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선생 전쟁회고: 내가 겪은 6.25(2)
동네에서 빨갱이들이 벌인 잔인한 인민재판
 
화곡 김찬수 선생
[편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 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지난 1편에 이어)
(1) 원산에서 만날 가족을 그리며

이등성이 저 등성이에서 청년들이 함성을 지르니 곰이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하필이면 진외가 할아버지 쪽으로 내리달아 드는데 급한 김에 설매(서림 지역 방언, 작은 모양의 사냥하기 편리하게 만든 지금의 스키와 비슷한 모양)를 미처 벗지 못하고 창으로 곰을 겨누고 공격했다. 그런데 곰이 창을 앞발로 여러 차례 세차게 치는 바람에 그만 창을 놓치고 마니 갑자기 무방비 상태인 할아버지에게 곰이 덥석 달려들어 얼떨결에 갑산 할아버지는 곰과 맞붙어 서로 끌어안고 뒤넹기질(엎치락뒤치락)을 쳤다.

아무리 사람이 기운이 세다 하여도 커다란 곰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는 정신없이 곰과 맞붙어 싸우다가 힘이 빠진 가운데 생각해 내기를 곰은 사람이 엎드려 있으면 달리 공격하지를 못한다는 말이 순간 생각나서 죽을 힘을 다하여 눈구덩이에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미련하다던 곰이 할아버지 등을 타고 덮친 상태에서 할아버지의 양 어깨를 앞발로 내려치는데 온 내장이 다 흔들려 터지는 듯했고, 뼈마디가 모두 부서지는 듯했단다. 또 곰이 뒤통수를 치면서 양쪽 귀를 긁어 잡아당기며 손등을 긁었는데 머리 가죽이 긁혀 다 달아나는 것 같았고, 이로써 훗날 할아버지는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신경이 끊어져서 나중에도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마을 청년들이 설매(스키)를 신고 급히 모여들어 창질을 하는데 곰이 어떻게나 날래고 힘이 센지 모든 사람들이 찌르는 창을 다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산기슭을 뛰어 올라 도망을 갔다. 할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이 들이닥치는 기색이 있자마자 그만 기절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집에 간신히 업혀 온 할아버지는 보름도 더 앓았는데 “곰 잡아라! 곰 잡아라!” 하다간 한참 있다가 “오르고― 오르고―.” 하면서 허공을 향하여 연신 헛손질만 했다. 그 사이 마을 청년들이 곰이 흘린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곰은 어느 바위 구석에 늘어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잡은 곰의 웅담을 꺼내와 할아버지에게 복용시켰더니 그제야 할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나의 작은집 할머니의 친정도 할머니와 같은 마을의 아래황이라는 곳(지금의 양수 발전소 하부 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할머니와는 아래 윗동네였는데 작은집 할머니는 경주 최씨였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멧돼지를 모는데 커다란 멧돼지가 마을로 뛰어들었단다. 마침 앞마당에서 장작을 패던 작은집 할머니의 친정아버지가 멧돼지가 달려오는 걸 보고서 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석에 세워 두었던 창을 들고 나와 급한 김에 날카로운 창끝을 싸맨 가죽집을 벗기지도 않고 달려오는 멧돼지를 겨냥해 냅다 던졌는데 창은 날아가서 그대로 멧돼지의 등덜미에 꽂혔다.

그런데 가죽집을 벗기지 않아 창끝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치명상을 입지 않은 멧돼지가 등덜미를 몇 차례 흔들거려 창을 털어 버리더니만 부아가 나서 그대로 쏜살 같이 창을 던진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어금니로 장딴지를 들이받고 번쩍 들어 공중배기로 휘둘렀다. 장딴지가 멧돼지 어금니에 꿰어져 두어 차례 공중에서 빙빙 돌려 흔들거리다가 저만치 떨어져 기절했다.

