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선생 전쟁회고: 내가 겪은 6.25(5)
공산세력의 잔혹성이 빚은 6.25남침
 
화곡 김찬수 선생
[편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 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27. 전선야곡(戰線夜曲)

1951년 가을이 되면서부터 할머니는 되찾은 우리 집의 텃밭을 정리하고 농사지을 준비를 하였다. 할머니는 손바닥만 하다지만 “빼앗겼던 텃밭을 되찾으니 일하는 데 힘이 드는 줄도 모르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작은 키였는데 우리 집 지게는 아주 커다랬었다. 할머니는 그 지게에 거름 짐을 지고 밭에 날랐다.

그 해부터 나도 거의 땅에 끌릴 듯한 할머니가 쓰는 지게를 난생 처음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나무를 하러 가서 지게에 너무 많이 싣고 내려오다가 지게 뿌다구리(지게 다리)가 땅에 닿는 바람에 기우뚱하며 옆으로 쓰러져 언덕 아래로 내리 굴러 하마터면 목이 부러져 크게 다치거나 죽을 뻔도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키에 알맞은 지게를 지고 다녀 좋았는데 나는 어른 지게를 지고 다녀서 아주 불편하고 위험하였다.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가을이면 송이가 많이 나는 곳이다. 한번은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오다 지게를 벗어놓고 쉬고 있는데 앉은자리 옆 손이 닿는 곳에 무엇이 잡혀 집어 냄새를 맡아보니 송이였다. 커다란 송이를 몇 개 따 온 경험도 있다. 밤이 되면 할머니는 어유 등잔불을 켜 놓고 구해온 삼을 삼았다. 많은 분량의 삼이었다. 난리가 끝나면 우리 집 온 가족이 만나서 입을 옷감으로 삼베옷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텃밭과 자그마한 뒷산을 넘으면 집 넘어 밭이 두 자리 있었는데 그곳에도 거름을 만들어 날랐다. 할머니는 그 해 회갑의 나이인데도 그렇게 엄청나게 농사일을 하였다.

1ㆍ4 후퇴 직후 윗마을 고모할머님 댁에 다녀오다가 갑자기 비행기가 낙산사를 폭격하는 바람에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윗 개울에 있는 우리 집 밭 돌담 쪽으로 급히 피신했었던 그 먼 곳 밭까지도 거름을 지게에 져 날랐다. 내년을 위한 농사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로는 베틀에 올라앉아 밤늦도록 북을 좌우 손으로 받으면서 바디집을 잡아내려 베를 짜시는데 삐이꺽 철거덕, 삐이꺽 철거덕 소리를 내었다. 내가 지금도 생각하지만 나의 할머니는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노력으로 공을 들여 그 노력의 결과로 우리 집을 지켜 나갔으니…….

나도 저녁이 되면 낫과 부엌칼을 숫돌에다 갈아 날을 세워 내일 학교 다녀온 뒤에 일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때 훈련한 때문인지 그 이후 도시에 사는 지금도 우리 집 식칼 등 아무 칼이나 칼을 가는 것은 나의 몫이고 지금도 낫이나 칼날 세우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쟁은 간성을 지나 해금강 남쪽에서 양군이 대치하고 서로 겨누고 있으면서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군사령부가 주둔하는 곳이고 전방의 신병훈련소였기에 어떨 때는 야간훈련까지 하였는데 신기한 것은 조명탄이란 것을 공중에 발사하면 온 천지가 대낮처럼 밝아 땅에 기어가는 개미새끼들까지도 다 보일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군인들은 밤에도 훈련을 하였다. 관덕정과 정승골 간곡리, 회룡리, 둔전골에는 군인들의 잠자리인 벙커가 만들어져 순식간에 그 속으로 피하면 겉으로는 그 많은 군인들이 주둔한 것 같지를 않고 그저 산과 벌판만 보이는 그런 모양이었다.

무슨 신호만 있으면 갑자기 그 참호나 벙커에서 뛰쳐나오는 군인들을 볼 때엔 참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관덕정 우리 5대조 할아버지 산소와 정승골의 4대조 3대조 할아버지 산소에는 벌초고 뭐고 마을사람들까지 모두 그 근처엔 얼씬도 못하였다. 우리 동네는 매일같이 총성과 포화 속에 군인들이 “돌격 앞으로! 와―!” 하는 함성이 밤낮으로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생활하는 처지였다.

송암산 밑에는 지금도 사격장이 있는데 그 사격장 지나 산 중턱까지 개울말로 나가는 좀 넓은 달구지 몰고 가는 길에서 박격포를 쏠 땐 우리도 지나가면서 군인들의 박격포 훈련을 직접 구경도 하였다. 처음 쏠 땐 군인들이 박격포탄을 짧은 포신에 집어넣고는 서너 명의 군인들이 포신 옆에 납죽 엎드리면 ‘탱!’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나고 하늘을 보면 박격 포탄이 날아간 얼마 뒤에 포탄의 꼭뒤를 볼 수가 있었다.

높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하늘에 올랐다가 멀리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는 그 포탄이 보이지를 않다가 갑자기 먼지가 풀썩 일고는 조금 있다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꾸왕!” 하고 온 송암산 아래 동네를 울렸다. 쏠 때의 “탱” 하는 그 소리도 너무 커서 발사하는 순간은 발사대를 등지고 돌아서서 양쪽 귀를 다 막아야만 고막에 충격이 가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런 훈련 장소 옆을 지나다니면서도 호기심만 가득하였지 훈련 상황에 만성이 되어 점점 무서운 것도 모르고 지나치면서 놀았다. 박격 포탄이 날아가서 떨어지는 송암산 밑엔 우리 동네 먼 친척 된다는 범수 형네 등 몇 집이 살았다. 1ㆍ4 후퇴 이후엔 신병훈련장 맨 꼭대기 대포알 떨어지는 곳에 동네가 있어서 아주 위험해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송암(우리 동네에서 수암이라고 한다) 마을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1951년 겨울과 이듬해 3월 초까지 그 해 겨울에도 눈이 아주 많이 왔다. 설날인데도 이웃에 세배 갈 길이 나지 않아 동네에서 눈 가래로 눈을 치우느라고 법석이었다. 나의 키보다 훨씬 많이 왔었다. 모처럼 지나는 설 명절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틈만 나면 들판에 나가 농사를 짓고 총소리나 포탄 소리만 나면 벌판에 엎드려 숨죽이고 때로는 쟁기까지 내던지고 산 속으로 들고 뛰어 도망가고, 심지어 온 동네가 피난 보따리 들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객지까지 나가서 천대받고 다니면서 피난하던 우리 동네는 잠시나마 평화롭게 설을 쇠는 마을이 된 것이다. .

우리 친구들은 몰려다니면서 이웃 친척집에 모처럼 세배 드리러 다녔다. 부대 안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도 조용하고 나팔소리도 조용하였다. 모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방에 전쟁 중에 평화가 온 것이다. 밤 10시가 되면 취침나팔 트럼펫 소리가 한밤중을 고요히 그리고 애잔하게 울리는데 군인아저씨들이 잠들기 전에 고향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까도 생각해 보았다. 집에 각자의 할머니도 계실 텐데.(계속)

28. 내 고향 진달래 피는 마을

나의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젊을 적에 많은 자식들을 홍역 등으로 잃고 속을 달래느라고 담배를 입에 대었다고 한다. 긴 대나무 대롱으로 만든 담뱃대의 끝에는 놋쇠로 된 담배 꼭지가 있어서 거기에 담배 잎을 꼭꼭 담아 피웠다. 1950년 6ㆍ25 전 한번은 나의 바로 아래인 해방둥이 어린 여동생을 안고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꼭지가 여동생 목덜미 조금 아래 한가운데에 닿아서 데인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 흉터가 5백 원짜리 백동전만큼 크게 나 있었다.

담배 이야기가 나오니 또 빼 놓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있다. 내가 장티푸스로 숨어 있던 큰 쉴집 아저씨가 큰아들 민태형 내외와 같이 빨갱이 물이 심하게 들어 이북으로 모두 다 도망을 갔는데 그때 그 집은 동네에서 비교적 큰 기와집이었다. 그 댁 아저씨가 6ㆍ25 나고도 1ㆍ4 후퇴 시 온 가족이 이북으로 없어질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한 차례 우리 집에 들러 담배 말아 피우는 손바닥보다 작은 빈 종이를 들고 문간 앞에서 창호지를 흔들면서 할머니를 멀거니 들여다보곤 했다.

나는 처음엔 매우 의아해하였는데 할머니 말이 밭에서 기른 담배를 말려 엽초를 썰어 만든 담배를 좀 얻어가 피우기 위해서 저러고 처량하게 서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저씨가 6․25 나기 전 우리 집에 담배를 얻어 피우러 오는 또 하나의 목적은 행방이 묘연한 나의 아버지가 혹시나 우리 집에 왔는지 어떤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고들 하였다. 지금도 90이 가까운 어머니가 당시를 회상 할 때 그 집 새로 장가간 민태도 그 아버지처럼 얄미울 정도로 우리 집을 감시하였다고 하며 마음속으로 미워서 죽을 뻔했다고 하였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군인들이 훈련받으면서 행군 시 잠시 휴식하던 곳이나 지나다닌 길에서 피우다 버린 무수히 많은 화랑담배 꽁초를 주우러 다녔다. 나도 자주 주우러 다녔는데 할머니는 그 주워온 꽁초를 전부 까서 펴 말린 다음 두고두고 담뱃대에 담아서 맛있게도 피웠다.

어느덧 우리 동네 형들과 우리들은 모여서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어 뻐끔 담배를 몰래 피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연기만 풀썩 내며 “캑캑.” 거리며 피웠으나 나중에는 목구멍 숨통으로 한참 들이마신 뒤에 두 콧구멍으로 재주를 피우면서 자랑삼아 허연 연기를 능숙하게 내뿜어 댔는데 어떤 아이들은 아예 인이 박혀 주머니에 담배꽁초들을 넣고 다니면서 피워댔다.

