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선생 전쟁회고: 내가 겪은 6.25(3)
인민재판장의 폭력과 폭력당하는 업보
 
김찬수 네티즌 논설가
[편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 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지난 2편에 이어)

11. 낙동강 패잔병 인민군의 퇴각행렬

9월도 중순이 되어갈 무렵부터 우리 동네에선 매일같이 비참한 구경거리가 연일 생겼다.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씩씩하게 나갔다고 자랑하며 기세등등하던 인민군 전사들이 기가 다 꺾여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 북쪽으로 후퇴하는 모습이었다. 국군의 진격과 UN군의 공습을 피해 해변 큰 대로로 퇴각하지 못하고 양양에서 내륙 송암산 아래쪽으로 2km 떨어진 화일리에서 회룡리로 이어지는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 후퇴하고 있었는데 우리 동네를 가로질러 퇴각하는 것을 보는 그런 구경거리였다.

더러는 높다랗게 말을 탄 남녀 장교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딱쿵장총’과 ‘따발총’을 거꾸로 맨 그야말로 초라한 걸인행색의 군대 패잔병 도보행렬이었다. 부상병이 어찌나 많은지 그 처참한 모습은 어린 우리들도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던 생각이 난다. 행군 중이었는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들것에 실려 가는 군인도 부지기수였다.

한쪽 팔이 없는 군인, 양쪽 팔 모두가 없는 군인도 있었고, 들것 위의 군인들은 다리가 없는 군인들이었다. 한쪽 다리를 다친 군인들은 엉성한 목발을 하고 걸었고, 어떤 여자 군인은 배가 아주 불러 곧 출산할 때가 되었다고 동네 누나들이 손가락질로 배부른 흉내를 내면서 킥킥거리면서 쑤군거렸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클까말까 하는 어린 군인이 자기키보다 더 긴 장총을 질질 끌며 가는 모습도 많았다. 한 마디로 처절한 지옥행렬 같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했다.

동네 누나들과 아주머니들은 물동이를 가져다가 지나가는 인민군들에게 물도 떠 주곤 했는데, 인민재판을 받아 몸이 성치 않은 종덕 아저씨와 동네 아저씨들은 물을 떠다 주는 사실을 알고는 화가 나서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을 향해 “그깟 놈들에게 무슨 물을 떠다 주느냐!”고 야단을 쳤다. 그 바람에 물 떠다 주던 누나들은 훌쩍훌쩍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도 우리들과 야단맞은 누나들은 어린 동생들을 등에 업고 점심 먹을 때만 제외하고, 어떤 때는 점심도 걸러 가며 하루 종일 길가에 서서 패잔병 행렬을 구경하다가 지쳐서 목말라 하는 패잔병들에게 또 물을 떠다 주었다. 패잔병 행렬은 보름도 넘게 계속 되었다. 이 런 행렬은 이듬해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중공군과 남쪽으로 쳐 내려갔다가 4월 복숭아 꽃 필무렵 다시 북쪽으로 퇴각할 때도 똑 같은 양상이었다.

하루는 패잔병들의 퇴각 행군이 우리 동네에서 멈추어 하룻밤을 지내고 간 일이 있었다. 집집마다 인민군 여럿이 빼곡하게 찼는데 멀쩡한 군인들은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상처가 심하게 난 부상병들이 큰 문제였다. 우리 집에도 부상병들이 아랫방 윗방에 묵었는데 윗방의 부상병은 팔다리가 모두 다 절단이 나서 수족을 못 쓰게 되어 그냥 방바닥에 누워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고함만 지르고 있었다.

나는 몹시 겁에 질려 그 아파하는 인민군 부상병 아저씨를 힐끗 힐끗 건너다보았다. 할머니가 감자를 삶아서 나더러 갖다 주라고 해서 삶은 감자를 뚜가리(나무로 깎아 만든 그릇)에 담아서는 뜨겁다고 야단치는 그 아저씨 입에 “후― 후―” 불어가며 넣어주던 생각이 난다. 몸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코를 찌르고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입에다 넣어주는 감자를 허겁지겁 받아먹는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되면 어린 군인들이 상처의 고통으로 밤새도록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엉엉 우는데 할머니와 나는 그저 무섭기만 했다. 할머니는 나를 꼭 안고 독백하듯 되뇌었다.

“에 휴―! 전쟁은 하지 말아야지! 제발 전쟁은 하지 말아야지 저 어린사람들이―”하면서 어린 군인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던 생각도 난다. 돌이켜보면 그 피어나지도 못한 어린 청년들은 순박하고 선량한 우리 땅의 같은 이웃들이었는데, 김일성의 욕심에 하수인들이 되어 전쟁 통에 나아가라면 나아가고, 물러나라면 물러나는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그렇게 동족을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내몰리어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니…….

젊은이들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처참한 전투지역으로 몰아넣는 전쟁의 상흔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처참하고 또 무서운 것들뿐이었다. 이런 행렬이 네댓 차례 지나가고 또 며칠간은 조용하였다. 9월 말경 동네 아저씨들이 수군대며 국방군이 곧 들어온다고 하며 해방이 된다고 했다.

10월이 되기 바로 며칠 전날인가, 한밤중에 아래 동네에서 얼마 전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나이 많은 동네 형이 있었는데, 전쟁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다고 갑자기 고함치며 다녔다. 워낙 겁에 질린 동네사람들이라 서로가 원인규명이나 따질 새도 없이 혹시나 하고 온 동네가 간단한 보따리만 챙겨들고 한 군데 몰려 갑자기 엄청난 피난 행렬이 되었다. 아래 복골 절벽 아래 강현천변으로 이어지는 넓은 벌판에 모두 모여 밤새도록 숨어 덜덜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음날 모두 맥없이 기진하여 뿔뿔이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계속)

12. 1950년 10월 1일―나의 태극기 사랑

9월 마지막 날 오후 동네 아저씨들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알려 왔다. 내일 물치 장거리에 모두 국방군을 환영하러 나간다고 했다. 준비물은 태극기인데 네모난 흰 종이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동그라미 가운데 선을 그리고 위에는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 동그라미 주변 네 모퉁이에 비스듬히 검정색으로 세 개씩 선을 그려서 손에 들 수 있는 깃발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농사만 짓는 우리 동네 많은 사람들이 글자를 배우지 못했고,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나에게 만들어 보라고 하여 내가 대충의 얘기를 듣고 할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를 생전 처음 그리게 되었다. 방바닥에 종이를 깔고 그 가운데에 커다란 뚜가리를 엎어 놓고 연필로 사발 언저리를 따라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리고 대충 들은 말을 근거로 태극기를 그렸는데 제일 가관인 것은 원 한가운데는 원의 중심점을 지나는 선이 직선이었고 위에는 붉은색 아래는 푸른색 이런 정도였다. 동네 누나들이 물감을 타고 나는 그리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기대하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참으로 우습기가 짝이 없는 형국이었다. 내가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이 그려 도덕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태극기를 보았는데 규칙에 맞게 원칙대로 그린 태극기였다. 아주 정교히 잘 그린 것을 보고 내가 그리던 그때를 생각하고 실소를 금치 못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도 교사에게 제출한 것 중 제일 잘못 그린 태극기도 그때의 나의 태극기에 비교하면 최고로 우수한 태극기라고 할 만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태극기가 아닌 태극기를 그린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린 태극기를 보고 “찬수가 태극기를 잘 그린다.” 하면서 너도 나도 태극기를 그려 달라는 바람에 신바람이 나서 여러 장의 태극기를 그려 드렸다.