뒤따라오던 동네 사냥꾼들이 돼지를 잡긴 하였으나 그 이후 할아버지는 장딴지가 다 나았는데도 평생 다리를 절뚝절뚝하고 조금씩 절었다. 원래 방식대로 사냥을 한다면 창을 놓치지 않고 양손으로 들고서 가까이서 맹수를 공격해야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도 하면서 사냥은 아주 위험한 것이니 이담에 사냥하는 데는 아예 따라가지도 말고 산속에 혼자 다니지도 말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바깥 세상은 전쟁 직전의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지만 한여름 저녁 때 멍석을 깔고 할머니 옆에 누워 타들어가는 모깃불 연기를 쐬면서 은하수와 별자리를 살피기도 했다. 또 초가지붕 위에 핀 하얀 박꽃 주위를 맴도는 박풍을 쳐다보면서 나는 부모와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할머니와 지냈다.(계속)

8. 김일성의 불법 기습남침

1949년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1950년 봄철까지 김일성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농사일이나 집안 일 틈틈이 별도로 밤이면 그릇에 곡식을 담아 그 그릇 안에 있는 곡식 알갱이를 정확히 세어 한 그릇에 곡식 종류별로 몇 개씩이나 들어가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릇안의 콩도 세고 보리쌀도 세고 심지어 깨알까지도 세었다.

또 낮이면 소와 말먹이 풀을 베어 바짝 말려 온 동네마다 쌓아두곤 했다. 어느 정도 쌓이면 그 말린 마초(馬草 : 말먹이풀)가 강현 역 안에 우마차로 실려 왔다. 어디다 쓰는지도 모르고 지게까지 동원하여 동네마다 법석을 떨었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억새풀을 베다가 손도 베어가면서 참여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나보다 네 살 더 많은 기운이 센 형들이 지게로 그 풀을 동네 공회당 마당이라든지, 각자의 집에 말렸다가는 강현 역 역사 앞으로 날랐다.

내고향 이웃동네인 간곡리에 사는 내 친구에 지금 한시작가인 추종삼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나보다 한살이 더 많았는데 1949년 7월 강현면에 있었던 "호림부대" 사건당시 그의 아버지가 호림부대에 협조한 사실이 발칵이 되어 인민재판에서 처형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때 종삼이는 열살이었다. 공산치하가 흉흉하기 말이 아닌 때 였다. 그해 9월부터 종삼이네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초를 장만하여 소 질매바리로 옮겨 강현(낙산)역에 날라다 쌓았다.

그 동네 마초 만들기는 화채봉께로 올라가는 10리나 떨어진 학소암이라는 곳에서 이루어 졌다. 대청봉 아래 넓은 산골짜기에서 억새풀을 베어 바닥에 깔아 말렸는데 비가오면 그 말리던 억새풀 더미에 곰팡이가 피어 다시 장만하여 바짝 말린 뒤 그것을 소 질매바리로 날라다가 역사안의 광장에 산더미 같이 쌓았다고 했다. 종삼이는 10살인데도 벌써 체격이 커서 어머니와 같이 소를 몰고 다녔다고 지금도 고향에 가서 만나면 당시 경험 이야기를 극성스럽게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 최종서란 분이 있었는데 6.25가 나던 해 6월 중순께 다 되어 갑자기 짐실어 나르기에 동원된 동네 어른들과 함께 간곡리에서 20리 떨어진 양양역까지 빈 질매바리 소를 끌고 가서 거기서 부터 남쪽으로 30리 실이 되는 기사문리 까지 낮에는 쉬고 야밤에만 밤새도록 군수물자와 화약상자 포탄등의 병기물자를 38선 임박한 전 지역부대 진지에 일주일이 넘게 비밀리에 신속하게 실어다 날라다 놓았다고 한다.