인지와 중지 사이에 종이로 만 담배를 어른처럼 흉내 내며 멋을 부리며 담배를 피워 양손가락에 담배 연기가 노랗게 쐬어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7~8세부터 16세 정도의 사내아이와 청소년들의 담배질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관인 것이다. 훈련장이나 부대 앞길에만 가면 화랑담배 꽁초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도 아이들의 흡연에 한 가지 원인이었다. 나도 두어 번 호기심으로 피워 보았는데 콧구멍이 맵고 목이 콱 막히고 기침이 터지는 바람에 피우지를 못하였고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하여서 친구들과 어울려도 피우지를 않았다.

봄이 되기 전이다. 할머니가 짠 삼베가 아주 큰 두루마리가 되었다. 할머니 말씀이 이만하면 앞으로 우리 식구의 옷은 문제없이 해결된다 하며 아주 좋아하였다.

어느 날 사단 사령부 소속의 군인 한 사람이 우리 집에 하룻밤을 묵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는 후방으로 출장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밤늦도록 할머니와 내가 있는 데서 전쟁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정스럽게 하였다. 그리고는 신세 한탄도 하면서 가지고 온 철모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빨리 전쟁이 끝나야 된다고 얘기하다가 나와 같이 윗방 베틀 있는 데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이 되었을까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급하게 부르면서 윗방으로 건너왔다. 예감이 이상하고 갑자기 섬뜩하여 윗방 고리를 열고 올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등잔불을 켰는데 내 옆에 자던 그 군인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베틀을 보고 크게 놀라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랠 일은 베틀에 초가을부터 겨우 내내 할머니가 짜 놓은 삼베가 장도칼로 날카롭게 끊듯이 흉측스럽게 몽땅 끊어져 텅 빈 모습으로 있었다. 바디집 위의 실만 너덜거렸다. 베틀 밑이 아주 흉하게 보였다.

군인은 할머니가 작년 피난 갔다 온 뒤에 겨우 내내 짜놓은 삼베를 우리가 잠들기를 기다려 무참하게도 몽땅 도둑질해 간 것이다. 할머니는 힘없이 나를 끌어안으면서 “그 망할 놈의 군인이 날카로운 칼로 삼베를 끊을 때 네가 일어났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났을 터인데 하늘이 도왔다.”하면서 “나는 네가 다친 줄 알고 놀랬는데 삼베만 없어져 다행이다.”하고 맥없이 말했다. 그 전쟁 통에도 도둑놈이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할머니는 허탈해 하였고 나도 분하기가 짝이 없었다.

1950년 6ㆍ25가 나던 그해 봄, 야산마다 큰 산까지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볼 만하였었는데 1952년 봄에도 진달래꽃이 온 산비탈에 붉게 물들었다. 6ㆍ25가 나던 해는 김일성 간부 앞잡이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진달래가 저렇게 많이 핀 것을 보니 통일이 될 징조라고 하였다.

그렇게들 떠들면서 6월 25일에 남쪽에 쳐내려갔다가 여름이 지나 반격하는 국군에게 혼쭐이 빠져 통일은커녕 큰코다친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보았다. 볼 때마다 당시의 이북의 나라꽃이라고 내세우던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면 필수록 이북은 빨리 망한다는 말이 마을 여기저기서 퍼졌었다.

1952년, 국군의 최전방 신병 훈련장인 우리 마을 앞산에는 진달래꽃이 참으로 아름답게 피었다. 산야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 우리가 나무하러 갔던 마을 뒷산에도 진달래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었다. 깨끗한 진분홍빛 진달래꽃을 한 움큼씩 따서 수시로 먹기도 하였고 많이 먹으면 얼굴색이 빨갛게 된다고들 하였는데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새큼한 맛에 많이도 따 먹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우리들은, 진달래꽃이 저렇게 아름답게 피었으니 김일성의 인민군대는 모두 다 국방군에게 패해서 도망가고 김일성도 곧 죽을 것이다, 라고 모두들 한 마디씩 하였다. 그때부터 진달래꽃은 이북 김일성 신봉자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꽃으로 여겨졌다는 국방군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면 필수록 흥망이 뒤바뀌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동네는 기쁜 이야기보다 매일 슬픈 이야기만 돌아다녔다. 군인 아저씨들에게서 들었다면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슬픈 말을 하였다. 관덕정에서 훈련을 받던 신병 두 사람이 훈련 중 약속을 하고 어느 으슥한 골짜기에 숨어서 서로 상대방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총으로 쏘아 자르는 사고를 내었다 한다. 그 손가락이 잘리면 총을 쏘지 못해 후방 병원으로 이송된다 하여 그렇게 사고를 당한 것처럼 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이 되어 그 신병 두 사람은 모두 군법에 의하여 즉시 총살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적군과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었다. 불명예스럽지만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난겨울 전투에서 동상이 심하게 걸린 다리 때문에 썩어가는 다리걱정보다 전쟁을 않고 후방으로 이송된다는 바람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군인들도 있었다 하였다. 모두 다 마음 아픈 전쟁 안에서의 애처로운 이야기였다.(계속)

29. 총기사고

4월이 지나서이다. 학교가 개학을 하였을 때인데 어느 날 오후 나는 동네 형 두 명을 따라 내 친구 셋 이렇게 다섯이서 정승골로 놀러갔다. 그곳은 군인들이 신병훈련을 받느라고 총을 쏘며 오르는 훈련장 옆인데 길바닥이나 숲 속을 들여다보면 녹이 슬지 않은 새 실탄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말인즉 군인들이 훈련 받느라 힘이 들어 오르막으로 오를 땐 무거운 실탄 꾸러미를 버리면서 언덕을 뛰어오른다 하였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국방군들의 M1, 칼빈 총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텃밭 대나무밭 비탈 쫑 감나무 아래엔 인민군 장총인 소위 ‘딱쿵총’ 탄알과 ‘따발총’ 탄알도 한 가마니씩 묻혀 있어서 우리들이 국군에게 알려 국방군들이 수거해 간 적도 있었다. 우리들은 여기저기 지천으로 널려있는 실탄을 많이도 주워다가 돌에다 총알 끝을 두드려 탄알과 탄피 사이가 느슨해지면 총알과 탄피 속 화약을 모두 다 빼버리고 운동회 때 쓰던 나무로 만든 모의총에 탄피를 걸고 사격놀이를 하곤 했다.

그런데 같이 놀러갔던 친척 기명이 형이 탄피에서 총알만 빼고 화약을 넣은 채로 쏘면 소리가 아주커서 더 멋있다고 하면서 화약이 들어 있는 탄피를 장전하였다. 일이 잘못 되느라고 장전된 탄피 방향을 내 얼굴 앞에다 대고 고무줄에 걸린 방아쇠 격인 못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나는 그 총구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 형이 방아쇠를 안전장치에 잘못 걸어 고무줄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뇌관이 “탕!” 하고 터지면서 정통으로 내 얼굴에다 대고 불붙은 화약이 발사되었다.

피하라는 예고를 반드시 하게 되어 있었는데 예고 소리가 없어 무심코 들여다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쨍!” 하는 얼음 깨지는 소리와 “탕!” 하는 소리가 겸하여 나는 것만 기억하고 그 화약불이 터져 나가는 위력에 그만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만 것이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얘긴데 축 늘어져 죽은 것 같았다고 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참 지나 정신이 어슴푸레 드는 것 같았다. 총을 쏜 형과 다른 친구들이 늘어진 나의 네 팔다리를 들고 언덕 아래 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데리고 가서 피범벅이 된 얼굴과 한도 없이 콧구멍으로 쏟아지는 피를 닦아주는 과정에서 나는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보이지를 않았고 소리만 들렸다. 총을 쏜 형은 그날 새로 입고 와 우리들에게 자랑하던 셔츠를 훌떡 벗어 나의 얼굴을 씻기고 닦았다고 하는데 나는 몰랐다. 언덕 위에 다시 올라온 그 친척 형이 나에게 말하였다. “찬수야! 오늘 저녁 날이 다 어두워진 다음 집에 데려다 줄 터이니 그리 알고 집에 가면 할머니에게 네가 혼자 밤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고 해라. 내가 그랬다고 하지 마, 알겠니?”하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 경황에도 나는 그 형에게 또래들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날이 어두워진 뒤 내 집까지 데려다 준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갔다. 밥도 먹지를 못하고 베틀 있는 방으로 올라가 할머니를 등 뒤로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았다. 기미가 이상해 할머니는 자꾸 고개를 돌리는 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새빨갛게 된 것을 본 것이다. 뒷날 할머님 말씀이 눈알은 양쪽 다 새빨갛고 온 얼굴도 새빨간 것이 사람 같지가 않았고 무슨 빨간 저승아귀 같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다그쳐 물었다. “찬수야! 어떻게 된 일이냐?”

나는 그 형이 시킨 대로 밤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때는 밤이 나는 가을철도 아닌데 엉뚱한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무를 잘 타기로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할머니 말씀을 빌리자면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탄다 하여 항상 걱정을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한 말이 사실인 줄 알고 갑자기 회초리를 해 오더니 노발대발하면서 나를 세워 놓고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난생 처음으로 그렇게 무섭게 매를 맞았다. “네 이놈! 다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갈 테냐, 올라가지 않을 테냐!”하면서……. 할머니 생각으로는 이참에 나무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훈계하느라 그렇게 했다 하였다. 나는 두 손을 싹싹 빌며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내 온 얼굴과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고 밤새도록 울며 밤을 지새웠다.(계속)

30. 쌍천(雙川)

(1). 처음 본 미국 군인.