태극기의 음양, 사괘는 처음부터 모르고 그저 네 귀퉁이에 짤막한 굵고 검은 줄 세 개씩을 그려 가운데 원을 둘러싸고, 배치 등 규격이 한 군데도 맞지 않은 그런 태극기였지만 갑자기 태극기 제작의 전문가(?)가 된 셈이었다. 한편 생각하면 그때의 태극기는 참으로 나의 나라사랑 정성이 가득 담긴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 있는 태극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튿날 10월 1일, 김일성이 기습 불법 남침으로 6.25가 난지 석달 뒤에 대한민국 국방군이 38선을 처음으로 넘어 공산치하로부터 내 고향 양양을 해방시킨 날이다. 그날은 아주 쾌청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아침 일찍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물치 장거리터에 내려갔다. 온 동네 사람들이 양손에 태극기를 들고 내려갔다. 학교 운동회 날 등교하던 기분보다도 더 신나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양양 읍내 쪽 낙산사 어귀에서부터 길 양쪽으로 이 고을 저 고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들 마음이 들떠서 군대 행렬이 오지 않았는데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덩실덩실 춤들을 추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의 물치 농협 앞쯤 되는 곳에 모여 있었다. 나에게 증조모뻘 되는 일가의 좀 젊으신 쉴집(택호) 할머니는 벌써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들떠 있었다. 8ㆍ15 해방이 되고 얼마 뒤 그 할머니의 아드님 영배, 진배, 갑배 삼형제가 모두 월남하여 국방군 헌병이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동네에서 비밀리에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국방군이 저기 온다고 술렁거리더니 맨 처음 나팔을 불고 큰 북을 쿵쿵 치는 군악대 차가 나팔소리도 우렁차게 천천히 들어오는데 나는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팔을 부는 군악대 아저씨의 번쩍번쩍하는 철모가 아주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우렁찬 군가가 온천지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하늘을 찌르는 기개! 핫바지 입고 환영 나온 촌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우리 국군의 위용! 북진하면서 부르는 국방군의 군가를 따라 어느덧 우리들도 그 가사를 금방 익히고 그 길고도 긴 진군 차량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고 외치며 함께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 군가! 그 만세 소리! 그 환영! 자유의 감격! 암울한 공산 치하에서의 해방! 8ㆍ15 광복 때는 이보다 더했다지만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어른들만 쳐다보고 그저 좋아하기만 했으나 어느 정도 철이 든 뒤에도 생각해 보면 이때의 감격은 내 평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희의 장면이었다. 아마 암울했던 공산치하에서 살다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따뜻한 품에 포근히 안긴다는 감회 때문이었으리라.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1950년 10월 1일, 이 날이 우리 대한민국의「국군의 날」이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6․25 새벽 불법 기습남침이 있은 후 3개월 하고도 6일이 지난날에 우리 대한민국 국방군은 서해 옹진반도로부터 동해 양양군 현남면 기사문리에 닿는 38선에 이르기까지의 전 전선에서 쫓겨 가는 인민군을 격파하면서 38선을 처음으로 돌파하여 북진 한 날이다. 인공치하에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대한민국 국군이 올라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린 우리 주민들을 구출하여 해방시킨 감격의 날이었던 것이다.

삼팔선을 돌파한 10월 1일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우리나라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하니「국군의 날」이 아무렇게나 제정되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던 옛 일이 다시 떠오른다.(계속)

내가 겪은 6.25(19)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 이후 내가 62년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대한 뒤에도 지금까지 군가와 행진곡만 나오면 내 몸은 기쁨과 용솟음치는 애국의 기상이 몸 안에서 서서히 일어남을 느낀다. 북진하는 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게 간혹 여러 가지 물건을 던져 주는데, 태극기를 흔들던 내 가슴 앞으로 종이 뭉치가 날아와 얼떨결에 받아 뜯어보니 화랑 담배 한 뭉치였다. 담배를 피우는 내 할머니는 나중에 피워 보고 맛이 좋다고 하면서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골고루 다 나누어 주었다.

쉴집 할머니는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가운데 길 쪽으로 나가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연신 “어서 오너라! 어서 오너라! 자꾸 자꾸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치일 뻔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한참까지도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할머니는 남쪽에 가서 국방군이 된 세 아들을 기다리는 열정은 우리 어머니들의 모성과 같으리라. 기다리던 아들들이 온다는데 신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머일 이모할아버지도 희색이 만면하여서 이상하게 매달고 다니는 상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뻐했다. 온 마을 동해안 우리지방의 갑작스런 대축제였던 것이다.

인민군이 다 퇴각하였다고 하는 늦가을부터 우리 마을은 며칠간 평화롭게 지냈다. 남쪽으로 월남했다가 귀향한 동네 아저씨들이 여기저기에서 의기양양했고 그 가족들은 어깨를 재고 큰소리치면서 다녔다. 한편 이북으로 도망간 인민위원장 친인척 등 동네에서 인민재판 한다고 이웃들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패거리 빨갱이들이 모두 다 이북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의 먼 친척들은 혹시나 하여 주목을 받을까 보아 무슨 다른 잘못도 없는 듯하였는데도 마을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곤 했다.

인민재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실제로 본 인민재판의 광경은 이렇다. 동네 회관 마당에서 모임이 있다고 동네에 알리면 그날 어른들은 모두 다 나가야 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더러는 나갔고 동네 형들은 거의 다 나온다. 어린 우리도 야밤에 회관 마당에 쪼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구경을 했는데 갑자기 빨갱이 아저씨가 동네에서 순하기로 소문난 아저씨들 몇을 끌어 연단 앞에 세우더니 동네 어른 한 사람씩을 지목하면서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하며 사설을 미리 늘어놓는다.

빨갱이들이 거론한 동네 사람들은 평상시 그분들과 농사를 지으며 다정하게 지냈고, 옛날은 거의 동네가 집성촌이므로 서로를 잘 안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말들을 늘어 놓으며 엉뚱하게 갑자기 “그렇지요? 혼이 나야지요?” 하고는 다 같이 “찬성박수!” 하면서 떠들면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지 않고 두리번거리면서 서로를 어색하게 바라만 본다. 동네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동의도 하지 않는 이런 분위기에서 마을 사람 군데군데 들어있던 빨갱이 앞잡이들이 동네 사람 들으라고 저들끼리 일방적으로 “옳소! 옳소!” 하고 그들만이 박수를 요란스럽게 쳐댄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 모두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불안한 기색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쫒아 나와 서 있는 아저씨들을 한사람씩 개 패듯이 두들겨대고, 아저씨들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 되었다. 어린 우리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놀랜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고함을 친다. “동무들은 어서 집으로 가라!” 비명소리가 나오든 말든 그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이런 식의 무법천지의 일로 6ㆍ25 전후의 우리나라 전 강토의 국민들은 억울하게도 깊은 슬픔에 젖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타지에서 우리 동네에 와서 살던 신현필이란 사람과 우리 집안 인척인 김일수란 사람과 우리집안 김종덕 아저씨가 인민 재판에 억울하게도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그들로부터 매질을 당하였다. 이유는 남쪽으로 내려간 반동분자 친척이라는 명목이었다. 종덕 아저씨는 몽둥이로 두 다리를 몹시 맞아 수개월간 운신을 하지 못하였다. 김일수라는 분은 공산당들의 무자비한 매질의 후유증으로 그로부터 약 15년간을 병석으로 지내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 났다.
 