6.25 바로 직전 우리고장 전지역에서 농촌 어른들을 동원하여 일어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일들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1952년에 거제도에 피난을 가서 피난민들에게 들어보니 38선 접경 바로 이북지역 중부지방 전역에서 똑깥은 일이 벌어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참 신기하고도 이상하게만 생각하였다. 그런 일 들이 우리동네의 양양고장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양일판 전체에서 모아 놓은 마초더미가 초여름인데도 강현역을 비롯하여 양양역등 전역에 난데없는 마초더미가 갑자기 이곳저곳에 산처럼 쌓여 보관되었다. 동네어른들의 말은 왜 저러는지를 몰랐고 어린 우리들은 더더구나 몰랐다. 학교 한구석에도 마른 마초더미를 높다랗게 쌓아 놓곤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어다 말린 풀은 인민군들이 6ㆍ25가 일어나자마자 남쪽으로 내려갈 때 군대의 장비를 실어 나르는 우마차 끌 소와 말에게 먹일 풀이었다. 들판에 소와 말이 먹을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계절인데도 말이다.

2월 초순, 어머니는 아버지와 몰래 약속을 하고 여섯 살 난 여동생은 걸리고, 세 살 난 여동생을 업고 강현 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떠났다. 중간 간성 역 어디에서 아버지가 몰래 타고 원산으로 함께 간 것이다. 이때부터 할머니와 나만 고향에 남아 6월 이후 1952년까지 전쟁 한복판에 들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리 쫒기고 저리 쫒기면서 전쟁 통의 모진 고생을 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어린 두 여동생이 원산으로 간 뒤 이른 봄부터 우리가 하교하면 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아저씨들이 군인아저씨들과 같이 나무로 깎은 총을 들고 매일같이 앞에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찌르면서 “이야! 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지르면서 훈련했다. 우리가 모여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면 선생이 어서 빨리 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 훈련은 6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1950년 6월 초순쯤 아침에 등교해 보니 학교 교사 건물 양쪽으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집채보다 훨씬 커 보이는 탱크가 그물(위장망)이 씌워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난꾸러기인 우리들은 호기심이 생겨 탱크 가까이 접근해 구경도 하고 만져 보려고 했는데 선생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히 일러서 멀찍이 떨어져 신기한 듯이 쳐다보기만 하였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놀았다.

탱크의 크기가 너무 크고 앞의 포신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크고 무서우면서도 위력 있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8ㆍ15 해방 될 때 함경북도에서 소련군 탱크도 보았다는데 나이가 어려서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1950년 6ㆍ25가 나기 3일 전쯤 학교에 등교해 보니 홀연 탱크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6ㆍ25 당일부터 며칠 뒤까지는 38 이북 우리 고장 전 지역에서는 전쟁이 난 줄 몰랐다. 나중에 들으니까 6월 중순이 넘어서까지 인민군이 많이도 38선께로 이동하더니만 6ㆍ25 당일 지금은 연어가 올라오는 남대천이 있는 마을 양양 읍께서는 38선이 그어진 인구리 훨씬 남쪽 방향 주문진 쪽에서 요란스럽게 울리는 포 소리가 쿵쿵 하고 들렸다 했다. 인민군이 갑자기 남쪽으로 쳐 내려간 것이다.

1ㆍ4 후퇴 뒤에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피난 보따리를 지고 이고 강릉 옥계 방향으로 피난을 갔을 때 강릉 경포대께 초당마을에 머물렀을 때 들은 얘기이다. 그 동네 어른들이 말하기를, “6ㆍ25 그날은 공휴일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북쪽에서 인민군대들이 몰려 내려온다는 말들이 들리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멀리 피난도 못가고 옥계 쪽으로 줄행랑을 쳐 백봉령 산골로 숨어들어 그곳 산골마을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가 마을로 돌아 왔노라”고 하면서 “양양서 아주머니들이 어린아이 데리고 여기까지 짐들을 지고 내려왔으니 고생이 참 많겠다.”고 위로했다.