그 이튿날부터 나는 학교엘 갈 수가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약도 눈에 넣지 않은 상태에서 생짜로 앓았다. 보름 정도 집안에서 앓았는데 어느 날 햇빛이 들어오지 않을 때 나는 오른쪽 눈을 실눈같이 뜨고 오른쪽 귀 있는 쪽으로 옆으로 보니 옆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에게 오른쪽 눈 옆으로 조금 보인다고 말했더니 이제 낫는구나 하면서 좋아하였다. 하루 다르고 이틀 다르고 한 달쯤 지나니까 드디어 양쪽 눈을 뜰 수가 있었고 환한 곳은 눈이 시려 볼 수가 없고 빛이 흐린 쪽으로 시선을 돌려 물체를 볼 수가 있었다. 왼쪽 눈은 손으로 약간 가린 채로 오른쪽 눈은 반쯤 뜬 채로 나는 바깥출입을 할 수가 있었고 한 달 반 뒤에는 하늘을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학교를 오갈 수가 있었다.

다른 애들은 내 얼굴만 보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구경하였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전체는 그때 화약 하나 하나가 불덩이가 되어 얼굴에 박힌 것이 까맣게 되어 얼굴 전체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매일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는데 두 달 뒤엔 얼굴 전체가 제대로 되었고 신기하게도 약 하나 바르지 않고 내 눈은 원상대로 회복되었다. 참으로 전쟁 통에 총알 가지고 장난하다가 죽거나 크게 장애를 가질 뻔했던 것이다.

그 해 할머니는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에 문중 논까지 얻어 부쳤는데 날이 가물어 나도 논둑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면서 차례 물을 대어 가면서 벼와 찰벼 농사를 지었다. 넘은들 한복판에 서쪽 설악산께로부터 쌍천 하류 바닷가까지 쳐 있었던 철조망들이 모두 다 걷히고 벌판은 농사짓기에 장애물이 없었다. 그 해 초여름으로 치달을 때 몹시 가물어 논에 차례 물대기를 하느라고 온 벌판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차례 물 대느라고 나는 할머니와 여러 번 벌판 논둑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우리 차례가 되어 논에 물을 댄 적도 있었다.

장잿터(장자터) 마을 위쪽으로는 농사를 짓다가 미처 제거치 못한 지뢰를 윗동네 아저씨가 밟아 크게 다치고 다행히도 목숨은 건진 일도 있었다. 차례 물을 대고 난 뒤에는 도랑 웅덩이에 옹고지(미꾸라지 종류)가 하도 많아 삼태기로 퍼 올리던 생각도 나고, 특히 벼메뚜기를 많이 잡아 구워먹던 생각이 난다.

벼논에 많이 나서 핀 피를 뽑아다가 핀 피의 끝만 남겨 놓고 모두 훑어낸 다음 그 남겨 놓은 피 끝에 침을 가득 뱉어 벼 고랑에 드리우면 개구리가 피 낚시질에 걸려 피를 물다가 피대궁을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면 그 개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지는걸 보고 재미있어 했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넓디넓은 벼논 벌판에서 내가 혼자서 놀았던 그때의 추억이다.

1952년 여름은 비가 오지 않아 아주 가물었다. 중복인가 해서 복숭아가 잘 익을 계절이었는데 우리 동네 농사짓는 어른들이 모두 다 소금재 고개 너머 넘은들 벼락바위 옆으로 흐르는 쌍천 아래께로 가서 천렵을 하였다. 쌍천은 설악산에서 흐르는 아주 맑고 시원한 큰 개울이다. 벼락바위 먼 발치서부터는 설악동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흘렀다. 그래서 쌍천이라 부른다.

설악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라 맑기도 하려니와 한여름인데도 아주 시원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예전 병자년 포락(홍수)때까지는 바다에서 연어가 많이도 올라오는 곳이라 하였다. 이런 쌍천에서 한여름 물줄기가 가늘어질 때를 놓치지 않고 아저씨들은 쌍천 한 갈래 저 아래에다가 그물을 기다랗게 건너 쳐 놓고는 그 위에서부터 내려가는 물을 가로질러 막기 시작하였다.

여럿이 지게에 흙을 져다가 연이어서 퍼다 부으니 한나절도 못되어 쌍천 지류 하나는 물이 내려가지를 않고 다른 한쪽으로만 내리 흘렀다. 그러고는 한참동안 물이 다 빠진 뒤에 고인 웅덩이와 굵은 돌을 들추고는 여러 가지 민물고기 뚝저구, 기름종갱이, 빼둘가지, 옹고지 심지어 뱀장어까지 잡았다. 나는 그때 천렵 가서 고기 잡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지금도 설악산 신흥사 쪽으로 올라갈 때면 잠시 멈추어 길 왼쪽 아래로 힘차게 흐르는 전쟁 통에 천렵하던 맑은 쌍천을 내려다보곤 한다. 그때 쌍천 바로 옆은 싸움이 치열한 뒤 양쪽 군대가 대치할 때 쳐놓은 철조망도 미처 다 걷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른들은 지고 온 커다란 검은 솥을 걸어 놓고 잡은 고기들을 거기에 솥에 쏟아 부어 설설 끓이기 시작하였다. 그러고는 막걸리를 마시고 민물고기 탕국을 즐겁게 들면서 놀았다. 우리들은 복숭아 한 덩어리씩을 손에 들고 고기가 갇혀 있는 여기저기 물웅덩이만 찾아 다녔다. 가재 같은 것은 돌만 들추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뱀장어를 잡을 때는 여러 친구들과 손에 모래를 한 움큼씩 움켜쥐고 미끄러운 뱀장어를 잡느라고 법석을 떨었다.

전쟁과 평화! 무엇이 전쟁이고 무엇이 평화란 말인가? 나의 슬픈 가슴 안고 이웃과 친척들의 한을 잠시 잊고 지나간 사람들을 잠시 동안 염두에 두지 않으며, 우리 동네 어른들과 아주머니 그리고 어린 우리들은 그렇게 한여름 복날을 해가 설악산 대청봉으로 넘을 때까지 늦도록 즐겼다.

1952년 여름이 지날 때 나는 UN군으로 참전한 미국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관덕정 군부대에서 지프차를 몰고 우리 집 앞 양지마을 도로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이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이나 기억이 없는(사실은 해방될 때 소련의 로스께들을 많이도 보았다 하였으나 그때는 너무 어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괴상하게 생긴 외모의 사람이었다. 코가 우뚝하고 뭐라고 쏼라대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나가고 조금 있으니 같은 쪽 저 아래쪽에서 또 지프차가 올라오는데 역시 앞서 지나간 사람들과 외모가 똑같았다.

이상한 장면이 벌어진 것이다. 쌍둥이 군인들인가 하고 갑자기 나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들도 쏼라대는데 역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뒷좌석에 얼굴이 새카만 군인이 탔는데 나는 그 검은 사람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미국에서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었음을 나중에서 알게 되었고 우리 마을에서 물치 내려가는 강선리 강현천 건너께 짐미(장산리) 비행장에 그들이 주둔하는 군부대 막사가 있었다.

한번은 친구들과 물치 장거리에 갔다 오는데 물이 많이 고인 강현천 하류에서 체격이 어마어마하게 큰 미군들 20여 명이 옷을 홀딱 벗고 깊은 물에서 물놀이를 하고 노는 것을 보았다. 서로 편을 갈라 하얀 비누를 서로 던지고 받으면서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수구 같은 게임을 편 갈라 하였던 것 같다.

우리들은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천변 강둑에 줄줄이 늘어앉아 미군들이 수영하면서 노는 것을 구경했다. 군인들도 우리들이 보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뭐라고 저들끼리 떠들면서 재미있다고 웃어가면서 노는데 전쟁 통에도 저런 한가함이 있었구나 하고 지나간 날의 그 장면을 회상해 본다.

여름이 다 지나갈 때 나는 혼자서 집 앞 보호수 굴암나무(굴참나무) 아래에 앉아 수수대궁을 가지고 장난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동차 경적 울리는 소리가 내 앞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수수대궁을 가지고 노는 나를 지프차 타고 지나가던 미군이 본 것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세우고는 나를 보고 차 앞으로 오라고 하였다. 갑작스런 일이라 주춤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그들은 또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나는 수수대궁 껍질에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나는 곳을 다른 손으로 꼭 잡고 있었을 때였다. 그렇지만 자꾸 오라는 외국 군인 아저씨들 앞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을 맞잡고 지프차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이상하게 생긴 미군 아저씨는 커다란 손으로 사탕을 한줌 쥐어 나의 작은 손에 얹어 주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에게 어께를 토닥여 주면서 여러 색깔이 든 사탕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손을 베어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내가 문제였다. 어색하게 사탕을 받았는데 어른 손으로 한줌 집어주는 사탕을 땅에 흘리지 않고 다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하였고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붕―.” 하고 떠났다. 그 이후 지금까지 손가락 베지 않았으면 두 손으로 더 많이 받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운 감정이 남아 있다. 저녁때 할머니 앞에 사탕을 내놓았다. 그 사탕은 참 맛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맛있는 사탕은 두 번 다시 맛보지를 못하였다.(계속)

(2). 전쟁중 거제도에서 온 아버지의 편지.

어느 날 저녁, 동네 어른들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라고 했다. 구호물자가 왔으니 집집마다 배당이 있어 타 가라는 것이다. 할머니와 나는 바로 옆집 안기혁 아저씨 댁엘 갔는데 구호물자라는 것이 옷가지들이었다. 그런데 그 옷들이 너무나 커서 체격이 왜소한 시골사람들이 입을 수가 없었다. 미국사람들이 전쟁이 난 우리나라에 원조물자로 모아서 보낸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옷가지이니까 아주머니들이 서로 골라가면서 이 집 저 집 배당을 주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할머니에게는 이상한 옷이 배당된 것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고르는데 뒷전에 앉아 처분만 기다리는 나의 할머니에게 배당 준 옷이 아무도 가지려 들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이상한 물건이었다. 흡사 머리에 쓰는 모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자 두 개가 이어져 있었다. 다른 쓸모 있는 옷가지들은 모두 동네 젊은 아주머니들이 서둘러서 차지했고 그 물건은 밀리다 밀리다 개밥의 도토리가 되어 나의 할머니 몫이 되었다.