소위 저 악랄한 김일성 추종자 빨갱이들이 어진 농촌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모아놓고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는 인민들이 원하는 대로 올바르고 합법적인 재판을 하였다고 널리 알린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인민재판이란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설치는 당시의 현상이 이렇게 무법천지였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아주 원시적인 수단으로 몇 사람을 의도적으로 겁을 주어 동네사람들 전체가 꼼짝 못하고 그들의 말을 순순히 잘 듣게 할 목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수단이었던 것이다.(계속)

13. 동해 중부전선의 끔찍한 전쟁터 와중에서

국군이 38선 이북 북괴 공산치하에서 억눌렸던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물치 장거리를 차량으로 지나 속초와 간성께로 행군한 그 이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는 다시는 전쟁이 없고 서로 맞대고 총질을 하는 일이 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 다 북으로 퇴각해 인민군이 더 이상은 없는 줄 알았는데 패잔병 행렬이 다시 시작되었다.

멀리 낙동강까지 진격해서 대한민국 국군과 싸웠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앞서 우리 마을을 지나간 인민군 숫자들보다 훨씬 많게 보름여나 양짓말 소금재 고개를 줄을 이어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을 아저씨들이 말하기를, “지금 저 인민군들이 훈련을 잘 받은 진짜 무서운 군인들인데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모두다 국방군에 얻어맞고 저렇게 꼴사납게 거지행색이 되어 도망가네!”하였다. 참으로 묘한 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국군은 모두 원산 쪽으로 치달으며 진격하는데 그 뒤로 인민군 패잔병들이 걸어서 이북으로 우리 국군들을 뒤따르듯이 해안 도로 큰길을 피하여 시골길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줄을 지어 퇴각을 하다니…….

그러다가는 어떻게 맞닥뜨리면 멀리서 위협사격을 하며 총성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그저 어물어물 서로 조용조용 넘어가는 그런 형국도 있었다 한다.

패잔병들이 올라오다가 양양 낙산 해수욕장 남쪽 남대천 하단을 중심으로 갈벌 넘어가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쑤군대었다. 민간인과 군대 할 것 없이 무수한 사람이 거기서 죽었다는 바람에 낙산사 북쪽 강현 사람들은 갑자기 보따리를 싸가지고 북쪽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해변을 따라 멀리 갔다가 온 사람들은 고성 금강산 지나 통천까지 갔다 왔다고도 했다.

해변에서 조금 내륙에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도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고약한 군대들이 이북으로 도망가며 동네 사람들이고 국방군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다는 얘기에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이 크게 놀라 갑자기 피난 보따리를 싸 가지고 어둑한 저녁 때 소금재 고개를 넘어 북쪽 넘은들(넓은들이라고도 한다) 벌판을 지나 쌍천 벼락 바위를 거쳐 옹기점 중도문 뒷산 너머 청됀(청대리)까지 그날 밤 내내 북쪽으로 피난보따리 들고 이고 지고 피해 갔다.

청됀까지 갔는데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을 못 간다는 것이다. 지금의 속초 서남쪽으로 되린덕(도리원이라고도 함), 지금의 동우대학 동쪽 밑 벌판에 국방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북으로 올라가는 피난민을 보면 총질을 해 위험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네에서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 저녁, 청됀 북쪽 산기슭에 후퇴하는 인민군 패잔병 부대가 마을로 들이닥쳤다. 산기슭과 마을까지 웅성거렸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인들이었고, 부상당한 군인들은 마을 집집마다 배치되어 밤새도록 치료하며 아우성치고 북적댔다. 이로써 양쪽 군대가 대치한 한가운데에 놓인 피난민과 동네 사람들은 그저 전전긍긍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인민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보따리에 들고 온 쌀이나 감자, 옥수수 등을 선선히 내주었다.

그 이튿날 아침,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와 호각소리가 급하게 요란스레 나더니만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되린덕 벌판 배나무골 쪽으로 모두 몰려가는 것이었다. 인민군이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되린덕 벌판 격전지(뒤로 달마봉과 울산바위가 보인다) 국방군의 진지를 뚫고 후퇴하려는데 국방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바람에 필연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때 산꼭대기까지 피해 가 숨어 있으면서 그 치열한 전투를 직접 목격하였다.

이상한 현상은 인민군은 북쪽을 향해, 국방군은 남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왔다고 좋아하던 피난민이 국군의 공격을 받는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어 마을 뒷산 방공호에 뿔뿔이 숨었다. 지금은 전쟁 영화에서 보는 그런 싸움이었는데 내가 생각하기는 내가 본 그때의 전투 장면이 더 무서웠고 양쪽에서 쏘아대는 각종 총소리는 참으로 무섭고 더 컸다고 생각된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여 지금도 코끝에 그대로 묻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몇 차례인가 싸움은 반복되었고 그날 밤 인민군들은 속초 쪽 영랑호 서쪽을 따라 북으로 후퇴하였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방군이 패잔병 인민군들에게 후퇴하라고 일부러 길을 터 준 것이라 하였다. 이 전투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 한가운데 들어 있던 피난민들은 인민군이 철수하자 남쪽 마을로 돌아왔는데 곧이어 마을 어귀를 지나서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보름도 넘게 매일 매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엄청난 인민군 패잔병과 부상병들이 양양 쪽에서 해안 길을 피해 설악산이 가까운 내륙 길로 화일리, 장산리 윗길, 회룡리를 거쳐 우리 마을에 머물러 집집마다 묵어갔다. 심지어 다리가 없는 인민군을 대롱같이 커다란 망태기에 담아 나의 집 윗목에 먼젓번처럼 가져다 내팽개치듯 놔두어 식사 때면 부상병이 밥 가져오라고 고함을 질러 할머니가 허겁지겁 감자 삶은 것을 가져다주는 걸 본적도 있다. 가가호호마다 이러했다.

이런 가운데 국방군들과 인민군들이 맞닥뜨리면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강릉 북쪽에서부터 원산 아래 통천까지에 머물러 멀리 피난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살던 주민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올려 밀면 북쪽으로 피난가고, 내려 밀면 남쪽으로 피난가고 그때그때마다 누가 죽으면 울고불고 슬픔과 공포에 싸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같이 전쟁 속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이제까지 살아남은 것이 모두 다 기적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생각해 본다. 살아 돌아가는 군인들이 저렇게 많은데 그보다 죽은 군인들이 더 많다고 하니 이 땅의 남북 젊은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투하다가 죽었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애통한 일인가? 또 민간인들은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는가? 이산가족이 전국을 덮어 그 한이 55년 뒤 오늘에도 풀리지 않으니 이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먼저도 말했지만 당시 우리 집 아래쪽엔 종덕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아저씨에게는 친형님인 종순 아저씨가 있었는데 공산주의의 학정을 피해 한동안 38선 이남인 강릉 쪽으로 넘어갔다. 유순하고 마음씨 고운 아저씨는 친형님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을 받았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상처가 대단했다. 들것에 실려 집으로 오셨을 정도였다. 나중에 상처가 거의 다 나은 뒤에도 한쪽 다리를 잘 못 쓸 정도로 그 후유증이 오래가 질질 끌고 다녔다.

얼마 후 국방군이 들어와 마을에 주둔할 때 아저씨더러 다리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북쪽을 가리키면서 분하고 저주스런 목소리로 “아―! 인민군 놈들이 이렇게 했지.”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얼마 후 인민군이 내려와 같은 질문을 하니까 이번엔 남쪽 하늘을 가리키면서 “아―! 국방군 놈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했지.”라고 엉뚱하게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당시 어린 나였지만 친구들과 같이 아저씨의 그 일관되지 않은 처신을 몹시 우스워했다.