바로 38 이북 우리 산골 마을이 있는 강현 면에서는 6월 25일 직후엔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우리 모두는 학교를 다녔다. 사나흘 여를 지나서부터인가 예쁜 여자 담임선생은 교실에서 우리를 앉혀 놓고 기쁜 얼굴로 칠판에 남조선 지도를 그리면서 분필로 화살 표식의 줄을 그어가며 목청을 높여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게 말을 하였다.

“어린이 동무들! 우리의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대원수, 우리 장군님의 드높으신 영도로 지금 남조선 해방전선에 뛰어들었어요. 며칠 전 여러분이 학교 양 옆에 있는 땅끄(탱크)를 보았지요? 바로 그 땅끄를 앞세우고 우리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힘차게 내려가고 있어요.”

말하자면 인민군이 남쪽으로 쳐내려갔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날마다 학교엘 가면 서울도 해방, 서해안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도 쪽으로 모두 해방, 칠판에다 분필로 많은 줄을 그어가며 나중엔 중부지방 강원도 동해안 해안을 따라가며 해방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춘천이란 곳은 인민군대들이 뺑뺑 둘러싸기만 했지 해방시켰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곳 저곳 가르키며 그렇게 신나게 설명하는 담임선생은 여느 때와 아주 달랐다. 말끝마다 “자! 동무들 모두 박수!” 하면 그때마다 우리 반 급우들은 좋은 일 났다고 “야―!” 소리를 지르며 박수 치느라고 덩달아 신나서 야단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밖엘 나가 보니 매일 같이 전교생의 얼굴들이 설 명절에 웃음 가득한 그런 얼굴 표정 같았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쳐 내려간 것을 비로소 모두 알게 되었다.

“아니 싸움 났다는 말이 사실인가?”
“언제부터 싸움 났다는 거야?”
“학교에 놔뒀던 땅끄가 보이지 않던 그때 모두 남쪽으로 쳐내려갔대”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리면서 불안해하기 시작했다.(계속)

(1). 인민재판

전쟁이 나고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저녁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인민위원장 주도로 인민재판이 뻔질나게 벌어졌다. 우리 아랫집 종덕 아저씨도 인민재판을 받고 전신을 두들겨 맞아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끌다시피 하고 다녔다.

그 이유는 종덕아저씨의 형 종순 아저씨가 남으로 월남하였기 때문이었다. 종순아저씨가 얼마 전에 남쪽 강릉 쪽으로 공산 치하를 피해 월남하였는데 동생 되는 순박한 종덕아저씨를 지목하여 한 동네 성씨 다른 집안 패거리가 인민재판이란 명목으로 뭣도 모르고 모여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경우 없이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것이다.

난데없이 갑자기 억울하게 얻어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저씨는 그날 저녁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옮겨졌다. 그 집 가족들이 울고불고 야단이 났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런 일이 인근 여러 동네에서 비일비재했다. 무법천지였던 세상이다.

날짜가 지나면서 철없는 우리 친구들은 남쪽 해방이고 전쟁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와서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평화로이 놀러 다니기만 했다. 학교에서 전쟁에 대한 얘기만 가끔 듣고 다닐 뿐이었다.

내게 진외가 집으로 8촌이 되는 평창 이씨 집안의 병시 형이 말했다. 6월 하순 우리 동네 사람들이 6ㆍ25 전쟁이 난 줄도 모르던 그 시기에 나의 진외가 마을 형편은 우리와 아주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곰이 출몰하고 멧돼지가 산골을 누비는 서림마을 나의 진외가 동네에서는 6ㆍ25 당일 벌써부터 인민군이 삽시간에 진격해 들이닥쳐 평화로운 산골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곳은 38선에서 남쪽으로 겨우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남설악의 고산지대 마을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하늘밑 첫 동네 미천골 마을도 모든 파괴 상황이 예외는 아니었다. 한동네에 사는 전주이씨 집안의 청년들이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그중 몇 명은 전쟁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뒤 다시 이번엔 국군으로 또 입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인민군도 되었다가 국방군이 되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후일 국군의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들 중 몇은 지금도 생존해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산골마을에도 여기저기서 인민재판이란 무법천지의 과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산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희생당하였다 했다. 난데없이 그 순박한 산골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모두 깨져 버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양쪽 군대가 번갈아 들어오면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군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안 해도 될 신고를 일부러 해 가면서 사는 환경으로 바뀌니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병시 형네 집 할아버지는 당시 연세가 많아서 항렬로 형에게 숙항이 되는 아저씨들이 교대로 지게에다 모셔 지고서 강릉 아래 맹방까지 나갔다 왔다 한다. 병시 형도 경상북도 경산까지 피난 나갔다가 고향 수복 후 돌아왔다. 나의 작은댁 할머님 친정 아래동네 ‘황이’라는 곳의 경주최씨 마을에서도 이 같은 처참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지금도 산골 여기저기 6ㆍ25 이야기만 나오면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끔찍한 마을 파괴 현상에 대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는 분위기이다. 얼마나 처참한 당시의 일들이었겠는가.