그리고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의 할머니에게 배당준 것이 하도 이상하고 어디다 쓰는 옷인지도 몰라 어리둥절해 가면서 의견을 모았는데, 여자들 가슴을 싸매는 옷이라 하였다. 그러고서는 이 아주머니 저 아주머니가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입어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고는 집안이 떠나갈 듯이 깔깔대고 웃었다.

내 할머니에게 배당된 아리송한 옷은 여자들이 입는 브래지어였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들고 있는 그 옷을 들고서 보니 엎어 놓으면 흡사 산소의 커다란 무덤 봉우리 두기처럼 보였다. 아주머니들이 방바닥에 엎어 놓은 걸 보니 너무도 큰 것이어서 앙상한 나의 할머니에게는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할머니 품속에서 자랐었고 열두 살 될 때 까지도 갈비뼈만 집히는 앙상한 할머니 품에서 잠들었던 나였기에 나의 할머니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했다. 미국에서도 아주 몸집이 큰 여자가 보내 준 가슴 싸매기 옷이었던 것 같다. 필요한 옷가지 나누기가 다 끝난 뒤 할머니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내 같으면 손수건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것을 어디에다 쓰랴! 나는 필요 없으니 너 옥화나 가져라.”하면서 이웃집 시집 안 간 누나에게 주니 그 누나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부끄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8월 말쯤인가 할머니와 내가 밭에 갔다가 돌아오니 동네사람들이 야단법석이었다. 사단 사령부에서 김상사라는 군인이 이 마을에 찬수란 아이와 그 할머니가 사느냐고 묻고 갔다고 야단들이었다. 할머니는 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한참 궁금해 있었다.

그런 뒤 9월 20일쯤 우리 집 앞에 군인 지프차가 와 서더니만 찬수란 아이가 있느냐고 하면서, 있으면 잠깐 사령부 헌병대 권상사가 만나보고 싶어 하니 이 차에 타고 가자고 하였다. 할머니는 영문도 몰라 의아해 하였고 나도 겁이 덜컥 나서 망설이기만 하였다. 그 서씨라 하는 일등중사 아저씨(후일 거제도에서 다시 만났는데 연초면 한내리라는 곳이 고향이었다)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이상한 경상도 말로, “야야―! 니, 가 보먼 알긋지만 디―게 좋은 일이 있을 끼다. 마 퍼뜩 가자!” 하지 않는가. 그제야 할머니는 나를 보고 차타고 갔다 오라 하였다.

난데없이 나는 생전 처음 지프차를 타고 군 사령부 앞에 지금의 나의 6대조 할아버지 묘소 위쪽에 위치한 땅 속 진지 벙커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얼굴이 둥글둥글하면서 아주 잘 생긴 체격이 큰 헌병상사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나오면서, “네가 찬수냐?”하고 물었다. 그리고는, “내가 권오홍이다!”하고 소개했다. 이때부터 권오홍(權五弘) 상사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 되었다.

내가 얼떨떨하면서, “네!”하고 대답하니 그 헌병상사가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아 들어 올리면서, “찬수야! 네가 찬수로구나!” 하면서 몇 바퀴 돌더니만 나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건네주며 뜯어보라고 하였다. 어리둥절했지만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데 호기심이 일어나 나는 편지의 겉봉투 글씨를 찬찬히 보았다. 눈에 익은 글씨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내 아버지의 독특하고 다정한 글씨였던 것이다.

“찬수야! 네 아버지가 지금 경상도 거제도 연초중학교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다.”하고 말했다. 경상도? 거지도(거제도)? 교장? 나의 머리 속은 갑자기 종잡을 수 없게 혼란스러워졌고 또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북쪽 원산에 있는 아버지의 편지를 이 군인들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남쪽의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말인가?

겉봉투에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중복리 찬수 받아 보아라.’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었고, 뒷면엔 ‘경상남도 거제군 연초면 하청중학교 연초 분교장 김종권 씀’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흥분하여 한참동안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아저씨들을 두리번거리면서 보다가 아버지 편지를 들어 겉봉투를 보다가……. 한참 이러고 있는데 권상사 아저씨가 재미있다는 듯이, “찬수야! 어서 편지를 펼쳐 보아라.” 하였다. 나는 그래도 너무 좋고 흥분하여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 못하여 어쩔 줄 몰랐다. 할머니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폭격으로 원산에서 잘못된 줄로 알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의 편지가 친필로 온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니! 그때의 감격스러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러 아저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나는 아버지의 편지 겉봉투를 뜯어보았다. 여러 장이 겹쳐 있는 아버지 편지를 꺼내어 펴 보니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지의 글씨 모양이 와락 내 눈으로 들어왔다.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와 두 귀여운 여동생이 모두 원산이 폭격을 받아 재가 된 가운데에서 살아났고 또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저 머나먼 남쪽 끝에 가 있다 하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편지지 다섯 장의 앞뒷면 가득히 오른쪽으로부터 내려 쓰신 종서였는데 나는 단숨에 다 읽었다.

찬수 받아 보아라!

찬수야! 할머님 모시고 잘 있었느냐? 이 애비를 용서해 다오. 네가 할머님을 모시고 이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 있다는 소식 들으니 이 기쁨을 어찌 표현하랴! 장하고 장하다. 내 아들아…….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잉크로 씌어진 글인데 얼룩진 흔적으로 말라 있었다. 당신의 오늘이 있게 하신 어머님과 어린 아들인 나를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며 썼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계속)

31. 아버지의 난중일기 - 흥남, 원산부두의 철수작전

여기서 잠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후에 내게 들려준 원산에서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기로 한다. 아버지는 고향의 빨갱이들을 피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원산의 양조장하는 팔용 아저씨 댁에 의탁하여 가족들과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는 앞서도 말한바 있다. 아버지는 국군이 북진한 뒤 원산에서 대한민국 임시 행정요원인 학무과장직을 맡아 근무하였다.

이때에 아버지는 우리 국방군이 진격한 최전방을 방문한 내무부장관 유석 조병옥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하였다. 얼굴이 호랑이 상으로 신념이 아주 강하게 보였고 시선이 아주 무서웠는데 목소리는 걸걸하면서도 다정하여 북쪽 임시행정요원들이 감동을 받았다 하였다. 손바닥이 어찌 큰지 악수를 할 때 손을 꽉 움켜잡은 유석 선생의 자세는 대단하였다고 한다.

압록강까지 진군한 우리 국군이 중공군이 북괴 지원군으로 참전을 하여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함경남도 진진호 전투에서 UN군과 함께 크게 공격당하고 전투에 밀려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흥남부두에서 이루어진 이북주민들의 자유에로의 대탈출 1ㆍ4 후퇴였다.
 
이때 원산에서도 흥남부두와 같은 모양새로 철수 이동과 자유를 향한 피난민들의 구출작전이 함께 벌어졌는데 원산의 임시행정 요원들은 모두 다 가족들을 데리고 항구로 나갈 참인데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피하라는 말을 못 듣고, 행정요원들만 가족을 남겨두고 잠시 원산 앞 바다 여도라는 섬에 피하여 국군의 전세가 유리해지면 다시 원산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말만 믿고 단신으로 행정요원들과 나가려 했는데 사무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다른 행정요원들은 모두가 가족들을 데리고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아버지가 중리에 있는 집으로 뛰어가려고 이층에서 계단을 탕 탕 탕 하고 뛰어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 몇 시간 전 아버지가 나가면서 잠시 행정요원들이 피해 여도까지 나갔다 온다는 아버지의 말이 믿기지 않아 출산이 가까운 어머니는

큰 여동생 선화의 손을 잡고 어린 여동생 선희는 등에 업은 채 보따리 하나를 이고 임시 행정사무실 학무과 사무실의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거기서 어머니를 찾으러 뛰어 내려오는 아버님과 계단에서 극적으로 만났다고 하였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모두들 항구로 나가니 항구 전체가 남쪽으로 나가려는 피난민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커다란 상선은 적군의 포격을 피해 멀리 여도 쪽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다. 작은 배로 피난민들을 실어 날라 커다란 상선 옆에다 정박하고 배 위에서 기중기로 화물을 이동하여 적재하는 그물망을 내려 보내면 그물 속으로 여러 사람들을 화물처럼 담아 한꺼번에 올려 배 위에 쏟아 놓았다고 한다.

벌써 원산 주변 산 위에서는 적군의 포격과 사격이 시작되어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 진동하고 부두엔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들이 가족을 서로 부르는 소리, 어서 태워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 항구 여기저기에 인민군이 쏜 포탄이 날아와 터지는 소리에 사람들이 두려워 울고불고 우왕좌왕하면서 외치는 소리에 항구 전체가 처참하기가 형언할 수 없었다 한다.

그때 원산의 북쪽 흥남 부두는 원산 부두의 몇 십 배나 더 했다고 하니 전쟁의 참혹함과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함을 피해 남쪽 대한민국을 향해 내려오려는 피난민 행렬을 보면 김일성의 가혹정치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하마터면 원산에서 또 한 번 이산가족이 될 뻔하였다. 이렇게 되어 아버지는 어머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다시 거제도 장승포 항으로 갔는데 당시의 아버지가 쓴 일기장 겉장에 ‘난중일기’라 표제를 한 일기 내용 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당시의 일기는 지금도 내가 소중히 잘 보관하고 가끔 당시의 어려움을 읽으면서 1987년 5월 6일(음력 4월 9일)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버님의 6ㆍ25 당시의 고초를 마음 아프게 떠올리면서 그리워할 때가 많다.(계속)

32. 선영이의 죽음

아버지는 피난 내려온 즉시 당시 35세 나이에 1951년 1월 19일 제2국민병 교육대에 입대했다. 군 입대 적령기가 넘었는데도 일부러 제2국민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입대하면 전방의 전투에 투입될 것이고, 전방에 가면 고향에 남겨져 있는 어머니와 아들을 구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초초한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이 사실로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 너무 힘이 들었었고 식량지원이 아주 빈약하여 굶으면서 설 명절 달을 지났다고 했다. 3월 5일, 온몸이 무섭게 붓고 너무 굶어 부황이 든 아버지는 교육대에서 제대하여 당시 장승포에 피난 중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3월 7일에는 어린 두 여동생 선화와 선희 그리고 태어난 지 3주가 되는 여동생 선영이가 영양실조로 위독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3월 9일, 생후 3주일 된 여동생이 사망하였다. 장승포 국민학교 뒷산에 묻었다고 하였다. 이때의 아버지의 슬픈 마음의 글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내 피 받은 생명체가 어름인 양 식어간다.
선영아 실오리 같은 영이 있을진대
내 넋마저 빼어는 못 가느냐

반짝이던 동공마저 흐려 커지는 너를
너의 아비 어미가 보고 있다.

