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선생 전쟁회고: 내가 겪은 6.25(4)
종북좌익세력이 설치면, 6.25 같은 대학살이 온다
 
화곡 김찬수 선생
[편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 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20. 소금재 고개

전황은 다시 국방군의 진격으로 인민군인들은 우리 마을에서 완전히 북으로 물러갔다. 1951년 이때 4월 중순쯤인가 하여 멀리 남쪽으로 내려갔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1950년 9월 말 그때처럼 아주 지친 모습으로 꾸역꾸역 또 밀려 올라왔다. 그때 우리 집 텃밭 대나무 옆 언덕 쪽으로 빨간 뙈기복숭아(개복숭아) 꽃이 아름답게 피어 한참 볼 만하였다.

패잔병 인민군들이 줄을 지어 다친 몸을 이끌고 소금재 고개를 넘어가다가 모두들 쉬는데 인민군 한 사람이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여 우리 텃밭 쪽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나무 밑에 총을 내려놓고 복숭아나무에 기어 올라가 아름다운 꽃가지를 여러 개 꺾어 갔다. 기진하여 걷다가 쉬는 한 여자 인민군에게 건네주는데 그 반색하던 여자 인민군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패잔의 행렬이 그렇게도 초라한데 잠시 동안이겠지만 복숭아꽃을 건네받은 그 여자 인민군의 좋아하는 표정이란!

4월 중순 넘어서 엄청나게 많은 국방군이 우리 동네 앞 관덕정 공터 넓은 곳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개울말 정승골 넘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작은 서당집의 커다란 기와집에 사령부 사무실이 들어섰다. 우리 동네 소금재 고개 너머 북쪽 넘은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을 경계로 도문 속초 쪽으로는 인민군이 주둔하여 쌍방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양상으로 전황이 형성되었다. 넘은들 한복판에 철조망이 설악산 입구 핏골에서부터 내려와 상도문 그리고 장잿터 마을, 쌍천 남쪽으로 바닷가 기차 철교 있는 데까지 이어져 무시무시하고 삼엄하게 쳐져 있었다.

이때 우리 동네 개울 말에 슬픈 일이 또 벌어졌다. 내친구 심동갑 심동각 육촌 형제가 살았는데 동갑이 아버지 성근 아저씨가 물치 장거리에 국군 환영 만세 부르러 갔다가 강선께로 올라오는데 하필이면 마침 국군장교들이 전투 작전을 짜느라 지도를 들여 다 보는 곳에 가서 기웃거리다가 반가운 마음에 같이 머리 디밀고 같이 들여다 본 일이 있었다. 성근 아저씨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순간적으로 “너 정탐군이지!” 하며 오해를 해 아저씨가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백주 대낮에 바로 앞에 흐르는 강 현천 강둑으로 끌고 가서 총으로 사살해 갑자기 비명으로 목숨을 잃었다.
 
울고 불고 하는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의 말로는 아저씨가 평소 남이 뭘 하면 꼭 참여하려는 성격이 있어서 그날도 반가운 마음에 기웃 거리며 비상시 군대 수칙도 모르고 장교들 틈에 고개를 들여 밀었다가 난데없이 변을 당한 것이라 했다. 그런 뒤에 군인들은 전투명령을 받고 삽시간에 모두 소금재 고개 너머로 진군했다. 그 이후 동각이 동갑이네 가족들은 맥이 빠져 기운을 잃고 살았다. 양쪽으로 대치한 군인들이 이리진격하고 저리 진격하는 바람에 가운데 백성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전쟁이란 이렇게 착한사람 나쁜 사람 구분도 없이 처신 잘못하면 이유도 모르고 모두 비명에 죽는 경우가 수두룩 했다.

이 무렵 국군들이 커다란 밥통에 밥을 담아 두 사람이 앞뒤로 하여 어깨에 메고 뒷산 참호로 나르던 모습을 많이 보았다. 어떤 때는 고지의 참호 진지로 밥을 나르던 군인 둘이서 무슨 의견 차이가 있었는지 싸움이 붙어서 앞뒤로 장대를 어께에 매고 맞들고 가던 커다란 밥통은 길옆에 내려놓고 피가 나도록 서로 주먹질을 하던 모습을 친구들과 같이 구경했던 때도 있었다. 서로 생명을 지켜주어 가며 전선에 같이 있는 전우들이 무슨 원수 졌다고 저렇게 아무도 없는 골짜기 안에서 단둘이 주먹질하며 코피 터지게 싸운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9월 고향 선산에 벌초하러 갈 때마다 다 성장하고 군 복무도 오래 전에 마친 내 자식들과 며느리들에게 그때의 사실들을 들려준다. 소금재 고개를 넘어 차를 몰고 달리다 멈춰 세우고 그리고 모두 내리게 한 뒤 당시 이 벌판 양쪽에서 치열하게 총을 쏘며 대치하던 때를 떠올리며, 옛날 할머니가 나에게 옛날얘기 들려준 것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때의 끔찍했던 전쟁이야기를 해 주곤 한다.(계속)

21. 1951년 최전방 국방군 주둔지 강현면

(1). 육박전 이야기

우리 동네에도 집집마다 군인들이 주둔하였다. 우리 집 아래윗집으로 일개 소대원이 같이 있었는데 젊은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은 모두 군인들을 피해 따로 모여 다른 집에 있게 했다. 동네 아저씨들은 누나들과 젊은 아주머니들이 다칠 새라 신경도 많이 썼고 주민 마을은 또 다른 의미의 비상이 걸리다시피 한 기억도 난다.

나는 개울 마을을 지나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많은 군인들이 집집마다 주둔하였는데 하루는 전쟁 통에 어디서 왔는지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 이상한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개울말 동네 마을 회당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군인 아저씨들이 그 회당집 앞에서 줄을 서 있었고 한 아저씨가 집안에서 나오면 또 다른 아저씨가 들어가는 걸 보았다.