내가 거제도로 간 이후 청소년 때까지도 그랬다. 세월이 지난 먼 뒷날 그 때의 일을 다시 생각했을 때 농사만 지으며 착하고 순박하게 살았던 아저씨가 전쟁 도중에 가정을 지키고 살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그러하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가득하다.

말 한번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 중에 가정을 지키려고, 생명을 부지하려고 처절하게 살았던 종덕 아저씨 같은 순박한 우리 국민들! 일관성이 있는 행동을 했다면 경우에 따라 사람들의 목숨은 한순간에 잃게 되는 처량한 세월! 아저씨가 했던 행동을 이제야 진정으로 이해하며 아저씨의 영혼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사실 종덕 아저씨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선 모든 국민들은 다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도자란 진정으로 모든 국민들을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평화는 나를 버리고 타인을 위할 때만 찾아지는 것이다. 사회 분열 대립의 구도는 또 다른 슬픈 충돌을 불러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끔찍했던 일제시대와 8ㆍ15 광복 직후의 혼란과 6ㆍ25 같은 슬픔이 다시는 없고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뿐이다.(계속)

14. 인민군 총사령관 무정

우리 동네 어른들은 전쟁 통에도 알량한 농사지만 가을걷이를 했다. 이 싸움 통에 동네의 민심은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한 집안이라도 사촌끼리, 동서끼리 사상이 달라 갈라서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모 자식을 잃은 가운데서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네가 옳으네 내가 옳으네 하며 따졌다. 우리 마을을 비롯하여 38선 이북의 마을들은 곳곳이 이렇게 완전히 황폐한 공간처럼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들은 끼리끼리 모여 동네 아저씨 집 사랑방에서 아저씨들과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데 조력하기도 했다. 한참 가을걷이가 끝날 때였다. 물치 장거리에서 북으로 진군하는 군인들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지금 원산 이북 쪽으로는 B-29 폭격기가 폭격을 하도 많이 해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다. 특히 원산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동네 아저씨가 전해 와서 할머니와 나는 원산으로 피신한 가족들을 생각해 공포와 슬픔에 젖어 울기도 했다.

어느 초겨울에 가까울 무렵, 우리 마을엔 또 커다란 이야기 거리가 하나 생겼다.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며 낙동강까지 쳐내려갔던 인민군 보병의 총사령관 ‘무정 장군’이란 사람이 우리 집 바로 옆집에서 이틀을 묵고 간 것이다. 패전군의 사령관이지만 경계가 아주 삼엄했는데, 나도 그 집 마당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담 밖에서 건너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앞산 정승골께를 바라다보던 무정이라는 인민군 장군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어 나도 그가 나이 많은 어른이라 얼떨결에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말없이 서 있었지만 위세가 아주 당당했고 그를 본 온 동네 사람들이 말하길 키가 훤칠하고 아주 잘 생겼다고 했다. 무슨 팔로군 출신이라면서 어떤 면에서는 김일성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라고 쑤군거렸는데 당시 이북에서는 최고의 거물급이라 하였다. 후일담이지만 6ㆍ25 남침 총지휘자였는데 낙동강 전투에서 패전하는 바람에 김일성에게 제거 당하였다고 했다.

이 무정이란 사람이 총지휘하는 인민군이 다부동 전투와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북상하는 중이었는데 그들은 먼저 퇴각한 행렬보다 더 초라하고 더 비참한 행색이었다. 이들이 퇴각군인 부대의 마지막 행군 행렬이라고 하였다.

12월 말쯤 되어 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또 난다는 것이다. 바로 중공군의 전투 개입 때문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서로가 눈치들을 보고 걱정이 태산 같았고, 한숨소리만 온 동네에 가득했다. 월북했다는 사람들의 남은 친인척들이 눈초리가 다시 사나워지는 듯한 낌새였다.

1월에 들어서자마자 하루 저녁에 물치리에서부터 강선리 등 송암산 쪽으로 올라가면서 온 강현 일대에 집집마다 난데없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인민군대가 또 밀려오는데 그들이 머물 민가를 없애야 싸움하는 데 유리하다는 이유로 청년방위댄가 뭔가 하는 국군 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치안경비대라는 민간인 비슷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초가집들에 불을 싸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우성치며 모두 매달려 초가지붕에 불을 붙이지 말아 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더러는 그들과 동네 사람들의 친분으로 불을 지르지 않고 넘어가는 집도 있었다. 물치에서부터 시작해서 강현 면 일대 강선, 회룡, 장산, 석교, 둔전, 간곡, 복골 곳곳에 불을 질렀는데 한 밤중에도 송암산 아래 강현의 온 고을이 훤하도록 초가집들이 활활 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 동네 중간부터 송암산 쪽 윗동네는 청년들이 많이 올라가지를 않아 불붙은 집이 초입새 한두 집 정도였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또 한 차례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다. 눈 덮인 산야는 새하얗게 되어 깨끗해 보였고 고요했으나 집집마다엔 전쟁이 스치고 간 흔적으로 추수한 낟가리보다도 더 높게 근심들만 쌓여갔다.(계속)

15. 끊이지 않는 우리 동네의 상흔(傷痕)

물치 장거리에서 신나게 춤을 추면서 국군을 환영하던 쉴집 할머니, 51년 6월 이후 국방군이 계속 주둔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쉴집 할머니의 세 아들은 영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했다. 동네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마도 남쪽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을 거라고 하였는데 그 뒤 쉴집 할머니는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한동안 정신을 잃고 생활하다가 60년대 초반에 많은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이런 슬픔은 서로가 말을 않고 지나서 그렇지 지금도 우리나라 도처에 깔려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 현대사에 깊이깊이 들어 있는 상처가 바로 6ㆍ25의 아픔이고 슬픔인 것이다.

쌍천 벼락바위께 안쪽 마을 옹기점이란 동네에 나의 할아버지와 이종사촌간인 안학조(安鶴祚) 할아버지가 살았다. 오래 전부터 천주교 신자 가족이었는데 아마 천주교 박해 시절부터 신자이던 것 같다. 지금 따져 보면 나의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115~6세 정도? 이 할아버지 가정도 슬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내가 1963년 23살 군 복무 중 보름 휴가를 받아 서울 집에 머물다 할머니와 같이 고향엘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안학조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을 곱게 길렀는데 외모와 풍채가 고운 선비의 풍모였다. 할머니와 내가 왔다 하여 그 댁 할머니가 아주 반겼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는 나의 할머니와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그때 같이 들었는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을 그리는 한 맺힌 이야기였다. 그 댁 아저씨는 8ㆍ15 해방된 뒤 6ㆍ25 전에 남하하여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었다. 6ㆍ25가 지난 뒤 수복 후에 할아버지는 아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기에 할아버지는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입대한 때와 아들 이름과 병과를 대니까 조사 기록을 보더니 장교는 맞긴 맞는데 전사하지는 않았고, 지금 어느 부대에서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아들이 복무하는 군부대를 찾아갔는데 면회 신청 후 나타난 고급 장교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름도 같고, 병과와 입대 시기도 같았는데 말이다. 장교 전사자 명단에도 없고, 그 장교의 본적도 강원도 양양군 속초 읍 옹기점 할아버지 사는 집터 번지로 되어 있었다는데…….

할아버지는 그 때부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돌아가기 전까지 노력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들 이야기만 하였다.