오호 3주일의 짧은 너의 생애를
애달파하나 울지 않고 보내련다.

마지막 가는 너의 몸을 묶었다
가냘픈 너 몸을 홀로 안았다
흙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다

멀리 고향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었다

3월 12일, 선희 퇴원.
3월 12일, 3월 22일, 문교부 주최 월남교원 재교육 강습.
3월 23일, 오비국민학교 근무 피명.
3월 25일, 단신으로 부임(옥교장의 후원). 3월 29일, 가족 동반 부임(선화 보행 45리).
중학교 입 학 지원생 특별 수업도 시킴.
8월 15일, 연초 중학교 설립 착수. 통영군 각 관계기관과 토의. 피난민 중학생을 위하여 헌신키로 각오.
9월 18일, 제1학기말 고사 시작.
12월 14일, 유엔 총사령부 교육국교육관 근무.
10월 2일, 이후 중학교 설립 신축 활발.
12월 15일, 정식 개학. 개교식 성대. 연초중학교장으로 취임.
1952년 1월 13일, 통영중학교 연초분교로 인가.
3월 27일, 하청중학교 연초분교로 변경 인가.
4월 16일, 선화가 자동차에 치였다.
5월 31일, 선희 모녀 고향 출발. 교통관계로 6월 2일 귀가.(어머니와 찬수를 데리러 떠난 것이 여의치 못함). 오호, 고향 소식을 모르는 나의 심사여.
6월 25일, 지방의 요청으로 지방학생 특별 모집(현재의 학생수 309명을 5학급으로)
7월 31일, 하기 방학식 실시(1개월간).
8월 31일, 김상사 편으로 고향 소식을 듣다. 사는 마을은 무사하다고 하니 어머님과 찬수는 모름에 애달프다.
9월 16일 어머님과 찬수가 건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33 헌병대 권상사가 보고 왔고, 찬수도 학교에 잘 다닌다고).
정녕 꿈은 아니다.
4년 참혹한 전화 속에서 어머님과 찬수가 살아났다.
이날이 오려고 기쁜 이 소식을 들으려고 나도 살았나 보다

어머님 불효자를 때려 주옵소서
찬수야 못난 아비를 욕하여 다오

기쁨은 신경으로 스며들어
한줌도 못되는 심장을 툭툭 쥐어박아
모였다 흩어진다.
그립던 얼굴들……

멀리 멀리 고향 하늘을 우러러
삶의 두 손은 넋의 느낌에 떨린 채
힘껏 마주 쥐고
고요히 눈을 감았소.

(어머님 상하의, 찬수 내의 권상사 편으로 보내드리다.)

10월 31일, 찬수가 부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다(권상사의 노고를 감사한다. 어머님은 언제나 오시려는가? 10월 시향을 모시고 오시겠지).

아버지는 부산에서 교원 채용고시에 합격하고 연초면 오비리의 옥치상 교장선생의 배려로 오비국민학교에 근무했다. 곧이어 고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반공사상을 교육시키는 교육관으로 근무하다가 연초중학교를 설립하여 인가를 받고 피난민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초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한다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고 잘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그때 하자 하셨는데 마지막에도 나에게 ‘할머니 잘 모시고 있거라, 우리는 곧 만난다’라고 했다.(계속)

33. 거제도 인민군 포로수용소

전쟁 통 내내 할머니에게 걱정만 끼쳐 드린 나에게 아버지는 ‘할머니 잘 모시고 있거라. 부탁한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지만 나를 대견스레 생각하고 태어나서 그때까지 다 쭈그러들어 주름살투성이인 할머니 뱃가죽만 만지작거리다가 잠드는 어린 나에게 당신 대신에 할머니를 잘 모시라고 편지에 썼던 것이다.

아버지가 권상사 아저씨를 만난 동기는 이렇다. 나의 아버지는 1951년 늦 봄에 같은 1.4 후퇴 때의 피난민 중 연초면에서 우연히 30대 초반의 오찬명씨라는 분을 만났다. 오찬명씨는 내가 다니는 천주교회의 교우 김한봉(요셉 1935년생)씨의 매형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서북청년단장인 철저한 반공주의 자였다. 당시 그는 고현의 거제도 주둔 미군사령부 소속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심문하며 또 상담역할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아버지도 유엔군 사령부 소속이 되어 한동안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시키는 정훈 교관이 되었다.
 
민간인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김씨 아저씨”로 통했다. 같은 사무실에 영어를 잘하는 20대 후반의 방치형이란 분과 사환 일을 보는 당시 17세의 김석봉씨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는 한준명 목사 이렇게 다섯명이 근무를 했다 한다. 한준명 목사는 1950년 10월 이후 원산 형무소에 종교박해로 감금되었다가 삼백명에 가까운 형무소 인들이 급히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학살을 당할 때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피난민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현상을 안타까워 해서 학교 설립을 구상하였고 곧 이를 추진하는 중이었는데 9월 중순께 반공 정훈교육을 시키는 교관으로 출퇴근을 할 때 미군부대 앞에서 피난민 학생들이 떼를 지어 부대 근처를 배회 하면서 초콜릿도 얻어먹고 껌도 달라고 애걸하고 미군들의 군화를 닦아주고 얻어먹는 처량한 전쟁 통의 학생들을 보고 ‘아! 이 아이들이 저렇게 공부도 못하고 피난을 나와 거지 떼가 되어 부대 근처에서 처량하게 배회하니 학교를 반드시 세워 이들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거듭 다짐하고 (당시 거제도에는 육지의 각처에서 30만 명이 훨씬 넘는 피난민들이 내려와 판잣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연초면만 하여도 면사무소 중심으로 4만의 인구가 집결되어 산 중턱까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중학교 설립을 구상했던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데 미군 사령부의 설립 자재 도움이 대단히 컸다고 했다.

하루는 나의 아버지가 부대 앞에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껌 파는 아이가 있어 쳐다보니 아이가 아주 똑똑하게 잘 생겨서 그 학생의 내력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아이의 이름은 권오호 였는데, 서울서 가족과 피난 중 부모 형제들과 모두 헤어져 단신으로 피난민 대열에 휩싸여 거제도까지 내려와 이렇게 구두도 닦고 껌도 판다고 하면서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하는데 아버지가 데려온 아이를 보니 목에 때가 더덕더덕 끼었는데 완전 거지 행색이라 하였다. 사실 그 당시 피난민은 모두가 거지이기도 하였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서울이 고향인 권오호와 약속을 하고 저녁 때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 날 이후 우리 가족이 되어 침식을 같이하며 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학교 소사로 일을 시키면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오호형은 학급에서는 반장도 하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부모님 만난 뒤에 나는 학교 기숙사 한방에서 오호 형과 침식을 같이했고 교실 뒤쪽에 있는 탁구대에서 탁구도 같이 재미있게 쳤다. 오호 형은 이렇게 우리 집에서 가족처럼 생활했다.

1952년 4월 말 즈음 어느 날, 오호 형이 학교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포로수용소에 공무로 들렀다가 장승포 쪽으로 지나가던 헌병 지프차 위의 권상사 아저씨 눈에 띄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어디 가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어서 두 형제가 감격적으로 만났고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나누는 중에 전방의 나와 할머니 구출 얘기가 나왔다 한다.

순간순간의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일어나던 시대였고 숨이 콱콱 막히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일어난다는 옛 말처럼 실제로 있었던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 이후 오호 형은 아들을 잃고 부산에서 슬픔 속에 지내던 부모님의 수소문으로 부모와 다시 만났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개심에 불타는 인민군 포로들이 매일 그들 특유의 제식훈련을 하였고 총검술 자세 훈련도 하면서 매일같이 사고를 치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한다. 뒤에 반공포로가 되어 석방된 고향 친척 집의 경수형과 건수형도 수용소에서 만났는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깨소금이 필요하다 하여 어머니가 상당 분량의 깨소금을 만들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했다.

경수 형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건수 형은 지금도 부산에 산다. 또 아버지가 해방되기 전에 함경북도 두만강 옆에서 일할 때 일본인들에게 유난히도 곤욕을 치르며 구박을 받는 소사 일을 보는 소년을 잘 돌보아 주고 그를 따뜻이 격려하여 주었는데 그 형이 청년이 되어 인민군 포로가 되어 그 곳에서 만나서 아주 반가워하였다고 한다.

또 해방 후 고향에 내려오던 해에 속초 위 간성 쪽으로 오호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계실 때 아주 똑똑한 쌍둥이 형제가 있어 이들을 잘 지도했는데 그들도 인민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반갑게 만났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아주 슬퍼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인구 기사문리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주둔했던 포로들도 만나 그들을 통하여 그 마을에 살았던 내 이모부 내외의 생사를 물었는데 총살형을 당하여 땅속 구덩이에 두 사람이 함께 묻혔다 하여 남몰래 통곡을 했다고도 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 슬픈 사실을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충격을 받을까봐 그러했으리라…… 그저 난리 통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만 하였다.

나중에 나의 고향이 완전 수복된 이후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세히 들은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이모의 사연은 너무도 끔찍하고 안타까웠다. 고의태란 사람에게 시집을 간 이모는 어머니의 4남매 형제 중 제일 막내인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8ㆍ15 해방 전 열여덟 살 때 머일 할머니의 시누이 큰아들인 나의 이모부는 인민학교 선생이었는데 아주 똑똑하다고 머일 할머니께서 소개하는 바람에 시집가기 싫다고 하는 이모를 아버지가 적극 권고하여서 이모가 울면서 승낙했다.