이런 이상한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들도 보았는지 우리 집에 모여서 끼리끼리 쑥덕거리며, “뭐이 그렇너? 정낭간(양양 사투리로 변소)에 간다면서 조짱(종이)도 없이 들어가고, 대낮에 웃티(옷)도 입지 않고 방에서 나오쟎우!” 하면서 킥킥거렸다. 한 아주머니가 우습다는 듯이 입을 가리면서 말하였다. “어떤 군인이 고함치기를 어서 빨리 나와! 나도 소변이 마려워 못 견디겠다! 이러지 않우! 그래 가지구서야 핻아(갓 난 어린아이)가 생기겠너?” 하면서 손바닥을 치며 모든 아주머니들이 까르르 웃던 일이 생각난다.

나의 생각에도 통상적으로 우리 마을엔 정낭간이 집 앞 마당 건너편에 있는데 무슨 용변을 집 방안에서 본다는 말인지? 내일이면 소금재 고개 넘어 큰 전투가 벌어진다고 총기를 닦으면서 곧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인데 그 개울말에서의 이상한 장면은 도저히 우리 동네와 전쟁터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기억이었다.

동네 수염이 허연 어른들이 망조 들렸다고 야단들이 났었다. 특히 규율 부장격인 종렬 아저씨는 장비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혀를 끌끌 차면서 해괴한 일 났다며 노발대발했다. 이 때문에 인민군이 마구 들어왔다든지 국군이 엄청나게 몰려온다든지 하면 어른들이 젊은 아주머니들이나 누나들을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하였고 모두 골방에 숨게 하는 지경이었다. 나는 그 때는 잘 몰랐으나 커서야 그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할 듯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여름까지 강릉 쪽으로 모두 다 피난을 갔다 온 그 이후 우리 동네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방 신병 훈련소가 생겼는데 그 이후엔 그런 소문이 없었다. 분대장들은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분대장 중에는 일등중사도 있었고 이등중사도 있었다. 내가 군에 입대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병장 상병에 해당되는 사병 계급인데 그 분대장에게도 전시에는 총살권이 있다고 무시무시한 말을 하여 어린 우리들은 그 권총을 보고 겁이 나 은근히 두려워했다.

그때 어린 나이지만 군인들의 눈초리를 유심히 보았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군인들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빛나기가 샛별 같았다.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어른들이 말하기를 전투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이란다. 하기야 그 무서운 전투를 수도 없이 겪으며 무수히 총을 쏘며 밤낮 잠도 못자고 때로는 한밤중에 양쪽 군이 맞부딪쳐 총칼로 치고받는 육박전까지 겪었으며 뒷산 너머에서 계속해서 적군과 싸우려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그들이니 과연 그 눈빛이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가는 일이다.

낙동강 전투와 다부동 전투에서 이긴 기세로 영덕을 지나 삼척 강릉으로 진격해 치올라올 때 그때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심지어 한밤에 기습을 받아 육박전이 벌어질 땐 적군인지 아군인지가 분간을 할 수 없어 가까이서 상대의 머리를 더듬어 보고 머리카락이 길면 국군이고 짧으면 적군이다 라고 구분하여 싸울 때도 있었다고도 하였다.(계속)

(2). 전우애

매일 저녁 군인들의 암호가 바뀌고(나는 군인들의 암호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앞에 있는 상대에게 암호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면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시 발사하여 사살한다고 하였다. 너무나 무서운 공포 분위기였다.

옛날 시골 농촌은 끼니때가 되면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고 부엌 아궁이에서 나무를 태워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는데 동시에 약속한 것처럼 이 집 저 집에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모습은 요즈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다. 때마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어느 집은 비어 있고 어느 집은 손님들이 많이 왔다는 것을 가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주둔하고 나서는 산 너머 넘은들 벼락바위 쪽의 적군에게 노출된다고 연기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게 해서 한동안 집집마다 또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옆집과 우리 집에도 일개 분대가 숙식을 같이 했는데 고지 참호 속에서 지키다가 교대하러 내려온 아저씨들과 또 맞교대하며 분주히 올라가던 무장한 아저씨들 복장이 생각난다. 양쪽 앞가슴 위엔 수류탄이 각각 하나씩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허리엔 M1 누런 실탄이 번쩍번쩍하게 둘러져 있었다. 머리엔 화이버만 쓰는 것이 아니고 위장망까지 씌운 무거운 철모도 항상 같이 쓰고 다녔다.

산 고지에서 내려오는 아저씨들 철모엔 나뭇가지가 가득 꽂혀 있었다. 나는 아저씨들이 철모를 벗어 던지고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는 전투 무용담을 아주 재미있게 듣곤 하였다. 어떤 아저씨들은 내려오자마자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세상이 떠나가도 모르게 잠에 취하곤 하였다. 머리에 쓴 철모에 구멍이 뽕 하고 뚫어졌는데 앞서 전투에 총알이 정통으로 날아오지 않고 약간 빗나가 요행으로 살아났다고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랑하는 아저씨도 있었다. 철모에 실탄을 맞고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핑 돌다가 조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느 전투에서는 산 아래로부터 공격해 올라오는 적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는데 참호 속에서 아래쪽으로 사격을 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엎어졌다고 한다. 이것을 본 다른 분대장 아저씨가 보기에 총에 맞아 죽은 것 같아 순간 몸을 날려 바람같이 빠르게 넘어진 아저씨의 등위로 뛰어 내리니 엎드렸던 아저씨가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쳐다보니 멀쩡한 상태여서 씨익 한번 서로 웃고 다시 고지 아래로 사격을 하면서 그 전투를 이겼다고 했다.

그 때 엎드려서 비명을 지른 아저씨가 분대장 아저씨에게, “제가 총알을 재 장전하느라고 엎드린 사이에 분대장님이 제 등 뒤에 떨어지는 바람에 등 뒤에서 바위가 무너지는 줄 알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 분대장 아저씨가, “네가 죽은 줄 알고 네가 쏘는 자리가 비면 큰일이기에 그 자리를 지키려고 몸을 날려 급히 뛰어 총을 쏘려 했지. 그런데 아! 이 새끼가 살아 있잖아!” 하며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분대원들 앞에서 껄껄거리며 손뼉을 치는데 철없는 나는 그 무용담이 그저 재미있게만 들렸었다.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싸움터에서 여기저기 옆의 전우들이 쓰러지는 가운데에서 이런 한가한 농담이 나오다니……. 그 전투에서 이겼으니 지금 그런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된다.