1ㆍ4 후퇴 그 뒤에도 우리 동네 청룡 뒷산 너머 넘은들 벌판과 또 양양 남대천 일대에서는 여러 차례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주둔하고 국방군이 밀고 올라와 주둔하고 하는 치열한 전투가 여러 번 있었다. 양편의 죽은 군인들의 시체가 벌판에 즐비하고 흘린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 처절함을 짐작케 한다. 이런 공방전이 몇 달 동안 이어졌고 첨예한 대치 상태가 강산과 사람들의 마음을 무서운 침묵으로 가라앉게 했다.

1ㆍ4 후퇴 뒤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머일 이모할머니와 나의 할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며 한탄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일이 있었다. 양양 면 낙산해수욕장 안쪽께로 조산리 어느 집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데 남편은 전쟁 통에 인민군대에 끌려간 뒤에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을 기다리는 집이 있었다. 사실은 젊은 가장들이 없어진 경우는 38선 이북 공산치하 우리 고을에는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판국에 전쟁 통이라 먹을 것도 없었다. 그때 마침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는데 배가 너무 불러 꼼짝을 못할 지경이다가 용케 견디며 출산을 하고 보니 딸아이가 출산되어 출산을 마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진통이 있어 한참 뒤 또 낳으니 딸아이였다 한다. 쌍둥이였던 것이다.

둘째아이를 낳자마자 산모가 어지러운 정신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시어머니와 같이 그 둘째를 탯줄도 끊지 않고 장독대 밖의 수북이 쌓인 눈 위에다가 포대기에 싼 채 내버렸다는 것이다. 갓 나은 영아가 추운 한겨울에 세 시간이나 울다가 소리가 나지 않아 나가 보니 가련한 아기는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할머니로부터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57년 지난 지금까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어디서나 어린이를 본다든지 임산부들의 숭고한 모습을 볼 때, 또 서울 성북동 가톨릭 입양원이라든지 그 외의 장소에서 어린 생명들의 엄숙함을 보면 하느님이 내는 존재의 귀함을 항상 생각하고 만나는 이웃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그때마다 마음자세를 바르게 추스릴 때가 많다.

생명의 존엄성이 전쟁 통에 어린 영아처럼 버림을 받고 또 전쟁까지 일으켜 가면서 백성 잘 살게 해준다며 결과적으로 독재자 자기들 무모한 욕심만 채우려고 우리 젊은이들을 인간 살육의 장으로 마구 몰아넣다니……. 잘 이어 나가던 하나뿐인 국민들의 생명을 옳게 펴지도 못하고 벌레목숨보다 더 못하게 취급을 하는 얼치기 독재자 살인마 김일성의 무모한 통치방식이라니!

우리 마을 강현은 끔찍한 전투가 왔다간 가고 또 오고 하는 통에 민심이 마구 엉클어졌다. 국군의 진격과 마을마다의 주둔으로 인민군 따라 월북한 가정의 친척들은 그들대로 쥐 죽은 듯이 말도 못하고 기웃기웃 여기저기 눈치나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대들이 재차 들어오면 금세 어깨를 꼿꼿이 펴고 우쭐대고, 그러면 국군이 왔다고 좋아서 뛸 듯이 기뻐하던 사람들은 금세 풀이 죽어 분위기 살피고, 이런 시대 변화 속에서 한 마을에 살고 있게 된 국민들…….

1950년 10월초에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아직도 많다. 그 즈음 국방군이 양양을 거쳐 속초를 탈환하고 계속 북상하여 고성, 통천을 차례로 탈환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할머니와 나는 원산에 있는 부모와 어린 두 여동생이 그래도 무사하길 바랐다. 할머니는 집 뒤 장독대 옆의 돌 바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는 틈이 날 때마다 밤낮으로 두 손을 싹싹 빌며 치성을 드렸다.

밖에서 원산지역에 대한 불길한 소식만 전해 듣고 온 날은 몇 번씩이나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누구에게 하는지 그저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청됀에서 무시무시한 전투를 보고 놀란 가슴으로 마을에 돌아온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전쟁 사이사이에 지어 놓은 들판의 곡식들을 거두어들였다.

며칠간 조용하던 마을에 또 큰 일이 벌어졌다. 대청봉과 화채봉 아래 송암산 쪽에서 인민군 50여 명이 개울말로 들이닥친 것이다. 집집마다 밥을 빨리 지으라고 총을 겨누고 주민이 밥을 짓는 동안 보초 경계를 서고 난리가 난 것이다. 동네의 친척 형이 몰래 빠져나가 물치 장거리께로 죽을힘을 다하여 달려 내려가 국방군 부대에 인민군이 왔다고 신고했다.

곧 국군 전투부대가 출동하여 위치가 높은 양짓말 벌판의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인 논두렁 끝에 완전히 매복하고 바로 아래 개울말의 동정을 지켜보다가 개울말의 인민군을 향하여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으니 항복하라!”고 소리를 쳤다. 한동안 기척이 없던 인민군들은 밥도 못 먹고 갑자기 들고 일어나 앞산 정승골 쪽으로 살금살금 튀기 시작했다.

국군들은 일제히 건너편 산에 도망가는 적을 발견하고 일제히 사격을 했는데 먼젓번 청됀 전투 때처럼 총소리 위세가 대단하였다. 양짓말 논둑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 많은 인민군들이 일시에 도망가다가 거의 전멸되는 일이 벌어졌다. 무시무시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마을은 며칠간 조용했다.(계속

16. 인민위원장의 말로

그러던 어느 날, 아래 윗동네 아저씨들 여러 명이 소금재 고개 넘기 전 왼쪽에 사는 아저씨 집으로 올라갔다. 재산이 아까워 미처 월북하지 못했다고 하는 인민위원장 집으로 손과 손에 지게작대기 등 몽둥이를 모두 하나씩 들고 웅성거리면서 다급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동네 친구들도 와글거리며 구경거리 났다고 뒤따라갔는데 나도 호기심이 나서 따라가 보았다. 그 집 앞에 다다른 아저씨들 가운데 남쪽(38선 이남)에 나갔다가 고향에 들어온 몇몇 아저씨들이 주동이 되어 집안을 향해 누구누구는 밖으로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같은 문중 아저씨들은 그곳까지는 같이 갔으나 멀찍이 떨어져 매질에 합세하지는 않았다. 여러 번 외치자 인민위원장이 흰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힘없이 마당으로 나오니 동네 아저씨들이 다짜고짜로 대들어 둘러싸더니만 지체 없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어떤 아저씨가 작대기로 인민위원장의 왼팔 가운데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인민위원장 아저씨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댔다. 왼쪽 팔이 부러졌는지 피가 나와 겉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 인민위원장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사정하듯이 말하였다.