그 댁 며느리가 되어 그 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유행병 홍역으로 모두 잃었다. 마침 셋째아이를 임신 중에 6ㆍ25가 나서 1ㆍ4 후퇴 시까지 잠시 국군에 협조한 일이 있었는데 이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고자질을 하여 이모부와 만삭이 된 이모는 인민군들에게 끌려가서

다른 곳에서 잡혀온 여러 사람들과 같이 세워둔 채로 끔찍하게도 총살을 당하였다 했다. 이유는 “인민학교 선생질하던 놈이 감히 인민의 어버이신 김일성 수령님을 배반하고 국군에게 협조하였다”는 죄목이었다.

당시 38선 바로 이북엔 지리적 위치도 있었겠지만 마음속으로 거의가 이남의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많았다. 이런 일이 동네마다 비일비재하였으니 백성들이 조금 잘못이 있거나 어떻게 고약한 심보를 가진 이웃이 있어 모함질 한 번이면 그 즉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개미 목숨보다 못한 그런 때였다.

이모는 해방 전 언니인 나의 어머니 집에서 어린 나를 업어 돌보고 어머니의 가사를 도와주면서 나를 아주 귀여워하였다 했다. 뜨개질을 아주 잘하였고 바느질 등 손재주도 뛰어났다 하였다. 이모가 머리를 곱게 빗고 따 늘인 다소곳한 소싯적 사진을 볼 때마다 지금도 안타깝기가 짝이 없다.

이모부는 성격이 활달하여서 6ㆍ25 나기 두 해 전인가 해서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데 마침 우리 텃밭을 작은할머니 댁에서 부쳤었다. 그때 감자 쪽을 쪼개어 심으며 조력하는 이모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에게,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이 땅에 또 다시 봄―은 온―다 네― 아리랑 아리랑 ―” 하면서 “온다네―”를 다시 반복하곤 웃으면서 얼굴을 마주보며 가르쳐 주던 다정스런 모습이 생각이 난다. 나는 그때의 봄노래가 모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저 따라 불렀다. 그런 나의 이모부는 6ㆍ25 때 인민군 앞잡이들에게 신고되어 끌려가 깊은 산골에서 여기저기서 붙들려온 다른 마을의 국군 돕기에 참석한 민간인 조력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총살을 당했던 것이다. 이모가 잉태한 나의 사촌동생은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흉악한 총칼에 사라졌던 것이다. 전쟁과 사상의 대립은 이렇게 무섭고 끔찍하였다.

할머니와 나는 1ㆍ4 후퇴 뒤에 강릉으로 피난을 내려갔다 올라오면서도 이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산다는 이모의 식구들이 어떻게 되었나 하며 잠시 마음속으로 궁금할 정도였지 그때 벌써 인민군들에게 총살된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계속)

34. 포로수용소 폭동과 연초중학교 개교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야기이다. 포로수용소의 분위기는 흉흉하여 포로 막사마다 꼭대기엔 어떻게 만들었는지 인공기가 매일 나부끼고 지독한 포로들은 손톱들을 일부러 길게 길러 흉기처럼 만들어 흉측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깡통을 비워 그 껍데기로 칼과 무기 등 각종의 흉기를 만들고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계속 일어났으며 유엔군과 민간 교관들 그리고 반공사상을 가진 포로들이 자주 피해를 당하였다.

연일 긴장된 분위기에서 하루는 두만강 옆 만주 훈춘으로 건너가기 전 우리나라 최북단 마을에서 일본인들에게 구박 받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과 속초 위 오호중학교 때의 제자 쌍둥이 형제, 그리고 우리 집안 문중의 경수, 건수(건수 형은 인공 때 아버지가 양양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을 때 집안 일가친척과 형제들을 대동하고 극구 변호한 종순 아저씨의 큰 아들이다) 두 형들이 다가와서 아버지에게 조용히 일러주기를 앞으로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나니까 교육관직을 그만두고 피하라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도 일등급 제거 대상이라 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악한 끝은 없으나 착한 끝은 있는 법이다” 이 말은 그 이후에도 우리 집안의 교훈 중 하나이다.

나의 아버지는 포로수용소 정훈 교관으로 근무하는 한편 연초 면에 개설하려는 연초중학교 설립문제로 골몰할 때였다. 그 전해(1951년) 12월 중순부터 포로수용소 내에서 인민군 군가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매일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원수 만세” 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학교 개설을 위하여 포로수용소 교관 임무를 그만뒀고 바로 이튿날 12월 15일 연초 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952년 1월 초 아버지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중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두만강 옆에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 인민군 형은 아주 새빨간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몇 번 전향하라고 권했으나 자기는 이북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간다고 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하였다. 아버지는 그 형의 폭동에 관한 진실된 귀띔의 말을 듣고 그 길로 유엔사 사령부로 가서 대대적인 폭동 계획이 있으니 철저히 대비하라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미군들이 이 말을 소홀히 했다. 그 바람에 1952년 5월 초순경에서 6월 중순까지 그 끔찍한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폭동이 일어나 어마어마한 살육이 일어나고, 포로수용소 총책임 사령관 돗트 준장이 5월 7일 포로들에게 포로가 되어 수모를 당하는 실로 웃지 못할 창피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반공 포로들과 싸움이 붙어 서로가 악귀처럼 할퀴고 서로 죽이는데 그 끔찍하기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포로수용소의 폭동이었다.

극렬한 인민군 포로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반공포로의 눈알을 산 채로 파냈다는 끔찍스런 이야기라든지, 나무창으로 반공포로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 살해했다든지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만 온 거제도 일대에 퍼졌다. 6월 중순이 되어 어머니가 학교 앞길에서 서쪽 연사리 쪽으로 50미터쯤 떨어진 곳 오른쪽 돌담 아래(나도 그 해 수용소 폭동이 난 지 7개월 뒤 1952년 12월 이후부터 이곳에서 아주 조금씩 나오는 생수를 오래 오래 기다려 물을 받곤 하였다) 우물에서 물을 받을 때 커다랗고 아주 긴 트럭(비행장 활주로에 깔아놓는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으로 짐을 싣는 차 울타리를 함)의 행렬을 보았다. 트럭에는 죽은 시체를 팔다리가 철판 밖으로 너덜대는 채로 진흙더미 싣고 가듯 가득히 적재해서 옥포 고개 넘어 장승포 방향 산비탈 쪽으로 갔다 했다.

옥포 고개 산비탈에다가 가매장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물을 받는 우물 가 큰길로 당시 폭동 시 희생된 시체가 저녁 으슥할 때 3, 4대씩 며칠간 지나갔다고 하였고 그때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하였다 했다. 이 슬프고 끔찍함이란…….

후일담이지만 당시 피난민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 된 포로수용소 이야기는 더욱 복잡했다. 톳드 준장은 평화론자라고들 하였고 또 공산주의에 물든 미국 지휘관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이유는 돗트 준장은 인민군 포로들을 대우하는데 매우 관대하였다는 사실때문이었다. 그는 세심한 데까지 포로들에게 각종 편리를 다 보아 주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다.
 
또 한 가지는 인민군 총좌 이학구란 장군이 붙잡혀 와서 사병인 것 처럼 숨어 지냈는데 그 신분이 나중에 들통이 나서 돗트 준장이 고현 바닷가에 있는 그의 관저 옆에 인민군 장군 이학구의 숙소를 특별히 따로 마련하여 적의 장군으로 대접하였다고 했다. 후일 포로들의 폭동이 일어나 돗트 준장이 어떻게 하다가 인민군 포로들의 포로가 되었을 때 폭동을 주도한 인민군 총좌인 이학구가 자기 부하인 인민군 포로들에게 돗트 준장만은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려 포로들이 신사적으로 대접했다고들 했다. 돗트 준장은 일주일 여 만에 풀려났는데 그런 정도로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뒤죽 박죽이었다고 했다. (계속)

35. 재회를 약속한 할머니와의 이별

나의 이야기는 다시 양양 고향으로 돌아온다. 권상사 아저씨에게서 아버지가 보내준 물건 보따리를 벙커에서 받아 들고 다시 지프차를 타고 집에 오니 할머니는 그 때까지 집 앞에서 서성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나는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셔요! 동생들도 잘 있대요!”

그 때부터 할머니와 나는 너무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할머니 환갑 때 못해드린 옷이라면서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보낸 한복 한 벌과 상하 내의 한 벌, 그리고 내 내의가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간 ‘만세! 만세!’ 하면서 동네사람들이 옆에 있거나 말거나 그저 또 연실 춤을 추었다. 할머니는 그 한복과 내의를 가슴에 꼭 껴안고 내가 읽어 드리는 편지 내용을 귀 기울여 들었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 거제도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만날 때까지 한복은 한번도 입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지니고만 다녔다.

‘찬수 받아 보아라!’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그 이후 수도 없이 할머니에게 읽어 드렸다. “또 한번 읽어라!” “다시 한 번만 들어 보자!”

글씨를 모르는 할머니는 아버지 생각만 나면 편지를 읽으라 하여서 얼마 뒤에는 나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아예 보지 않고도 모두 줄줄 외웠다. 한밤중에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다가 “참! 편지 한번 읽고 자자”하면 어유(魚油) 등잔불을 켜지도 않고 깜깜한 방에 할머니 곁에 누워서 “찬수 받아 보아라!……” 이렇게 줄줄 외워서 편지 내용을 들려 드렸다.

그 이튿날부터 할머니는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 받느라 희색이 만면하였고, 내복을 자랑하느라고 들고 다녔다. 먼데 떨어진 집에 가서도 할머니는 아버지가 보내온 옷을 내놓고는 이웃이 물어보지를 않는데도 “이 옷이……” 하면서 자랑하였다. 나도 기가 살아 가슴을 펴고 어깨를 재고 다녔다.