전투가 벌어진다든지 적의 기습을 받는다든지 할 때면 전광석화같이 동작을 취하게 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그러한 상태가 계속 이어지면 제일 무서운 적이 잠이라 했다. 포탄이 옆에 떨어지고 굉음이 고막을 울리면 그 순간 엎드려 있지만 그 상태에서 바로 잠이 온다는 것이다. 행진이 계속될 때도 고지를 치달으면서 고함을 지를 때에도 조금만 멈추어 서면 잠이 쏟아지는데 정말 못 견디겠다고 하였다. 심지어 포탄이 옆에 떨어지는데도 지금 죽어도 좋으니 잠 좀 한번 실컷 자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라 했다.

내가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 이웃을 사랑하고, 친구 간에 의리를 지키고, 직장에서는 상하간의 예의를 지키고 하는 것이 아주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며 생활했다. 의리를 지킨다는 점에서, 또 이웃간에 서로를 위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나의 성격을 다잡아 주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어렸을 때 전쟁 통에서, 촌각을 다투는 급박함 속에서 보고 느낀 국방군 아저씨들의 ‘전우애’ 바로 그것이었다. 나라를 사랑하며 의로운 일에 서슴없이 먼저 나서며, 옳지 않는 일에 단호히 떨쳐 버리려 했던 일들, 이런 사례 모두를 통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비 오듯 퍼붓는 포격 속에서 누가 다치면 서로 보듬어 주고 하는 당시의 일들이 나에게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를 위할 때라든지, 소대장 분대장이 부대원들을 호되게 질책을 한 뒤 곧이어 질책당한 부하를 격려해 주는 것이 바로 형제애요 부모 공경이요 나라사랑의 순수한 사나이들의 엉킴이었던 것이라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평소 미워했던 전우가 적군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생명을 잃을 지경이 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를 희생해 가며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우를 엄호하며 먼저 구하려 나선다는 사실들이었다. 생명을 내 놓고 내 조국을 같이 지키자고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것이다.

전투가 승리로 끝나면 살아 돌아온 아저씨들이 우리 집 좁은 방구석에 빼곡히 들어앉아 만면에 웃을 띠고 더러는 서로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면서 적군을 물리쳤을 때의 짜릿했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또 손뼉을 치면서 마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언제 싸웠드냐는 식으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순식간에 잠에 빠진다.

그때의 이런 모습들은 말하자면, 상관은 곧 자애로운 부모요, 선임병은 나를 엄호해 주는 믿음직한 형님이요, 전우들은 생사를 같이하는 서로 다정스런 친구들이었다. 생사를 같이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지켜주는 이런 형제애의 울타리가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1962년도 초가을, 내가 육군에 입대하여 중부전선 산악지대 최전방 양구에서 총을 들고 참호 속에 엎드려 11년 전 그 때의 생각을 해보니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끔찍하고 슬픈 때에도 짐작도 못하는 그런 웃음이 있었구나 하고 회상해 본 적이 있었다.(계속)

22. 양양군 남대천 하류

(1). 38선 넘나드는 고닲은 피난길.

인민군과의 대치상태는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 벌판에 설치한 철조망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설악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쌍천 물과 넓은 벌판이 전장이 되었다. 밤낮으로 군인들의 외치는 소리이고 주민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런 가운데 군인 아저씨들이 시간만 나면 조금 전에 겪었던 전투 무용담을 재미있다는 식으로 너털웃음 웃고 익살을 떨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다니…….

1951년 4월 하순 도문 쪽에 주둔한 인민군과 강현 우리 동네에 주둔한 국군과 대판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 자주 오갔다. 이번에 국군이 밀리면 우리가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는 인민군에게 다 죽는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 여기저기에서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국군이 오래 주둔한 가운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대들어 정성으로 국군에게 밥을 해먹이고 편의를 제공하면서 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란다. 또다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1ㆍ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한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인민위원장 사건 때문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마을마다 너무 참혹한 보복을 당했기에 다시 그들이 들어오면 이제는 모두 죽는다고 공산당들의 악질적인 모습을 피해 개미새끼 하나 없이 모두 모두 남쪽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이제 피난가면 영영 집에 돌아오지를 못할 것이라 하면서 장정들도 지고 가기 어려운 무거운 피난 짐 보따리를 쌌다. 동네 한 아저씨가 할머니더러, “아주머니!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지고 가려고 그러시우?” 하고 말하면서 짐을 줄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나도 조그마한 배낭에 보리쌀 몇 되 옷가지 몇 점 정도를 넣었다.

이때 남쪽으로 피난가지 않은 집들은 동네마다 두서너 집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젓번에 공산주의 이북 간부들과 이북으로 뒤따라간 친인척들이라 했다. 조상대대로 한 마을에서 평화스럽게 오손도손 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어느집은 남쪽으로 어느집은 북쪽으로 갈라지는 이 비운속에 마을 마을의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슬프게도 무참하게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다. 사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을 슬프게만 하고 무섭게 다가와야만 하는 것인가.

5월 초 강현 일대에는 모든 농촌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이 떠난 빈 집 고을엔 국군만 진지를 구축하고 쳐 내려오는 적군을 계속 막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싸움터에 남아 있고 우리들은 살기 위해 남쪽나라 강릉 쪽으로 보따리를 들고 이고 지고 떠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도 이별이라고 군인 아저씨들은 집을 떠나는 우리 마을 사람들 손을 붙잡고 엉엉 울면서 이별하는 모습도 보였다. 적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지키겠다고 의연히 집을 떠나올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 부모 가족들과의 이별 모습을 생각해서 그러하였으리라. 잠시 동안이지만 헤어진 그 이후 그 아저씨들은 며칠 뒤 벌어졌다는 무섭게 치열한 전투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우리는 모두 다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저씨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방을 적으로부터 처절하게 지키며 버텨 놓았기 때문에 나나 동네 사람들이 살아서 옛날이야기를 하고 이제껏 사는 것이다. 아저씨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또 한편으로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나라 구하겠다고 적군과 마주보면서 생명을 걸고 싸워 이긴 그 덕택에 우리 국민들과 국가는 무사했던 것이다. 참으로 국군들의 훌륭한 나라 위한 몸 바침에 감사와 송구한 마음 가득하다.