내 어머니의 고종사촌동생 중 김성호라는 아저씨가 있다. 성호 아저씨의 어머니는 바로 설악동 상도문에서 절만 짓는 대목으로 유명한 나의 외할아버지의 여동생이다. 나에게 외갓집 고모할머니가 되는데 할머니 가족은 해방 후 금강산 온정리에 살다가 곧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성호 아저씨는 6ㆍ25때 서울을 사수하던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6ㆍ25가 나고 3일 뒤 새벽에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해 들어오는 바람에 일부 국군들이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성호아저씨가 속한 부대도 서울을 지키다가 후퇴를 하게 되었다. 27일 자정이 넘어서 성호아저씨는 지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는데 인도교 전체가 남쪽으로 향하는 서울 피난민 행렬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뒤섞여 천천히 인도교를 건너는데 서울역 부근에서는 총과 대포소리가 들리고, 피난민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꽝! 꽝!”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다리 위에서 남쪽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한강 다리를 폭격해 끊는 줄도 모르고 피난민과 군인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까마득한 다리 밑 물속으로 폭포수 떨어지듯이 모두 떨어졌다. 성호아저씨도 밀려 앞으로 나가다가 차에 탄 채로 경황없이 다리 밑 강물로 떨어졌다.

성호 아저씨가 정신이 들어 깨어보니 여의도 샛강 얕은 물가였고 동료들과 지프차는 어떻게 된 줄도 모른 채 심하게 다친 몸을 이끌고 요행히 부대를 찾아갔다. 전투를 할 수 없어서 대구 육군병원에 부상병으로 장기간 입원을 했다. 그 이후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의가사 전역이 되었는데 다친 몸이 완쾌되지를 않고 늑막염으로 내내 고생을 하였고 다른 합병증까지 도져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는 유화를 잘 그리는 화가였다. 마음이 인자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노래도 잘하였다. 당시 아저씨에겐 미봉, 용기, 미선 어린 삼남매가 있는데 어린 시절 그들은 아버지 잃고 어머니와 고생을 하며 성장했으나 모두들 재능이 뛰어나고 또 성실하다. 특히 미선 여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재원이다. 지금도 성호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 아저씨의 외사촌 누이인 내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6ㆍ25의 아픔이 그렇게 클 수가 있었는가 하고 모두들 눈시울을 적신다.(계속)

9. 양양 군청 철수 이동

6ㆍ25, 그 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한번은 내 또래 동네 친구들과 노는데 두세 살 많은 형들 몇이서 우리들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 동네 윗 개울 마을이 있었는데 우리 친척 먼 집안 종대 아저씨(아저씨는 귀가 어두워 고생하다가 작년 2006년 여름에 타계하였음)가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멋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그 형들이 과수원 쪽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우리 보고 개울가에서 망을 보라고 하고선 복숭아 서리를 하러 울타리 밑을 걷어 올리고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몰래 따는 것을 처음 보는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망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개울가 커다란 돌 바위 뒤에 숨어 오금도 못 펴고 납죽 엎드려 있는데 용감한(?) 개구쟁이 형들이 훌떡 벗어젖힌 윗도리에다 복숭아를 수북이 따왔다. 나도 한 개를 주어 받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재미있어 하면서 잘도 먹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보다 가슴이 더 뛰어 한입 물어 보았을까? 뒤로 도저히 먹지를 못하고 그저 얼이 빠진 채로 멍청히 들고만 있었다.