“이거 너무하는 게 아닌가? 잘 좀 봐주게나…….” 하니 머일 이모할머니의 큰 사위 영옥 아저씨가 큰소리를 지르며 “야, 이 개 같은 놈아! 우리 동네 죄 없는 사람들을 인민재판에서 두들겨 병신을 만들어 놓고 너는 영영 잘 살 줄 알았느냐! 너도 한번 당해 보아라!” 하면서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날렸는데 때를 같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그 때의 처참한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자리에 오지 않았지만 인민재판을 받았고 들것에 실려 집에서 앓고 있던 종덕 아저씨와 동네 다른 아저씨들이 생각났고 인근 동네에서도 인민재판 때마다 몽둥이질을 당했을 터인데 ‘아! 거기서도 바로 이러 했었겠구나’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인민위원장 가족들, 아주머니와 딸 등이 나와서 울고불고 살려 달라 하니까 한 아저씨가, “야, 이 여맹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개 썅년아!” 하더니만 발길로 허리께를 걷어찼다. 그 딸은 우리도 동네에서 가끔 보는 아주 멋쟁이인 공산당 청년 당원인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아이고 선생님”하며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고 비겁해 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집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인민위원장은 국군이 데려가 집 너머 뒷산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였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하였지만 목격자가 없어서 확실하지가 않다. 비밀리에 보따리 싸가지고 피해 급하게 북으로 진격한 국방군의 꼭뒤를 따라 요리조리 피해 이북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물치 장거리에서 어느 쪽 군대인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이 총질을 하면서 복골 쪽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ㆍ중ㆍ하복골 세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상복골 화채봉 올라가는 골짜기로 몰려들어 피신을 하였다. 이때 나는 할머니가 신겨준 두툼한 버선을 신고 집신을 단단히 얽어맨 뒤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비탈 저 비탈 바위 뒤와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숲이 있는 곳에 밤새도록 머물면서 비워 두고 온 우리 마을 동정을 살폈다. 늦가을이라지만 설악산 아래는 밤이 되면 벌써 초겨울 날씨로 바뀐다. 남쪽에서 어마어마한 군대가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말도 있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리민다는 말도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는 말에 초조감만 가득하였고 그래도 하루 낮밤을 더 피신하다가 망보던 사람들이 올라와서 물치 장께가 조용하다 하여 사람들은 살금살금 자기 집을 찾아들었다.(계속)

17. 눈이 많이 온 해 1ㆍ4 후퇴

1951년 1월 4일 다시 말하지만 그 유명한 1ㆍ4 후퇴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인민위원장을 패버린 동네 아저씨들은 모두 남쪽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틀 뒤 인민군이 우리 동네에 또 들어왔다. 그해 설날은 눈이 아주 많이 왔지만 명절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 동해안 지방 우리 고향은 음력설 전후하여 보름이 지날 때까지 함박눈이 많이 와 쌓이는 곳이다. 설악산에서 동해안 벌판까지 흰 눈으로 가득 덮여 그 눈경치가 아주 볼 만한데 전쟁이 한창인 그 해에도 어김없이 그러했던 것 같다.

‘쌕쌕이’가 연신 하늘에 굉음을 내며 수시로 날아다니고 여기저기에 폭탄을 떨어뜨려, 한번 터졌다 하면 천지가 진동했다. 그 때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방공호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 개울말 머일 이모할머니 댁에서 머일 이모할아버지와 나는 짚신을 삼고 있었다. 머일 이모할아버지는 짚신 잘 삼기로 고을 안에서 소문나신 분이다. 할아버지에게서 짚신을 잘 삼는 방법을 정신 차려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허리에 새끼로 허리띠를 두르고 배꼽께 줄을 이어 양쪽 엄지발가락으로 집신에 들어갈 가느다란 새끼줄을 접어 늘이고 짚신을 반 이상을 삼고 있는데 갑자기 양양 읍내 쪽 하늘에서 ‘방구 비행기’ 소리가 “뿌―웅” 하고 났다.

방구 비행기가 떴다 하면 2, 3분 뒤에 어김없이 제트기가 날아오게 되어 있다. 머일 이모할머니 댁 온 식구들은 모두 두터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이불이란 이불은 모조리 우리들 머리꼭대기에 덮어 놓았다. 그 바람에 방바닥에 납죽 엎드려 있던 우리들은 산소 공급이 차단되어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이불 속에서 공기를 쐬려고 발버둥을 치곤 했다.

그런데 나는 불편하더라도 그곳에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겁도 나고 갑자기 할머니 얼굴이 떠올라 이모할아버지가 붙드는 것도 듣지 않고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할머니가 있는 양지마을 방공호로 가고자 함이었다. 어느 결에 날아왔는지 양양 하늘 꼭대기에는 여러 대의 ‘쌕쌕이’들이 날아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무서운 기총사격을 하면서 공습을 하는 중이었다.

개울말 동네는 낮은 쪽이어서 괜찮았는데 나는 언덕에 올라 양쪽으로 논만 있는 달구지길 허허벌판을 죽어라고 뛰어가는데 항공에서 보면 노출이 다 된 셈이어서 금세 발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양양 읍내에서 ‘쌕쌕이’ 몇 대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공습하는 소리고 뭐고 다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고 할머니 있는 방공호 쪽 산으로만 들이뛰면서 치달았다.

방공호 쪽에 다다르니 내가 벌판에서 혼자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던 동네 어른들이 들어오기 무섭게 야단을 치기 시작하는데 그때 나는 혼이 많이 났다. “그곳에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지 저놈의 자식이 동네사람 다 죽이려고 한다.” 하고 야단을 쳤는데 특히 우리 동네 규율 담당격인 종렬 아저씨가, “너 이놈! 그러다가 기총사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고 호통을 칠 때는 총소리 들을 때보다 더 무서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내가 벌판을 뛰어 들어오는 모습에 방공호에 숨어서 밖을 내려다보시던 동네 어른들이 더 놀랬던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으며 종렬 아저씨에게, “그만 하시게나! 아이가 너무 놀라고 있지 않나! 무사했으면 됐지!” 하였다.

한숨을 돌리고 난 뒤 나는 내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짚신 삼다가 그대로 들고 뛰어 반쯤 넘게 삼던 짚신이 아랫배 아래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이후 우리 동네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인민군대가 주둔해서 흰 가운을 길게 하여 등 뒤에 매달고 다녔는데 비행기만 떴다 하면 그 자리에 흰 가운을 뒤집어쓰고 납죽 엎드렸을 땐 눈인지 사람인지를 육안으로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어린 나는 하마터면 인민군에 총살을 당할 뻔하였던 일도 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어디 가고 작은집 할머니가 나와 함께 집에 있었는데 마침 우리 집에 인민군 두 명이 묵고 있었다. 작은댁 할머니는 인민군으로 입대한 두 아들 종각, 종숙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서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나를 가리키면서, “얘가 국방군이 올라왔을 때 여러 사람들과 같이 있는 내 앞에서 큰 소리로 빨갱이들은 모두 다 죽여야 돼! 하면서 여러 번 말하는 바람에 나는 섭섭해서 견디기 어려웠다.”하고 말을 했다.
 
졸린 듯 가만히 듣고 있던 인민군 두 사람은 작은댁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종전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독이 바짝 오른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았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세워 놓은 따발총을 잽싸게 잡더니만 작은댁 할머니를 보고 나를 가리키면서, “야가 할머니와 어드렇게 됩네까?”하고 물었다. 이 기색을 살핀 작은댁 할머니도 심상치 않았던지, “얘가 바로 내 손지(손자)라우!” 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인민군이 나를 독하게 노려보다가 다시 따발총을 벽에 세우더니 나를 보고,“앞으로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총살이야!” 하였다.

나는 갑자기 총살한다는 말에 너무 놀라 숨도 잘 쉬지 못하면서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때 따발총을 들었던 인민군의 눈초리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듯하다. 작은댁 할머니가 말 한번만 더 잘못했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른이고 아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때였다.