가끔 동네에서 친구들이 너희 부모는 이북에 갔으니까 빨갱이가 되었을 거라고 했을 땐 기가 팍 죽었고 부모가 없다고 얕잡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제 풀에 기가 죽어 매우 슬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한민국에 내려가셔서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라 하였으니 어깨를 재면서 우쭐거리고 다닐 만도 했다. 세상에 좋은 일이 많다지만 그때처럼 좋았을까…….

권상사는 곧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할 때 너를 데리고 가려하니 나 보고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앞서 우리의 소식을 알려고 거제도에서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전방 전투지에 온 김상사라는 군인이 사병을 통하여 왔다 간 일이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따라 가겠느냐 했을 때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친필을 확인한 뒤에 할머니도 권상사를 따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언제 전쟁이 또 터져 죽게 될지 모르니 너는 먼저 군인들을 따라 아버지한테 가라”하고 단호히 말하였다. 당시에 나의 고향은 전쟁터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민간인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도 없었고 통신도 끊긴 상태였다. 군인들끼리의 연락망 이외엔 소식불통인 지역이었다. 군부대가 가는 전투함 대열에 민간인, 그것도 여자들은 절대로 군인 배를 탈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손자, 태어나서 그때까지 조금도 떨어지게 하지 않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군인들에게 맡겨 이 아이의 손목을 저 애비 손에 반드시 넘겨 달라고 군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할머니와 헤어지기 전날 저녁 할머니는 이별이 막연하게 불안하다는 것만 느끼고 잠자리에 든 나를 당신의 앙상한 가슴에다 꼭 껴안아 주면서 잠도 자지 않고 계속 나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의 결심은 무서웠던 것이다. 앞으로 전쟁이 또 이렇게 계속되면 이 아이를 제 애비 품에 넘기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단호해진 것이다.

1951년 9월 중순이 지나 나는 강릉 피난 때 지고 다니던 하얀 무명천으로 된 배낭에 할머니와 내가 넘은들에서 농사지은 찰벼를 찧어 소두 다섯 되가 넘는 찹쌀을 넣었다. 권상사 아저씨가 보내 준 어른 군복 바지와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붙여 입고 검정 고무신에, 눈앞으로 흘러 내려와 앞을 가리는 군모까지 쓴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지프차 뒷좌석에 올랐다.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난 다음 세월이 좀더 안정되면 민간 차편으로 거제도로 내려온다는 할머니와 헤어져 사령부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잠시 떨어지는 나는 그날 소리 내어 울었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이 눈물을 흘리고,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다. 나는 달리는 지프차 위에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할머니를 부르면서 울었다. 12살 어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때까지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 내 생명과도 같으며 사랑 그 자체인 할머니와 갑자기 생이별을 하는 슬픔을 겪게 된 것이다.

그 단단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도 눈물을 흘렸다. 무서운 전쟁터에 할머니만 남고 나만 떠난다는 두려운 생각이 왈칵 엄습해 왔고 여기서 또 전쟁이 나면 영영 이별하는 것 같아 나의 울음소리는 더욱 애절하게 커졌다. 급기야는 차에서 다시 내려 할머니에게 가겠다고 지프차 안에서 나대며 울었는데 앞에 탄 권상사 아저씨는 가만히 있는데 뒷자리 내 옆에 있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시커멓게 생긴 헌병 군인 아저씨가 참다 참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는 다시 만날 텐데 아버지 어머니 만나러 가는 게 싫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핀잔을 주는 바람에 그제야 나는 조금 진정이 되고, 또 주눅이 들어 나대지를 못했다.

우리가 탄 지프차는 물치 장거리를 지나 쌍천 하류다리, 대포, 청초호를 거쳐 지금의 청호동 건너편 속초항에 도착했다. 휴전된 이후의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청호동은 두고 온 북녘 고향에 가고픈 한 많은 피난민들의 동네로 변했고, 아직도 이북 5도민이 억척스레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속초항 안에서 ‘끌배’(양쪽에 연결한 줄을 당겨서 이동하는 뗏목 같은 배)만 오고가는 한가한 갯마을 동네였다.

청초호는 내 아버지의 소년시절 추억이 담겨진 호수이기도 하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서 이루어진 석호인데 아버지가 일제시대 소학교 3학년 때 교실에서 공부하는 도중 급우 한 아이가 늦게 등교하여 교실문을 열었다. 담임선생님이 왜 늦게 오느냐고 물으니까 늦게 온 그 학생이 쭈뼛쭈뼛하고 말을 못하자 다시 엄하게 다그쳤다.

그제야 지각한 친구가 베적삼 양쪽 주머니에서 거북이 새끼를 여러 마리 꺼내면서 하는 말이 학교 오는데 청초 호숫가 모래사장에 거북이 새끼가 놀아 거기에 팔려 학교 가는 것도 잠시 잊고 그걸 잡느라고 등교시간 늦었다는 것이었다. 말하는 동안에 꺼내 놓은 거북이 새끼 여러 마리가 교실 바닥으로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바람에 모든 급우들이 공부하는 것을 다 잊고 거북이 새끼 몰이하느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버지는 생존 시 가끔 나와 고향 여행길에서 청초호 근처만 오면 청초호 거북이 새끼에 얽힌 유년시절의 유쾌했던 추억을 얘기 하곤 했다.

아버지는 서당에서 당시 인제에서 유명한 유학자 정기빈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고, 대포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 학업성적은 일등만 해서 온 동네의 자랑거리였고, 오래달리기를 잘하여 언젠가 일등을 했을 때는 당시에도 연세가 많으신 나의 고조할머니가 당신의 증손자가 먼 달리기 경주에서 일등을 했다고 대포로부터 쌍천 다리를 지나 물치 5일 장거리께로 춤을 덩실덩실 추어가며 하복골 태봉께로 올라온 적도 있었다.

훗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부식의《삼국사기》를 국문으로 완역하고, 당신의 저서인 고등학교 한문2 검인정 교과서로 제자들을 가르친 한학자였으니 학문에 대한 소신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그 해 12월 25일 오전 11시 우리 가족과 거제도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나절씩이나 털썩 앉아서 내가 떠난 동해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베틀 방에 모아 놓고 매일 한 번씩 만져 보면서 손주가 보고 싶은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고 했다. 나는 꼬마 군인 행색으로 속초항에 정박한 3000톤 급 LST 전함에 올랐다.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를 군인들은 ‘아가리 배’라고 불렀다.(계속)

36. 부산 거제리 병영의 하우스보이 생활

1952년 10월 초, 나는 권상사 아저씨의 지프차 뒷좌석에 타고 LST 수송전함에 올랐다. 어떻게 올라가나 하고 궁금했는데 지프차를 탄 채로 배 갑판 쪽에서 내리는 아주 넓은 판이 아래에 닿으니 그 철판 위로 차가 언덕으로 올라가듯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그 배 규모 전체가 놀라울 뿐이었다. 아침부터 몇 시간 동안 그 많은 군인들과 차량이 배 안으로 모두 다 들어간 것이다. 오후 늦게 그 큰 배는 “뿌우웅! 뿌우웅!” 소리를 몇 번 내더니만 항구를 떠났다.

배 안 침대에 있던 내가 권상사 아저씨의 허락을 받고 사다리를 한참 올라 갑판 위로 가 보았다. 배가 속초항을 떠났으니 할머니가 남아 있는 설악산 아래 송암산 근처나마 건너다보고자 함이었다. 배는 벌써 속초 앞바다 동해안 한가운데 들어 기운차게 남쪽으로 항해하였다.

사실 그때 나는 그 큰 배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았다. 가끔 넓은 갑판 위에 고인 빗물이 좌우로 약간씩 흘러 쏠리는 것만 보였는데, 난간을 짚고 서서 문득 멀리 서쪽에 있는 태백산맥 쪽을 보니 설악산이나 송암산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고 해가 넘어간 뒤의 높고 기다란 검은 태백산맥만이 장엄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다시 할머니가 남아 있는 송암산 아래 우리 마을이 위치한 곳을 가늠해 찾으려 했으니…… 아무리 찾아도 보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마음속으로 고향에 남아 있는 할머니가 자꾸 보고 싶었다.

큰 배가 지나가니 거센 검푸른 물결만 산더미처럼 일어 허옇게 부서지는 바닷물살만 내려다보았다. 내 집 마을 위치도 찾지 못하고 갑판 아래 침실로 내려온 나는 이튿날 아침 배가 부산항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정신없이 늘어지게 잤다. 부산항에 도착했다는 소리에 짐을 챙겨 권상사 아저씨를 따라 나가니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뿌웅 뿌웅” 하며 온 항구를 울렸다.

다시 지프차를 타고 ‘아가리 배’에서 나와 우리 지프차는 지금의 서면에서 동래 방향에 있는 거제리 근처의 부대에 도착했다. 그곳 군부대에서 군인들에게 잔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군화도 닦아 주고 짬밥도 나르면서 거의 한 달 가까이 보냈다. 그 당시 말하는 소위 ‘하우스보이’ 같은 그런 역할이다. 다르게 말하면 군부대 안의 마스코트 역할을 잠시 하였던 것이다.

어떤 군인 아저씨가 “어이! 찬수야!” 하면 쏜살같이 뛰어가 그 아저씨의 심부름도 하고, 그런 식으로 나는 군부대 안의 분위기에 점차 익숙해졌다. 한가한 저녁 시간엔 내무반에서 여러 아저씨들이 나를 내무반 복도에 세워 놓고 놀았다. 노래도 시키고 잘했다고 박수도 치고…… 이때 나는 전시에 배운 군가 솜씨를 그 때에 아낌없이 발휘(?)했다. 원래 나는 아주 부끄럼이 많았는데 바뀐 환경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지냈다.