모진 훈련(?)을 해보지 못한 결과라고나 할까?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그 복숭아를 논 한가운데 팔매질을 해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복숭아 맛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냥 가지고 올걸, 아니지 던져 버리기를 잘했어.’ 하고 뒤죽박죽 생각을 하다가 정면 돌파를 하자는 생각이 번쩍 났다. 밖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할머니 몰래 윗방의 쌀독에서 보리쌀 세 사발(지금에 생각하면 너무나 작은 분량이었다) 가량을 자루에 넣고 큰 길 따라 위 개울 종대 아저씨 댁으로 한참 올라갔다.

마당 문을 들어서서 “아저씨!” 하고 부르니 마침 마당에서 일하던 아저씨가 “찬수 네가 웬일이냐?”하고 물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 제가 복숭아가 먹고 싶어 왔는데 이 보리쌀과 복숭아를 바꾸어 주세요.”하고 말했다. 세상에 나서 나는 처음으로 흥정(?)을 해본 셈이다. 한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얘, 찬수야, 너 마침 잘 왔다.” 하더니만 보리쌀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자루에 수복하게 담아 주었다. 쉽게 메고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는 “원산에 간 네 아버지가 고향에 온 이듬해에 우리 집 복숭아나무 전지를 잘 해주어서 이렇게 열매가 잘 달리는데 한 번도 은혜를 못 갚았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네가 왔구나.” 하면서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했다. 내 생각에 한 너 댓개 정도이거니 했는데……. 보리쌀은 그대로 자루에 두고…….

나는 너무 기쁘기도 했지만 어안이 벙벙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그냥 부자 된 기분으로 복숭아가 들어있는 자루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아직 밭에 일하러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큰 고민에 빠졌다. 할머니 몰래 보리쌀을 퍼낸 것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평소에 나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제일 나쁜 사람이니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기억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치는 말을 너무나 잘 이행하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도 그러하였으리라.

저녁에 돌아온 할머니에게 나는 숨김없이 낮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다 말했다. 형들이 남의 집 복숭아를 몰래 따먹으러 가는데 따라갔다가 일어난 일과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복숭아가 먹고 싶어서 이러이러 했노라고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초지종을 다 말하고는 “그랬더니 이렇게 복상(복숭아)을 많이 주시대요.” 했다. 다 듣고 난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만 꼭 껴안아 주었다. 복숭아를 보며 할머니는 원산의 아버지 생각을 또 한 번 하였으리라.

그 당시 예로부터 내려오는 농촌 풍습은 청소년들의 경미한 서리인 경우에는 알고도 모르는 척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주인이 때에 따라 그 광경을 보았을 때에도 멀리서 헛기침하며 “어험! 이놈들!” 하면서 들릴 듯 말 듯 소리쳐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두기도 하던 때였다. 적당히 묵인하는 관습, 즉 일종의 교육적인 배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린 청소년들이 바른 교육을 받고 그런 행위를 스스로 하지 않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사회 풍습이라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는 미풍양속이라 볼 수도 있는데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이후 할머니는 손자 자랑하실 일이 있으면 어디 가든지 가끔 그 복숭아 얘기를 꺼냈다. “얘가 그런 애라우!” 하면서……. 할머니가 80세가 넘었고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30이 넘어 장가들어 아이를 둔 뒤에도 이웃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그 해 8월초, 남쪽 읍내에 있는 양양군청의 직원들이 북쪽 우리 마을로 피해 와서 동네 집집마다 자리 잡고 군청 사무를 보았다. 갑자기 군청이 도심지로부터 시골구석으로 피신해 숨는 꼴이니 마을 전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남조선 해방시키러 나갔다는 이야기도 별로 신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군청에서 동네 집 뒤 대나무밭 산비탈에 여기저기 방공호를 파는데 양양 철광산에서 쓰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와서 터뜨리면서 굴을 팠다. 지금도 내 고향 마을 집 뒷산엔 방공굴이 여럿 그대로 남아 있다.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려고 길게 이어 놓은 남포 심지들이 나중에 국군이 주둔했을 때도 남아 있었다.