2월 중순경, 어른들은, 공습 후 양양 읍내까지 국방군이 들어왔는데 다시 강릉 쪽으로 후퇴했다고 조용히 말했다. 3월 말 가까이까지 우리 마을엔 인민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어두워진 뒤 갑자기 동네에 주둔하던 인민군들이 모두 철수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제일 친한 친구이자 친척 집안의 나보다 한 살 아래 동생인 중수와 개울말 인민재판 때 다리를 크게 다친 아저씨 댁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사람 소리가 웅성거려 문틈으로 밖을 빼꼼이 내다보니 논밭 위로 하얗게 덮인 눈에 달빛이 비쳐 인민군들이 동네 소들을 모두 몰고 군인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소금재 고개께로 넘어가는 행렬이 보였다. 소를 급히 몰고 가다가 아저씨네 앞길 아래 논 쪽 비탈에 쌓인 눈에 미끄러져 내리 굴러 아우성 소리가 요란히 나기도 했다. 그 이튿날 어른들이 말씀하는데 그 동안 동네에 남아 있던 빨갱이와 빨갱이 비슷한 자들은 몽땅 그 인민군대와 같이 북으로 다 넘어갔다고 했다.

이때 소금재 인민군들이 눈이 덮인 고개를 넘어간 그날 이후 윗복골 마을과 우리 마을 그리고 회룡리 일대엔 또 슬픔의 이야기가 마을마다 퍼졌다. 인민군들이 후퇴하며 마을을 떠날 때 마을마다 남아 있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만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 중 힘깨나 쓴다는 남자들은 모두 불러 앞세우고 짐을 지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인민군 총부리 위협에 못 이겨 짐을 지고 갔는데 그 일행들이 넘은들을 지나 벼락 바위께 쌍천을 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캄캄한 밤 뿌연 눈길에서 짐을 내려놓고 쉬는 동안 일행 중 이북으로 가기 싫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 약속으로 짜고 있다가 출발하고 얼마 있지 않아 중도문으로 들어서기 전 인민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갑자기 짐을 벗어 던지고 다시 벼락바위 쪽 소금재 고개께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한다.

한밤인데도 이 낌새를 알아차린 인민군들이 따발총과 장총을 쏘면서 도망가는 일행 뒤통수를 쫓아오는데 장잿터께로 도망한 사람들 몇은 무사하고 소금재 고갯길로 다시 넘으려 도망치던 사람들이 따쿵 총으로 드르륵 하고 쏘아대는 사격에 맞아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기진하고 공포에 젖어 아주머니 할머니들의 눈에 눈물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나의 친구 아버지들 몇이 이때 안타깝게 희생되었다.(계속)

18. 설악산 전투

5월 말쯤 설악산 대청봉 아래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낮에도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그 유명한 설악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가 일어난 곳은 화채봉 골짜기와 능선 그리고 대청봉 동쪽 골짜기 쪽이라고 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를 우리 동네에서 밤낮으로 들었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어디에 포탄이 어떻게 떨어졌고 어디에서 양쪽 군대가 총을 쏘았는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무섭게 터지던 포탄 소리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콩 볶듯 하는 소총 소리와 동해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함포소리 그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한 포탄 터지는 소리만 저 계곡에서 있었겠지 하고 내 마음에 아른거릴 뿐이다.

멀찍이 떨어진 동해바다에서 UN군 전함이 함포사격을 하는데, 비유하자면 소북과 대북으로만 형성된 타악기 연주단의 연주소리와 같았다. 리드미컬하게 장단을 맞추어 규칙적으로, “쿵닥 쿵닥 쿵닥 쿵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다닥……. 쿵 쿵 쿵 쿵……. 슈잉 슈잉 솨아아…….” 하고 소리가 나면 조금 있다가 우리 동네 상공으로, “슈아악 슈아악… …. 씨잉 씨잉……. 후아악 후아악…….”하며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로 밤에 났는데 이 소리는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해상에서 설악산 내륙을 포격하는 함포소리가 그렇게 났던 것이다.

이렇게 일어난 설악산 전투는 우리 국방군이 진군하는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강원 북동부 태백산맥의 모든 능선을 포함하여 그 아랫동네 서쪽으로는 인제, 서화, 그리고 지금의 양구군 해안 면과, 동쪽으로는 간성과 고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줄기차게 벌어진 인민군의 공격과 우리 국군의 방어와 공격전이었다.

1951년 늦봄 내내 동해에서 올라오는 함포소리가 끊이지를 않았고 설악산 일대 전역에서 포탄의 굉음이 밤낮 없이 산천초목을 진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오랜 동안 쉼 없이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어른들의 말로는, 바로 북쪽에 금강산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더더욱 지독했다고 하였다. 또한 설악산 전투에서 함포의 지원사격이 없었으면 우리 국방군이 도저히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시간이 지난 뒤 어른들이 말했다. 바다에서는 함포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튿날부터는 하늘도 먹구름으로 덮여 장대비가 주룩주룩 밤낮으로 내렸다.

이런 가운데 민간인이 거주하는 우리 동네와 이웃동네에서도 큰 일이 있었다. 동네 기운께나 쓰는 청년들이 숨어서 지내다가 주동이 되어 상복골, 둔전리 석교리 등지에서 설악산 전투에 투여된 국방군 식량보급을 우리 강현에 사는 사람들이 지원하였던 것이다. 식량 가마니를 지게에 지고 송암산 뒤로하여 가파른 화채봉 골짜기 쪽으로 올려 나르고 둔전리 쪽과 간곡리 청년들도 대청봉 아래 골짜기로 올라가 우리 국군 진지에 식량을 날랐다.

사흘 낮밤을 그렇게 쉬지 않고 날라다 국방군이 전투에 이기도록 자발적으로 힘을 썼으니 민간인들의 애국적인 성의도 대단했다. 공산 치하에서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서러움을 받았으면 생명을 걸고 국방군을 돕자고 그 가파르고 높은 설악산 골짜기까지 식량 가마니를 지고 오르내렸겠는가. 그런데 설악산 전투에서 진 인민군이 금강산 쪽으로 모두 도망을 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국방군에게 패한 패잔병들이 후발대로 잠행해서 북쪽으로 쫓겨 갈 때 마을마다 들렀는데 이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밀고로 쌀가마니 지고 나르던 청년들이 많이도 납치를 당했다.

이들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윗복골 서울집, 밀양집, 큰고성집, 작은고성집 형제분, 오석집, 안산집, 밤나무집, 작은 가랫핏집 등 그리고 둔전리의 추씨 아저씨 석교리의 김씨 아저씨 등등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납치당해서 총살당했다 하는데 지금도 슬픔을 안은 아주머니들과 후손들은 마을을 지키고 산다.

세월이 지나 그때의 우리 또래는 70세 안팎이 되었고 아주머니들은 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 납치당한 사람 중에 후손이 없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 마을 안에서 서로의 갈등과 오가며 교차하는 남북 군인들 틈바구니에서 밀고 당한 사람들이 붙들려가고, 그런 뒤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경계하며 지내고, 참으로 전쟁이란 이렇게 온천지의 평화를 박살내고 휩쓸어 무너뜨렸던 것이다.

설악산으로 날아가는 포탄이 오발되어 송암산을 넘지 못하고 산 아래 떨어져 불발탄이 된 것이 있었다. 이것을 윗마을에서 주워다가 마을 공회당 앞마당에 뇌관을 밑으로 하고 길이별로 일렬로 주르륵 땅바닥에 세워 놓았는데 작은 것도 있었지만 큰 것은 웬만한 사람이 들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무거운 것들이었다.

마을 형들과 우리들은 그것들을 겁 없이 들어가며 기운 자랑들을 하였다. 불발탄이라고 위험하지 않은 게 아닌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후에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주워온 포탄을 가지고 놀다가 포탄이 터져 마을이 둘러빠지고 또 죽은 사람도 많았다.