우리들은 군인 아저씨들과 이별하고 일제시대 1919년 3월 중순 어느 날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현 사람들과 같이 모여 일본 놈들에게 대들어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힘차게 불렀다던 물치에서 정암리 큰 길을 택하여 왼쪽으로는 무심한 동해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가 백사장에 밀려 오르며 부딪치는 모양을 낙산사 뒷산 쪽 후진(뒷나루, 지금의 설악 해수욕장)까지 길게 바라보면서 넓은 길 가득히 피난민 행렬은 끝이 없이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실은 집들은 빨리도 지나갔고 우리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머리 꼭대기에 이고 손에 들고 천천히 걸어서 내려갔다. 나 역시 조막만한 하얀 배낭 하나를 지고 일행을 부지런히 뒤따랐다. 동네 기율담당 격인 종렬 아저씨는 장티푸스에 걸려 늘어져 고생하는 막내아들 정수 형(나보다 네 살 위이고 우리 또래가 제일 좋아하여 따르던 동네 집안 형)을 지게에다 싣고 지고 내려갔다. 우리가 내려가면서 길 양쪽에 있는 집들을 들여다보니 이미 피난을 떠나서 모두 텅텅 빈 집들이었다.(계속)

(2). 남대천 하단 모래밭에 묻힌 시체

양양 읍내 쪽으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벌써 한계령 아래 오색 쪽으로부터는 인민군이 내려온 것 같아 언제 총질이 날지 몰라 위험하다고 했다. 바닷가 옆 낙산 해수욕장을 지나 남대천 하류 백사장에서 갈벌이라는 동네를 건너가기 위해 우리 피난민 행렬은 잠시 멈춰 쉬면서 점심을 해 먹기 시작하였다.

연어가 올라오는 남대천 하류의 물 깊이는 어른의 가슴 정도 되었고 물살은 그다지 세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주먹밥 보따리를 풀어 모두 빙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하필이면 나는 오줌이 마려워서 상류 쪽으로 한 2, 30m 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 떨어지는 곳을 내려다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 때 내 오줌이 곡선을 그리면서 모래에 떨어지니 오줌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모래가 떨어지는 오줌에 밀려 나면서 모래 밑으로 물체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흡사 도랑에 죽은 쥐가 껍데기가 벗겨져 허연 살이 보이면서 검은 털가죽이 벗겨진 형태의 물체가 나타나 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내려다보니 사람 뒤통수였다.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는데 나는 너무 놀라 오줌도 누는 둥 마는 둥 긴장한 정신으로 발을 뒤로 하려는데 내 신발 밑창으로 갑자기 꿀렁거리고 물커덩거리지 않는가? 나는 사람이 죽어 엎어져 모래에 덮인 시체 등 위에 올라서서 오줌을 눈 것이다. 옆으로 비켜서니 그곳도 죽은 사람이 묻혀서 모래가 약간 덮여 있었고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그 모래벌판 전체가 사람 죽은 시체가 묻힌 곳이었다.

그때의 짐작으로 그 넓은 남대천 하류 백사장 일대(지금 연어가 회귀해 올라오는 곳)는 전부가 죽은 지가 얼마 되지 않는 청년들의 시체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나중 이야기지만 남대천 하류는 우리 국군이 강을 등지고 남대천 둑에서 낙산사 쪽으로 공격해 남하하는 인민군들을 결사적으로 막으려고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희생된 그런 곳이라 했다.

피난민 일행이 자리하고 있는 곳부터 상류 쪽으로 어마어마하게 널려져 모래로 살짝 묻혀져 있는 시체, 시체들! 나는 갈 때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밟을 데가 없을 정도로 널려진 시체들을 피해 간신히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장소로 돌아와 할머니 옆에 앉았다.

사색이 다 된 상태로 얼이 다 빠졌었다. 할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하는데 밥이 넘어갈 리 없다. 어렸을 때지만 그렇다고 다들 밥을 먹고 있는데 저기 사람 죽은 게 있다고 할 수도 없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또 어린 마음에 너무도 놀라서 고개만 숙이고 죽은 듯이 있는데 할머니가 또 말하기를, 앞으로 많이 걸을 터인데 지금 먹어두어야 된다고 하였으나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보다 못한 머일 이모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호통을 쳤다.

“저눔의 자식은 아무델 가던지 밥을 먹지 않아 제 할미만 맨날 굶게 만든단 말이야! 저 버릇 언제나 고칠 텐가! 아이 놈이 저렇게 고집이 세서야, 원 내 참!” 하면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할머니 치맛자락만 붙잡고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엔 무서운 아까의 장면만 생각하면서……. ‘할아버지는 남의 속도 모르면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 강릉까지 내려가서야 나는 남대천 건너기전 그 시체 널린 사실을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할머니도 그때서야 크게 놀랬다.

사실 나는 머일 이모할아버지가 지적한 대로 아주 고집스런 버릇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여섯 살이 넘어서인가 우리 집 식구가 밥을 먹을 때마다 이웃집 어린애가 우리 집 밥 먹는 것을 늘상 문지방 앞에서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찬수야! 저렇게 남의 집 밥 먹는 데 가서 거지처럼 밥을 얻어먹으려는 모양은 나쁜 것이란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의 이 한 번의 가르침을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주 잘하는 것인 줄 알고 그 이후부터 고집스럽게 받들면서 반드시 명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별력 없이 꼭 지켰던 것이다.

