하는 작업에 나서야할 때라고 본다. 그것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델모나코 엔파람 논설가: http://www.nparam.com/]
 
 
참고자료: 건국준비위원회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건준]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의 군정기에 여운형 등이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줄여서 건준이라고도 부른다.

1945년 8월 15일 밤 여운형은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건준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건준이란 명칭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건준의 강령은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한다.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권의 수립을 기한다.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
활의 확보를 기한다 등이었다.[1]

1945년 9월 4일 건준 전체회의가 열려 부위원장에 좌파 변호사 허헌을 세우는 등 집행위원 개편이 있었다. 9월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9월 7일 건준
은 ´발전적 해소´라는 미명 아래 사라졌다.[2]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그해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건준은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중앙조직 간부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여운형·조동호·최근우 등의 조선건국동맹 계열, 안재홍·이규갑·권태석 등의 신간회(新幹會) 계열, 정백 등의 장안파(長安派) 조선공산당 계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직 개편에 따라 점차적으로 조선건국동맹 계열과 장안파 조선공산당 계열이 강화되었고, 신간회 계열이 이탈하여 좌파가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들이 중앙조직의 지시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치안을 관장했다. 1945년 8월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준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건준이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대부분의 건준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계속했다. 건준은 8월 25일 선언과 강령을 채택했는데, 선언에서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국가건설의 준비기관과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집결체로서 결성되었음을 밝혔다.


강령은 ①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전민족의 정치적·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가지를 채택했다. 중앙 건준의 간부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리문제나 토지문제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시킨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중앙 건준 간부들의 구성 및 이념적 지향을 살펴볼 때 건준에는 자유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이 공존했고, 조직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중도세력과 좌파를 망라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 을 중심으로 건설한 정권 예비기관.

여운형은 이에 앞서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정치범 석방 및 3개월간의 식량확보,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한 불간섭 등 5개항을 조건으로 치안권을 인수했다. 그해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치안권 인수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결성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는 경위대(警衛隊)와 정규군 편성, 식량확보, 통화 및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등이 언급되었다.
 
건준은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중앙조직 간부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여운형·조동호·최근우 등의 조선건국동맹 계열, 안재홍·이규갑·권태석 등의 신간회(新幹會) 계열, 정백 등의 장안파(長安派) 조선공산당 계열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조직 개편에 따라 점차적으로 조선건국동맹 계열과 장안파 조선공산당 계열이 강화되었고, 신간회 계열이 이탈하여 좌파가 강화되었다. 지방에서도 건준 지부들이 중앙조직의 지시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결성되어 지방의 치안을 관장했다.

약칭하여 건준(準)이라고도 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行]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협상 대상자로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찾았다. 이때 건국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그에 동조함으로써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사무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두었고 위원장에 여운형(呂亨), 부위원장에 안재홍(鴻)·허헌(憲), 총무부장에 최근우(愚), 재무부장에 이규갑(李甲), 조직부장에 정백(栢), 선전부장에 조동호(祜), 무경부장에 권태석(錫)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설립목적은 민족의 총역량을 일원화하여 자주적으로 과도기의 국내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8월 18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여 건국공작 5개 항을 제시하였고 9월 2일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이라는 3개 항이었다.

그러나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진보세력으로 조직되자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였으며, 부위원장 안재홍도 탈퇴하여 9월 1일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정백·고경흠(欽) 등의 간부들은 위원회의 승인 없이 경성지부를 결성하였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집행위원회 개편을 단행하였고 9월 6일에는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된 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조각을 단행하였다.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金植), 김구(金九),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이강국, 신익희, 조만식 등 55명의 대표위원과 오세창(昌), 권동진(鎭), 김창숙(金淑), 이시영(李榮) 등 12명의 고문위원을 선발하고 주석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총리에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처음부터 건준을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던 김성수(金洙)·송진우(禹)·장덕수(秀) 등 우익진영은 이들 조직을 벽상조각(閣)이라고 비난하였다. 그후 해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귀국하고 이승만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한편 미군정청에서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포고를 발표하자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연 해체되었다.

기사입력: 2008/08/19 [08:36]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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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가 없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 09/07/22 [21:45] 수정 삭제
  좌익들의 끈질긴 농간에 의해서 대한민국은 국부가 없는 이상한 나라로
변질 되어 왔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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