나의 왕고모 할머니의 큰아들 안동석 아저씨, 즉 내 아버지의 고종사촌 동생 되는 아저씨가 겨울에 낟가리에서 검불을 한 아름 안아다가 소여물을 끓이느라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었다. 그런데 한참 타들어가던 아궁이 속에서 갑자기 수류탄이 터져서 커다란 소여물 통과 부엌 전체가 굉음과 불똥으로 난장판이 된 일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나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사상이 다른 나쁜 사람이 아저씨 몰래 수류탄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어 휩쓸려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아저씨도 폭음과 화염과 파편으로 온 몸을 크게 다쳐서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는데 겨우 실명은 면하였으나 그 이후 평생 동안 그믐날 밤 야경을 보는 느낌으로 거의 맹인같이 살았다.

그 이후 눈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 복용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특히 생 뱀만 있다면 그것을 구하려고 불원천리하고 가서 구해서 복용하였다. 몸의 다른 곳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눈에는 효과를 보지 못한 것 같았고 그 폭발 후유증으로 50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의 아버지 즉, 나의 왕고모 할아버지는 양양 일대에서 제일 기운이 세어 안장사라 불리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땅바닥에서 수 맷돌 짝에 뾰족이 나온 쇠를 앞 잇빨로 깨물어 땅바닥에서 머리 위까지 하늘로 쳐들어 올렸다 하니 힘이 얼마나 센지 짐작을 할 수가 있겠다.

1967년도 동석 아저씨는 돌아가기 얼마 전 서울 성북동 우리 집에 다녀갔는데 그때 나는 아저씨를 안내하여 창경궁과 비원 구경을 시켜 드렸다. 아저씨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안내하는 나에게 “이 코스는 어디로 가는 곳이고 저 코스로 가면 어디로 가는 길이야?”라고 방향을 코스라고 영어로 말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수도 없이 묻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저씨의 큰아들 광혁은 나의 6촌 동생이다. 삶의 자세가 아주 성실해서 지금도 양양 일대에서는 신의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이웃들과 손을 잡고 농촌마을을 잘 일으켜서 부농의 마을로 이끄는 성실한 그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든든한 느낌이 든다.

1ㆍ4 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전세를 뒤집어 북상할 때 어느 저녁 무렵 나는 할머니와 같이 왕고모 할머님 댁에 갔다 왔다. 내려오는 길에 낙산사 위로 갑자기 비행기가 떴는데 절간에 포탄을 투하해서 낙산사에 불길이 올라 시커먼 연기와 함께 하늘을 찌르던 장면을 보고 아랫동네 우리 집으로도 못 내려가고 할머니와 밭둑에 웅크리고 숨어 오들오들 떨던 생각도 난다. 전시라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은 이런 끔찍하게 무섭고 놀라운 구경거리뿐이었다.(계속)

19. 전쟁 유행병 장티푸스

3월쯤 되어 우리 동네에 역질이 돌았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쟁 통 한가운데 들었던 동해안 전체에 역질이 돌았다. 장티푸스가 온 것이다. 전쟁보다 더 무서운 소리 없는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감염된 환자들은 고열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정신을 잃어 대부분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은 회복된 다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누구 집 아이가 죽었다. 누구 집 아저씨와 누구 집 할머니가 돌아갔다…….

매일같이 슬픈 얘기만 들려 왔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 뒤에 찾아오는 괴질에 죽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이렇게 또 다른 아픔을 낳았던 것이다.

얼마 후 나도 장티푸스에 걸렸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데 나는 금방 인사불성이 되었다. 한 열흘도 넘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혀 몰랐다. 방공호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친척이고 뭐고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유행병 앞에서는 인정사정도 없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방공호에서 쫓겨났다. 할머니는 축 늘어진 나를 업고 길가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방공호 아래 있는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서 자리했다.

이 집은 그때 큰아들 민태 형과 형수가 극렬한 공산주의자로 월북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나에게 친절하던 그 형이 우리 집 전담 감시자였다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월북한 민태 형이 결혼할 때가 생각난다. 늦은 봄쯤이었는데 그 집 화단에 온갖 꽃이 피어 참 아름다웠다. 특히 노란 꽃이 키가 큰 여러 대궁에서 무더기로 깨끗이 피었는데 멋있어서 가끔 유심히 쳐다보던 생각이 난다. 형이 장가를 가는 잔칫날 마당에서 시집살이 온다는 형수를 봤는데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도 아니고 줄곧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그 눈감은 모습이 하도 이상하고 답답해 보여 그날 저녁 어두컴컴할 때 동네 형들과 누나들 뒤꼭지를 따라 그 집 사랑방 앞으로 갔다. 나는 툇마루 끝에 매달려서 꼬마들은 저리 가라는 누나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호기심 가득하여 형들이 뚫어 놓은 창호지 문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잔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집안 형수는 방안에서도 여전히 귀신처럼 눈을 내리깔고 꼼짝 않고 있었다.

머리에 족두리를 쓰고 양 볼과 이마엔 연지곤지를 찍어 바르곤 그 예쁜 여자가 쥐 죽은 듯이 앉아 숨도 쉬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신부가 말도 않고 있어 귀신처럼 보였다. 형들과 누나들은 연신 키득거리며 무엇이 좋은지 서로들 힐끔힐끔 쳐다보고 손바닥을 비벼가면서 법석을 떨었다. 다음날도 그 집 마당을 어슬렁거렸는데 그 새 신부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역질에 걸린 나는 할머니와 같이 텅 빈 큰 쉴집 대청마루 밑에 웅크리고 숨었고 불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였다. 보름 가까이 오들오들 떨고 지냈으니 이왕 정신을 못 차리고 늘어져 투병하는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간호하는 할머니의 고생은 오죽하였으랴. 할머니는 당신 생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손자를 살리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전쟁 통에 무슨 예방약이고 치료약이 있었겠는가? 전통 한약재 하나 없는 그때의 상황이다. 생짜로 앓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방공호에 있는 동네 친척들은 얼씬대지도 상대하지도 않았다. 감염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열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보름 동안 두 차례인가 어떻게 희미한 기억이 생각날 뿐 그 외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때 할머니가 하얀 무를 잘게 썰어 빨간 실고추를 띄워 만든 물김치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었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시원하고 입맛이 도는 물김치 맛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서서히 회복하는 나를 보던 할머니는 매일 울다가 다 말라 버렸을 눈물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흘리며, “찬수야, 이제 됐다! 네가 살아났으니 내가 네 애비 에미에게 너의 손목을 넘겨 줄 수 있게 되겠구나! 이제 됐다! 이제 됐다!” 하면서 기뻐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는 중에도 그 무서운 장티푸스에도 전혀 전염되지 않았던 것인데, 지극한 사랑의 일념에는 맹위를 떨치는 전염병도 감히 우리 할머니를 범접치 못하였으리라!

요즈음 나는 손녀딸을 돌보고 있는데 가끔 아들 내외가 손녀딸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친정집을 다니러 갈라치면 2~3일 간은 집안이 텅 빈 것 같은데 하물며 그 옛날 나의 할머니는 어떠했겠는가. 또 홀로 살아난 나의 아버지 한 분만 쳐다보고 살아왔으니 나에 대한 집착이 어떠하였겠는가.

51년 그 해가 할머니의 회갑이 되던 해였다. 난리 통에 무슨 회갑이고 설이고가 있겠는가. 장티푸스를 거뜬히 이기고 일어선 나를 보고 동네 친척들은 우리를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장티푸스를 앓고 난 사람들은 모두 머리털이 몽땅 빠지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머리털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계속) [올인코리아: http://allinkorea.net/]
 
기사입력: 2011/06/07 [09:19]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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