어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보고 싶은 아버지에 대한 약속 이행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다른 집에 가서는 절대로 밥을 먹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다른 집에 갔다가 끼니때가 되어도 내가 먹지 않으면 할머니도 따라서 식사를 하지 않고 손자 따라 굶는 것이 태반이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내가 야단을 맞은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대단히 병약했었는데 어디를 가면 하도 먹질 않아 할머니도 그것이 안타까워서 같이 울며 당신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웬만큼 커서도 그러했으니 나도 할머니 속을 어지간히 썩여 드렸다. 훗날 거제도 피난생활 이후는 그러하지 않았고 남대천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시 짐을 지고 남대천 하류로 도강하기 시작했다. 모두 건너 갈벌까지 갔는데 그곳에도 우리 집안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예전에 할머니와 한번 왔을 때는 머리를 길게 치렁치렁 땋은 총각들이 아주 많았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긴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어른들이 많은 동네여서 아주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보지를 못하였다. 이미 모두 피난을 가서 우리 일행은 빈 집에 들어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쉬어 갔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피난 짐이 너무 무거워서 절반 이상을 빈집에 덜어놓고 이튿날 출발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도 나는 그 시체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계속)

23. 비목(碑木)

내가 성장하면서 그 장면은 항상 내 마음 안에 있었는데 점차로 전쟁의 참혹함과 그때의 사실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교직 생활 30여 년간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끔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아까운 젊음의 원통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울먹거렸다. 이들을 죽게 한 그 무모한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분노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소중한 남의 집 귀한 자녀들을 외부로부터 소중하게 보호하고 때가 묻지 않게 아름답게 키우고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이 나의 교단에서의 교육 목표, 즉 신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현충일 10시에 경적이 길게 울리면 묵념을 한다든지,「비목」이라는 가곡을 부를 땐 그 애잔한 가사 내용과 그 때의 모래사장에 묻힌 꽃피우지 못한 청춘과 반드시 연결되어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눈물을 마구 흘리는 버릇이 지금도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아내와 등산 도중 가끔 지나치는 산비탈의 외로운 묘소를 보면 반드시「비목」을 부른다. 그러다가 그만 울컥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노래를 마저 부르니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웬일이냐고 하여 나는 내 심회의 자초지종을 다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의 장인도 6ㆍ25 난 해 8월에 당시 대한민국 강원도 농산물 원종장의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인민군에 끌려가서 어느 골짜기에선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풍문에 들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도 나의 눈물 흘리는 연유를 알고부턴 같이 손을 붙들고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다. 그 이후「비목」을 부를 때 내 아내는 으레 내가 눈물을 흘리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기다려 주었다.

내가 차차 세상의 이치를 의식할 나이가 되니 지나간 일 중 그 주검 등 위에 올라서서 오줌을 누웠다는 사실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숭고한 젊음의 정신! 그 애절함, 아름다움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두고 온 고향 부모 가족을 그리다가 장렬히 전사한 사실과 그 초연이 쓸고 지나간 전쟁터! 목숨이 달아날 경각에서도 펼쳐지는 젊음의 우정들, 애국의 몸부림! 처절히 모래에 묻혀 있으나 묻혀 있는 임들의 엄숙함 앞에 나는 54년이 지나도록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에 국립 현충원에 가면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눈물이 흐른다.

재직시에 6월 6일이 가까이 오면 학생들을 인솔하고 영령들 앞에 흰 국화꽃을 놓으러 여러 차례 간 적이 있다. 주변을 깨끗이 청소도 한다. 이것으로 살아남은 우리들이 이들의 숭고하며 애절하고 엄숙한 희생에 대한 감사의 도리를 다 하고 있었는가 하며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왔다. 이 땅의 젊은이! 남과 북의 이념을 떠나 생각해 보는 그 젊음과 안타까운 희생! 그 희생으로 이 땅에 살아남은 우리들은 과연 생명의 존엄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계속)

24. 동해안 삼팔교

갈벌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우리 일행은 하조대 쪽으로 내려갔다. 기사문리 가까운 곳에 도달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각각 바닷가 옆 빈집들을 하나씩 차지하고 쉬고 있는데 바닷가에 나갔던 한 아저씨가 뛰어 들어오면서 지금 해변 모래사장에 미역이 파도에 밀려 굴러 나오는데 굉장하다고 했다. 피난 도중 우리들은 해변에 나가 파도에 밀려오는 미역 두루마리를 보았다. 긴 백사장에 싱싱한 미역이 지천으로 굴러 나와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피난 간다는 생각도 잊고 미역을 한 아름씩 안아다 여러 차례나 빈집 마루에 쌓기 시작했다.

피난 짐 보따리 무겁다고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며 쉬던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이 미역을 한 아름씩 잘도 들어 옮겨 놓았다. 주워온 싱싱한 미역이 마당에 가득하고 집집마다 툇마루에 가득히 올려져 있는데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우리 일행은 짐들을 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금방 떠날 것이면 그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 뒹굴게 내버려두지 왜 저렇게 피난하느라 힘도 들 터인데 남의 빈집에 쌓아놓아 썩게 했던가를 나는 지금도 그때의 어른들과 우리들의 미역 욕심에 대한 추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 통 피난길 시절엔 웃어야 할지 어쩐지도 모를 일들이 많기도 하였다. 밤이 어두워서 길가 빈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런데 짐 보따리를 지고 먼저 내려간 피난길 사람들이 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해 먹고 떠나가고, 그 다음 사람들이 또 불을 지펴 밥을 해먹고 떠나간 다음 우리가 들이닥친 것이다. 우리가 들러 밥을 해 먹을 땐 빈 집 방구들이 사뭇 난로처럼 뜨끈하여 방안에서 자려다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 다 집 바깥마당에 나와서 하늘 쳐다보고 자는 형편이 생겼다.

할머니는 피난 떠날 때 짐 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였는지 다리가 퉁퉁 붓고 고통이 아주 심했다. 빈집 아궁이에서 밥 짓느라고 나무 태운 재를 가져다 오줌에 재워 양다리에 붙이고서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우리들은 인구의 삼팔교에 도달했다(지금의 38선 휴게소가 있는 앞길 오른쪽).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찬수야! 이 다리를 봐라!” 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 다리를 지나는데 할머니가 이 다리를 밟아 없애야 한다면서 할머니께서 무거운 피난 짐을 진 채로 발을 높이 쳐들더니, “에이! 이눔의 원쑤의 다리! 에이! 이눔의 다리!” 하면서 일본 스모 선수들이 다리를 번쩍 드는 동작처럼 삼팔교를 냅다 밟았다. 나 보고도 그렇게 하라고 하여서 나도 그렇게 했다.