이때 나는 고금(학질)이 걸려 무진 고생을 했다. 하루는 열이 나면서 부쩍 아팠다가 다음날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멀쩡했다. 군청 직원들이 금계랍(학질약)이란 노란 알약을 줬는데 약을 먹고 나서도 쉽게 낫지를 않았다. 참으로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약을 많이 먹으면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한두 알이 정량인 알약을 네다섯 알이나 한꺼번에 먹었다. 그날 밤 밤새도록 꿈속에서 캄캄한 낭떠러지에서 한도 끝도 없이 떨어지다 올라가고, 떨어지다 올라가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거의 죽기에 이르렀고, 할머니는 늘어져서 정신을 잃은 나를 안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얼마 뒤 다행히 회복되었지만 후일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전문가의 지시 없이 약을 오남용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때 경험으로 알았다.

우리들은 전쟁이 한참 치열했던 10월 이후와 그 이듬해 1ㆍ4후퇴 뒤에 피난 갔다 돌아온 여름철엔 그 광산용 폭약에 잇는 줄을 개울에 가지고 나가서 흔하게 널려있는 장총이나 기관총 탄피에서 총알을 빼고 화약을 그대로 둔 채 다이너마이트로 이어지는 심지를 화약이 있는 곳에 들이밀어 넣고는 돌로 탄피 입구를 꼭꼭 우그러트려서 개울 큰 바위 밑에 집어넣고서 멀리서 심지에 불을 붙여 그 탄피가 터지게 하여 큰 바위가 들썩할 정도였고 물위로 둥둥 뜬 고기를 건지는 놀이를 하였으니 실로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폭약을 터뜨리고, 고기 잡는 재미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몰랐다. 여름방학이 다 지날 무렵, 어른들이 서로들 삼삼오오 모여서 쑤군덕거렸는데 그 때부터 우리들도 학교를 나오지 말라고 휴교령을 내려 학교도 쉬고 좋아라고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에서 가재 잡고 멱 감으면서 놀기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무렵이 38선 이남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인하여 갑자기 터진 전쟁때문에 사람목숨이 벌레보다 못하게 전국 방방곡곡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이상한 일만 자꾸 있었고, 동네 인민위원장, 여맹위원장 등 새빨간 사람들이 성난 사람처럼 긴장한 안색으로 다녔다.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우리 집안 친척 어른들과 나이 든 형들은 마음속으로 무언가 좋은 것을 기다리는 그런 분위기였다.(계속)

10. B-29 항공기의 강현 역과 철다리 폭파

양력 8월 초순이 좀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위 개울 물레방앗간 집 바로 위 지소 건너편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까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났다. 우리 모두가 그 소리에 놀라 2.5km 쯤 떨어진 강현 역 쪽(지금의 속초 공항 아래 바닷가 쪽)을 내려다보았는데 날개가 엄청나게 큰, 이제까지 처음 보는 비행기(B-29) 두 대가 바다 쪽으로부터 강현 역 상공 하늘을 배회하더니 강현 기차역 상공에 낮게 내려와 시꺼멓고 커다란 쌀가마니 정도의 기다란 물체를 몇 번 떨어뜨리고는 바다 쪽으로 다시 유유히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떨어지는 시꺼먼 물체가 우리 눈짐작으로 땅에서 상공으로 10m 정도 보이더니 홀연 없어지면서 역 주변에 갑자기 연기가 풀썩 하고 일더니만 조금 있다가 “쿠웅!”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천둥치는 소리와 흡사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먼 곳까지 땅이 흔들렸다.