“에이! 이놈의 원쑤의 다리! 에이! 이놈의 38선 원쑤의 다리!” 1951년 늦봄 11살짜리 까까머리 어린 내가 할머니를 따라 통일을 외치며 지나간 그 곳이다. 지금도 인구의 삼팔교를 지나칠 때면 피난 내려가면서 할머니와 밟았던 그 다리를 생각한다. 이제는 나무 난간의 옛날 다리는 흔적도 없고 새로 만든 커다랗게 새로 놓은 다리만 그 위치에서 옛날처럼 변함없는 동해의 거친 파도소리를 무심하게 듣기만 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25. 강릉의 피난민 생활

(1). 전시의 강릉

우리 일행은 지친 걸음으로 동산항을 거쳐 남애리를 지나 그날 오후 주문진 항에 다다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일행들은 커다란 방앗간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짐을 풀고 하룻밤을 자고 가려 하였다. 그런데 이 방앗간 주인은 피난을 가지 않고 방앗간을 지키고 있을 때라 한밤중에 방앗간에 와서 노발대발하면서 우리들을 집 밖으로 몰아내었다. 방앗간 물건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사정사정 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모두는 한밤중에 쫓겨나와 한참 이 집 저 집을 헤매다가 결국 주문진 항구 부둣가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노숙을 하였다.

그날 저녁 어찌나 춥던지 나는 그 방앗간에서 쫓겨났던 우리들의 거지같은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튿날 우리들은 강릉 시내까지 내려왔다. 뒤에 고향으로 올라오면서 들으니 그 방앗간 있는 곳도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리에 며칠 뒤 모두 남쪽으로 보따리 싸가지고 피난을 갔다고 하였다. 자기네도 똑같은 피난민 신세이면서도 먼저 온 피난민을 구박하며 내쫓고 큰소리나 치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들이라니…….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나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모두들 다리가 아파 쩔룩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발등이 부어 신발을 신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의 할머니가 다리가 몹시 아파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친척 일행과 떨어져 강릉에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남쪽 더 멀리 옥계 방향으로 내려가고 작은댁 할머니와 머일 이모할머님 댁 그리고 할머니와 나는 경포를 지나 초당(지금 초당 두부로 유명한 곳)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은 6ㆍ25 전쟁 중이지만 비교적 안정된 듯한 곳이었다.

할머니와 나 그리고 작은집 할머니는 규모가 아주 큰 기와집에 들어가 피난 사정을 이야기하고 머무르는 동안 집일을 거들어 드리겠다고 사정했다. 그 댁은 그 일대에서도 가세가 아주 넉넉한 집이었고 수염이 허옇고 위엄 있는 풍채인 집 주인이 아주 후덕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직도 하인들 몇이 집안일을 돌보는 집이었다.

이모할머니 댁은 일곱 식구나 되었는데 집 주인이 친척집인 옆집을 알선해 주어서 그 댁에 머물렀다. 우리는 초당마을에서 피난 짐 보따리를 풀었다. 2월 중순에 인민군이 강릉까지 내려와서 이곳 주민들도 한동안 피난을 갔다가 들어왔다고들 하는데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인 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강릉도 엄청나게 고통을 받은 곳 이었다.

6․25가 일어난 뒤 곧바로 인민군이 밀물 듯이 몰려들어 강릉 북쪽 주문진과 사천, 연곡에서 국군과 나흘 동안이나 무서운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인민군에 밀린 국군이 후퇴를 하자 즉시 공산주의자들이 설쳐대며 미처 피난 못 간 주민들을 괴롭혔다. 고통과 공포심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여기저기서 죽어 나자빠지는데, 그 광경이 처참하고 무섭기 한량이 없었다. 주인집 친척들이 밤중에 몰래 도망을 쳐 강릉 경포대 쪽으로 피신해서는 전해준 이야기라 했다.

연곡 사천 전투에서 전사한 시체더미가 산같이 쌓였다는 소리에 나는 또 양양 남대천 모래밭에서 본 우리 국군들의 끔찍한 시체들이 모래에 묻혀 여기저기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6․25가 나고 석 달 뒤 9월 하순 이후부터 늦가을 아주 추울 때쯤 해서 7월에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국군과의 싸움에서 된통 얻어맞아 패잔병이 된 인민군들이 모여 올라오다가 바람같이 북진한 국군들과 도처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 강릉에서의 주민들에 대한 인민군 패잔병의 행패가 너무 악랄해서 모두들 몸서리를 쳤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친척 누구 네가 죽고, 어떤 동네가 몰살을 당하고, 수많은 반공청년학생들이 총살을 당하는 둥 끔찍스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런 이후까지도 대관령 부근에는 미처 이북으로 따라 올라가지 못한 무장 인민군대들이 곳곳에 숨어서 아직도 주민들을 괴롭히고 또 국군과 맞닥뜨리면 무섭게 총질을 해대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진다고 그 쪽으로는 얼씬도 말아야 한다면서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다.(계속)

(2). 경포대에서의 한여름

할머니는 그 댁에서 작은댁 할머니와 주인집 삼베 일을 해 주었다. 밤낮으로 삼베를 삶아 껍질을 베끼고 베낀 껍질을 가느다랗게 찢어 무릎을 세우고 실과 실을 오른쪽 무릎을 세운 맨살 위에 대고 비벼 잇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이은 것을 실타래를 만들어 방안 구들에 쌓아 놓고 그 위에 두터운 덮개를 덮고 아궁이에 불을 떼어 뜨끈뜨끈하게 익히는 등 삼베가 나오기까지의 그 많은 과정을 할머니 혼자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삼베일 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는 둥 마는 둥 하였고 피난 온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경포호에 나가곤 했다. 호숫가 바닥에서 잡은 조개를 빈 깡통에 넣고 불을 지펴 끓인 다음 벌어진 조개 속에서 조갯살을 빼먹기도 하고 얕은 물가에서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며 평화롭게 놀았다. 그때 인상적인 것은 왕골 같은 자리를 만드는 줄기가 굵은 부드러운 풀이 있었다. 우리들의 키보다 두 길이나 길었는데 경포 호 주변을 돌아 가득히 자랐고 노 저어오는 작은 배가 그 왕골 숲에서 미끄러지듯 나왔다. 아주 평화로운 경포호수였다.

내가 내 또래의 아재, 형제들과 같이 초당에서 경포대 호수 가로 놀이 나갈 때에 기억되는 일 한 가지가 생각난다. 우리가 경포 호수에 가까워질 무렵 금강송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나무숲을 지나려면 웬 낡은 커다란 기와집이 오솔길 오른쪽에 보이는데 보기에도 으스스했다. 그곳에선 밤낮없이 귀신이 나오곤 해서 살금살금 걸어서 지나가야 된다고 했다.

우리는 낡은 기와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발뒤꿈치를 들고선 맨발로 소리 없이 지나가곤 했다. 요즈음 그곳을 지나다 보니 그 낡고 거미줄이 가득히 얽힌 흉흉한 옛날 기와집은 바로 조선조 중엽 이후의 여류 시조시인 허난설헌의 집이라 했다. 허난설헌은 소설《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다.

멀리 북서쪽으로 경포대가 그림같이 우뚝하게 건너다 보였다. 지금의 경포대 해수욕장 쪽은 물이 깊고 파도가 세차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신신당부를 했다. 아직 양양 일대에서는 우리 국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양양을 재탈환하고 5월 말엔 간성 쪽을 넘어 고성, 금강산 쪽으로 진군한다 했다.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 강릉시장 구경을 나갔다. 촌에서만 자란 나는 커다란 도시의 시장 구경을 처음 한 것이다. 넓은 길에 마차가 철거덕거리고 지나가는 것도 볼 만하였고 길 양옆에 오가는 시장 사람 행렬이 볼만 하였다. 할머니는 주인집에서 받은 돈으로 나에게 검정 고무신 한 켤레를 사주었다. 나는 그 고무신이 너무도 소중해 신지도 않고 한동안 맨발로 다니면서 새 고무신은 들고만 다녔다. 할머니가 저자거리 한구석으로 가더니 점을 보는 할아버지 앞에 앉아서 부모님 생년월일과 어린 두 여동생 생년월일을 대며 원산에서 난리를 겪는 가족의 생사를 잘 봐 달라고 하였다.

한참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던 점쟁이 영감이 가족들은 모두 살아있다고 하면서 원산 북쪽으로 피신해 갔다고 했다. 그리고 통일이 언제 되겠는가 하고 할머니가 물으니 “한 내후년엔 반드시 통일이 된다”라고 쉽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 말대로라면 지금부터 54년 전에 벌써 통일이 되었다는 얘기다. 허무맹랑한 일이다. 다른 한곳에 들렀는데 이번엔 여자 점쟁이가 점을 본다 하여 할머니가 또 복채를 내고 점을 부탁하니 그 무당 같은 여자가 손바닥과 손가락을 묘하게 비틀더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모님은 살아있는데 두 어린 여동생은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하도 답답하여 점을 본 것인데 안 본 것만 같지 못한 셈이 되었다. 나의 할머니는 평생 점이라는 것을 믿지도 점쟁이를 찾지도 않는 분인데 난리 통엔 그러하였다.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주인집 할아버지의 손자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전쟁 통이었는데도 내가 보기에도 얼굴이 뽀얗게 귀티 나는 아이였다. 양반집 몇 대 독자라 하였다. 그런데 그 댁 어른들이 너무 오냐 오냐 하고 키워서인지 집안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늘 있는 일이고 우리 피난민을 깔보기가 내 어린 눈에도 대단하였다.

우리 또래인데 밥투정을 하면 그 집 할머니가 밥그릇을 들고 쫓아다니면서 허연 이밥을 먹이는 걸 여러 번 보았다. 특히 그런 그가 나를 구박하면서 호령호령하는데 못 견딜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 하랴, 남의 집에 피신 와서 어른들도 일을 해 주면서 참고 견디는데 나라고 불편하다고 대들 수 있는 그런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저 그 애가 나를 구박을 주는 대로 참고 다 받았다. 무척 아니꼽고 분했다.

한 달을 훨씬 넘긴 어느 날, 할머니는 주인집에 감사를 드리고 고향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다. 주인집 어른과 아주머니는 우리를 가지 못하도록 극구 말리면서 지금 난리가 끝나지 않고 양양은 아직 불바다인데 어떻게 가려느냐고 펄쩍 뛰었다. 그 사이 주인집 식구들과 내 할머니, 이모할머니 댁, 그리고 작은집 할머니 등 피난 온 우리들과는 정이 들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할머니는 베틀에 올라 나머지 베를 마저 짜 주고 고향 쪽으로는 싸움이 멈췄다는 소식만 믿고 주인집과 작별했다. 7월 들어 한참 더울 때 큰 길을 따라 숨어 내려올 때와는 전혀 다르게 탄탄대로로 고향 길에 올랐다. 고향집엘 간다니까 어찌나 좋던지…(계속)

26. 전방 신병 전투훈련소가 된 복골

고향에 돌아온 우리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관덕정 넓은 곳, 나의 증조할아버지의 누이동생 되는 대왕고모 할머니의 아들 이왈수 할아버지의 집 과수원과 그 넓은 논밭이 모두 사단 사령부와 연병장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그 서쪽 정승골 쪽으로는 신병 훈련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밤낮으로 언덕 위로 치달으며 내리뛰면서 고함치는 소리와 사격하는 소리가 매일 이어졌고, 군가소리가 온 고을에 우렁차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새벽이 되면 불어대는 기상나팔도 인상적이었고 밤 10시에 울리는 취침나팔은 너무도 숙연하고 애잔하게 들렸다. 낮에는 신병훈련 중 박격포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 포탄이 터져 연기가 자욱한 쪽을 뚫고 고함을 지르면서 돌격하는 군인 아저씨들의 기백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군용자동차가 마을 여기저기에 왔다 갔다 하고 이쪽 길 저쪽 길 할 것 없이 훈련받는 군인들이 너무 많아 강릉시장에서 사람 많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매일 같이 보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간단히 마치고 이곳 최전방에 와서 실전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훈련 중 오발사고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는 얘기도 가끔 들려왔고, 박격 포탄이 사람이 지나가는 한가운데 잘못 떨어져 터지는 바람에 친구 몇 명과 지게 지고 밭에 갔다 오던 동네 아저씨 등 열세 명이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모두 목숨을 잃어 우리 아래 윗동네 할 것 없이 동네 전체가 깊은 슬픔에 젖은 사건도 있었다.

그때는 운 나쁘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족들에게 무슨 보상 그런 것이 없을 때이니까. 우리들은 매일같이 실제로 전쟁 훈련을 구경하는 셈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마을은 남쪽 멀리 포항 쪽으로 피난 내려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집들이 있었다.