우리들은 너무 놀라 금방 죽을 것 같아 옷이고 뭐고 입는 둥 마는 둥 홀딱 벗은 채로 맨발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반격하는 대한민국 국군을 지원하는 유엔군 비행기(미국 비행기)가 강현 역뿐만 아니라 양양 철다리, 물치의 쌍천 철다리 속초 역 등 그렇게 올라가면서 원산 흥남 그 이북까지 폭격을 했다고 한다.

앞에 뛰는 형들이 비탈길 솔밭 야산으로 한 100m 쯤 떨어진 방공호로 치달리는데 모두 옷을 벗어 한손에다 거머쥔 채로 20여 명의 사내애들이 홀딱 벗고 줄지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들고뛰어 치달리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일이나 그때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사가 걸린 판이었다. 너무 무서웠다.

모두 컴컴한 방공호 안으로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며 들어가서 마음을 진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방공호 안쪽으로 들어가던 형들이 또 한 번 놀랬다. 우리도 웅성거리며 그 안쪽을 보니 방공호 바로 아래에서 멱 감던 윗동네 누나들과 우리 또래 여자 애들이 먼저 피신했는데 우리 일행이 뒤미처 들이닥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서로 어색하게 놀랬다. 밖으로 나갈 수 도 없고 옷도 챙겨 입지도 못하고 서로 웅크리고 눈만 멀뚱거리고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지금 다시 생각하니 배꼽을 잡고 웃을 그런 장면이었다.

한동안 진정이 된 뒤 우리도 굴 밖의 기미가 조용해 밖으로 나갔다. 또 동네에선 그동안 조용히 숨어 있던 어른들이 비행기가 날아간 지 한참 지나서야 밖으로 나와 자기 집 아이들을 찾아 목청 높여 불러대느라고 온 동네가 고함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강현 역 역사는 계속 타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무시무시하게 치솟고 있는데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지나 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강현 천 기차 다리가 폭격으로 끊어졌고 역사는 흔적도 없어졌으며 역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 놓은 마초더미(말먹이 풀) 등 전쟁 지원용 군수물자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다 타버렸다. 함경도에서부터 기차로 실어온 전쟁 지원물자들이 몽땅 다 타버린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군청요원 정치보위부 인민위원, 여성연맹위원(여맹위원) 등 동네 각 집에 숨어서 사무를 보던 집단들이 보따리를 싸기 시작 하더니 그날 밤중에 동네 사람들 몰래 우리 동네를 떠나 북으로 철수하고 동네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다. 원산의 내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죽었을 것 같은 무서움 때문이라 하였다.

가끔 하늘에 검정색 정찰기가 날아 다녔는데 우리는 그 정찰기를 “뿌웅―” 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방구 비행기’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방구 비행기가 제일 무서웠다. 폭격기보다도 더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 비행기가 떴다 하면 곧이어 공격용 ‘쌕쌕이(제트기, 훗날 들은 얘기인데 호주비행기라 했다)’가 순식간에 날아오기 때문이었다.

방구 비행기가 뜨면 2, 3분도 못되어 어디서 오는지 엄청나게 빠르고 “샤아악―” 하는 소리를 내는 쌕쌕이가 몇 대 날아와 양양 읍내 상공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폭격을 하고, 어떤 때는 속초 북쪽으로 날아가는데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우리 마을 논에도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땅에서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땅 속까지 흔들려 방공호 땅굴 천정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였다. 비행기가 가고 나면 우리들은 그 폭탄이 떨어져 땅이 넓고 깊게 움푹 팬 곳으로 달려가 구경하며 폭탄의 위력에 놀라기도 했다.(계속)

[김찬수 네티즌 논설가: http://allinkorea.net/]
 
기사입력: 2011/06/06 [08:55]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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