여름 조금 지나 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나는 3학년을 다시 다녔다. 1년을 묵은 것이다. 학교 가는 길 왼쪽으로는 사령부 연병장이 있고 오른쪽 야산은 바로 송암산 중턱까지 이어지는 신병훈련장이었다. 우리학교에서 짐미(장산리) 쪽으로 가면 동해바다까지 이어지는 그 넓은 벌판이 모두 ‘쌕쌕이’ 등 여러 가지 비행기가 내렸다 떴다 하는 비행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속초비행장이다.

비행기가 한번 뜰 때면 그 요란하고 웅장한 소리가 강현 들판 온 마을을 울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다리같이 생긴 비행기가 멀리 장산리 비행장 위에서 떠 배회하면 비행기 옆에서 염소 똥 떨어지듯이 공수부대 아저씨들이 낙하산지고 아래 벌판으로 똑똑 떨어졌다. 그 훈련과정이 아슬아슬하지만 구경스러웠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훈련을 받다가 낙하산 줄에 휘감겨 죽는 일까지 있다 하여 쳐다보던 우리는 몹시 조마조마했다.

어떤 때는 사다리 비행기가 한꺼번에 세 대씩이나 떠서 훈련을 할 때도 있었는데 장산리 일대 비행장 꼭대기 하늘이 온통 동글동글한 낙하산으로 덮여 있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이렇게 환경이 갑자기 변한 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넘은들 벌판을 넘어 속초는 이미 국군이 다시 수복하였고 간성 건봉 쪽에서 진부령으로 이어 이어지는 북쪽에서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여름 지나서는 거진, 대진까지 밀고 올라가서 김일성 별장이 있는 화진포까지 진격하였다고 전방에서 우리 동네로 내려온 국군 아저씨들이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원산엔 언제 쳐들어가 올려 미느냐고 지나가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묻곤 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에 임시 교장으로 친척 집안의 나에게 형뻘 되는 사람이 추대되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그 형은 깊은 학식이 없는 분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어린 우리가 보기에도 어색하기가 짝이 없었다. 농사만 짓다가 갑자기 학교 교장이라니…… 매일 아침 조회 시간이 되어 우리가 운동장에 모이면 운동장 구령대 위에 그 교장 형이 올라서서 학생들에게 훈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구령만 붙이고 군인들처럼 호령만 하였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목에 힘을 주어 뻐겨가면서 “차렷―! 열쭈웅 쉬어―!” 그러고는 다시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차렷! 열중 쉬어!” 이렇게 여러 번 구령을 붙이다가 한 마디의 말도 않고 훈화도 없이 멀쑥하게 천천히 구령대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들은 하도 우스워서 복도나 길거리에서 교장 형만 지나치면 속으로 “차렷! 열중 쉬어! 차렷!” 하면서 그 형이 멀리가면 키득거리고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조금 지나 그분은 교장자리를 그만두었다. 전쟁 통에만 있음직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장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남이 추대하니 남의 위에 올라서 보고 싶어 분별없이 잠깐 동안 교장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고 평생 이야깃거리 남기며 두고두고 무안당하는 지울 수 없는 처신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책임질 자리는 함부로 명예만 혹해 탐낼 일이 전혀 아니다.

가을에 우리 학교에서는 운동회가 있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백군과 홍군으로 갈라져 달리기 등 여러 가지 순서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은 당연히 운동회 때마다 있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마지막에 전교생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져 전쟁놀이를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동네 형들을 따라 총알을 가지고 장난감 만지듯이 하면서 놀았다. 나무로 총의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들어 그 나무총 위에 탄피 길이만큼 홈을 약간 파서 빠져나가지 않을 만큼 한 뒤에 철사로 동그스름하게 탄피 양끝을 감싸게 하고 나무총신 옆으로 꼭 채운다. 그렇게 탄피 껍데기가 앞뒤로, 또는 위로 튀어나가지 않게 한 뒤(탄알을 장전하는 곳을 만든 뒤) 총신 옆에 고무줄을 양 옆으로 걸고. 커다란 못을 구부려 뾰족한 곳은 뇌관 있는 곳으로 향하게 하고 ‘ㄴ’ 자로 구부린 못의 머리 부분은 고무줄에 걸어 옆으로 제쳐 못에 걸면 바로 안전장치가 겸해지도록 되었다.

오른쪽에 건 구부러진 못(방아쇠 역할)이 잘 나가도록 장치를 하고 오른쪽 엄지를 왼쪽으로 튕기며 바로 세우면 쇠못은 고무줄 탄력에 의해 앞으로 나가면서 날카로운 끝이 장전된 총알 껍데기 뒤쪽 뇌관을 치게 만든 우스운 총이었다. 반드시 총알 끝을 돌에 두드리거나 나무 사이에 끼워 흔들어 총알을 빼고 그 속에 있는 화약을 모두 제거하고 뇌관만 살아있는 빈껍데기 탄피로 그 나무총에 장전하게 한 것이다.

한번 쏘면 딱하고 단발 음이 나지만 여럿이 모여서 일시에 쏘면 제법 전쟁하는 것과 같은 흡사한 총소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중부전선 양군이 대치한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 들어 총싸움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에 운동회 때 이런 희귀한 백군 홍군의 어린이 전쟁놀이가 있었던 것이다.

전교 남자 어린이들이 백군 홍군으로 갈라서서 “와!” 하고 소리 지르면서 운동장 한복판으로 나가 총을 쏘면 흡사 처절한 전쟁을 보는 것 같았다. 화약 연기가 교정에 자욱하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결과는 백군이 이기도록 결말이 나 있었다. 그 지긋 지긋한 전쟁 통에 온갖 아픔과 슬픔을 다 경험한 우리들인데 학교가 문을 열자마자 운동회에서 전쟁놀이를 먼저 하다니…….

실전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투입되어 죽어라고 버티는 인민군을 물리치려고 고성 금강산께로 계속 올라갔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국방군이 어서 빨리 북으로 쳐 올라가 원산과 함경북도 청진을 해방시키고 우리 가족과 청진에 있는 나의 외갓집 식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계속) [화곡 김찬수 선생님: http://allinkorea.net/]
기사입력: 2011/06/12 [10:17]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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