한번은 화장실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미군 화장실에 갔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모두 이상했다. 양변기를 처음 본 것이다. 변은 마렵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들여다보고 두리번거리며 망설이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양변기의 앉아야 할 곳에 고향 정난간(변소) 이용 하듯이 신발을 신은 채로 양 발을 다 올려놓고 앉았다. 그 높고 미끄러운 곳에 아슬아슬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긴장하면서 변을 보았는데,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그렇게 못 참았던 변이 자세가 이상하니 오히려 나오질 않아 고생했던 일은 지금도 집안의 양변기를 볼 때 가끔 생각나 실소를 금치 못한다.

권상사 아저씨가 아버지를 만나려면 조금 기다려야 된다고 했는데 나는 한 달간의 군 병영내의 생활이 점차로 재미가 없어져 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권상사 아저씨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령부에 출장을 갈 일이 있는데 그 날에 맞추어 나를 데리고 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10월 말쯤 아저씨가 나의 아버지에게 부산에 왔다는 소식과 11월 1일에 장승포 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했다.(계속)

37. 장승포 항에서의 아버지와 만남

11월 1일 나는 권상사 아저씨의 지프차를 타고 거제리 부대에서 서면을 지나 자갈치 시장 뒤편에 있는 거제도 장승포행 여객선 개찰구에 도착했다. 배 터까지 올 때에 얼핏얼핏 밖을 내다보니 자동차가 길에 가득하고 사람들이 길 양쪽으로 빼곡하게 다녔다.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었다. 하기야 전국 각처에서 피난민들이 모두 다 부산으로 몰렸다 할 정도였으니 북적거리기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도시였다. 권총을 찬 헌병 권상사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개찰 조사도 없이 나는 무임 승선했다. 개찰하는 아저씨가 순간 나를 보고 또 헌병 권상사 아저씨가 내미는 증서를 얼핏 보더니만 검사도 않고 그대로 통과시켜 줬다.

배가 출발하고 여객선 밑바닥 객실 안에 누워 잠만 자는 아저씨 옆에 있던 나는 갑자기 지루하고 호기심이 나서 갑판 위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 날은 파도가 그리 세지 않았고 바다 경치가 좋았다. 하얀 갈매기가 나는 것도 구경하고 우리 배 옆을 지나는 배도 구경했다. 지나가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대니 우리배의 승객들도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데 처음 보는 장면이라 재미있었다.

배의 맨 앞에 서서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 물살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누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뒤돌아 쳐다보니 배의 선원인데 나를 보고 배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배표?’ 배표가 무엇인지도 몰라 아저씨를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는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커다란 손으로 나의 왼쪽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다.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선원 아저씨가 고함을 치면서,

“야! 이느무 짜슥아! 배표도 없이 배를 타? 너 같은 놈 때문에 통일이 안 되는 기라!”하면서 내 멱살을 잡고 파도가 부딪치는 뱃전 밖으로 빠뜨릴 기세였다. 갑자기 나는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우리나라 통일의 방해꾼이 된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그 선원 아저씨는 내가 무임 승선을 전문적으로 하는 아이로 간주한 것이다. 너무 겁이 난 나는 얼른 둘러댔다. “아저씨! 우리 아저씨가 군인 헌병 상산데요. 저 배 아래 있는데 아저씨가 표를 가지고 있어요.”그러자, “빨리 가서 가져오너라.” 했다.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선창 아래 객실로 내려갔는데 권상사 아저씨는 여전히 코만 드르렁 드르렁 골면서 깊은 잠이 들어 말도 붙이지 못하였다. 갑판 선원아저씨에게 혼쭐이 난 가슴도 달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권상사 아저씨 옆에 쪼그리고 숨는 듯 누워 홀연 잠이 들어 장승포 항까지 갔다.

권상사 아저씨가 다 왔다고 내 손을 끌었다. 선원 아저씨에게 뺨 맞은 거고 뭐고 금세 다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만나면 드리라고 할머니가 챙겨 준 각종 곡식 주머니가 든 배낭을 허겁지겁 챙기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아이가 어른들이 입는 군복을 아래위로 소매 발목께만 몇 번씩 접어서 입고, 커다란 군인모자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흰 배낭을 진 모습이란…….

참으로 내 행색은 완전히 거지보다 더 이상한 꼴이었다. 군인 헌병 손에 이끌려 선착장에 내린 나는 어리둥절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내가 내리는 저 앞쪽 양 옆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나보다 큰 형들이 죽 늘어서서 나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으로 웅성거리며 여기저기서 만세 소리도 들렸다.

권상사 아저씨가 “네 아버지가 저기 계신다”고 했다. 배표 받는 입구에 아버지가 있다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 나는 잘 찾지를 못했다. 보고 싶은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 순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저쪽에서 사람들 가운데로 양팔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는 아버지, 만면에 웃음과 눈물을 담은, 꿈에라도 보고 싶었던 아버지가 제지하는 선원을 뿌리치고 개찰구를 타고 넘어 나를 향해 “찬수야―!” 하고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향해 울면서, “아버지!” 하며 달려오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찬수야! 찬수야! 찬수야! 어디보자!” 하며 아버지는 한참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일어서면서 양팔을 치켜들고, “만세! 만세!” 소리쳤다. 아버지는 평소의 정신이 아닌 듯했다. 양팔을 치켜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함은 이렇게 대단했다. 부자가 전쟁 통에 까마득한 곳에 생사도 모르고 떨어져 있다가 엉뚱한 객지에서 기적적으로 만나 대성통곡을 하니 갑자기 그 날의 장승포 항의 부두는 피난민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박수를 치던 형들과 마중 나온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면서 모두 우는 것이었다.

정든 고향을 두고 갑자기 월남한 피난민 모두의 울음은 참으로 6ㆍ25 동란의 상처를 입은 우리나라 남북 이산가족 모두의 눈물이었고, 수많은 의미를 간직한 슬픔과 그리움이 가득한 울음이었던 것이다. 배에서 일하는 억센 사투리의 경상도 아저씨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아마 나의 따귀를 올려붙인 아저씨도 그때 와서는 다 알고 아마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눈물만 흘리면서 연초 면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고향에 남아 있는 할머니 안부를 여러 차례나 물었다. 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으면 그러했을까. 많은 어른들과 학생들이 나를 환영하러 장승포 항까지 왔다가 모두 함께 연초 면으로 돌아왔다.(계속)

38. 피난민 집합지 거제도 연초면

연초면에만 4만이 넘는 피난민들이 있었다 하니 좁은 마을의 정황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하고도 남는다. 밤에 보니 주변 언덕과 높은 곳에 불빛이 휘황찬란하여, 개발하기 얼마 전의 서울 돈암동 산꼭대기의 판자촌 야경같이 높은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불을 켜 놓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이튿날, 건너다보니 산꼭대기부터 너무도 좁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잣집들 천지였다. 연초면 들판도 빼곡히 다 판잣집 촌이었다. 연초면의 서쪽인 연사리에는 초가집들이 많았다. 간혹 기와집도 있었지만 이런 집은 모두 다 거제도 본토박이(원주민)들이 사는 곳이고 피난민들의 집은 가는 데마다 규모가 일정치 않은 판잣집 일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날이 어두워 시장께 중앙극장이 있는 곳에 도착해 아버지를 따라 차에서 내리니 내 소문을 듣고 시장 통에 모인 연초면 피난민들이 웅성거리며 여기저기서 나를 구경하려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 “교장 선생님이 북에 두고 온 아들을 찾았다!” “38 이북의 전쟁터에서 아들이 살아 내려왔단다!”“전쟁 통 한가운데서 살아 왔다고?” “이북에서?” “전방에서 싸움하던 군인이 찾아서 데리고 내려왔대요!”하고 외치면서 야단들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터에서 소문을 듣고 모두가 나를 찾아 다가왔다. 지금은 평범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 때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온 연초면 피난민들의 피맺힌 한이 들끓기 시작하여 나에게 시선과 관심이 집중됐던 것이다.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누나, 형들이 나를 중심으로 이성을 잃은 것처럼 에워싸며 다가오는데 나는 그야말로 숨이 막혀 갑자기 압사를 당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만져 봄으로써 얼마 전에 이북 각처에서 급하게 피난할 때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심정을 느껴 보고자 함이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만지고 등을 토닥여 주면서 어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나의 손을 잡고 통곡을 하고…….

소문을 듣고 우리 집 사정을 안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할 것 없이 무조건 나의 볼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여 주면서 눈물을 흘렸으니 이처럼 슬프고 애처로운 장면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를 집으로 먼저 데리고 오는 줄 알고 두 여동생과 기다리던 어머니는 내가 오지를 않아 중앙시장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였다. 그런데 정작 아들을 제일 먼저 만나야 할 어머니는 나에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 사람들이 그제야, “교장 선생님 사모님이 저기 오신다! 길을 비켜라!” 하면서 사람들이 갈라선 가운데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가 달려왔다.

어머니를 본 나는 가슴속 가득히 담고만 있던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내어 울면서, “어머니!”하고 울부짖으며 어머니 품에 안겼다. “찬수야!” “어머니!” 나와 어머니가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울다가 어머니가 조용하여 내려다보니 어머니는 실신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어머니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더운 물을 입에 넣어 주고 손과 발을 씻기고 하는 북새통에 정신을 차린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붙들고 또 통곡하면서, “할머니는…… 할머니는?”하고 물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나간 공산주의 학정과 공포의 세월, 전쟁의 한스러움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이 울음으로 다 풀리랴! 기쁨의 통곡! 구경 나온 피난민들의 슬픔의 통곡! 부러움의 통곡! 무모하게 일으킨 6ㆍ25 전쟁의 쓰라린 흔적이 피난민의 한이 여기 한반도의 남단 거제도에 산더미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

늦게야 진정하신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는 쌀가게에서 걀쭉걀쭉한 알랑미(안남미)를 외상으로가 사가지고 보고 싶은 두 여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도 동네 사람들과 시장에서 따라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집에 온 나는 부모님 앞에서 큰 절을 드렸다. 얼마 만에 드리는 큰 절인가? 모두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택에 같이 기거하는 이기순, 이만영 선생님에게 큰 절로 인사를 하고 어린 두 여동생의 손을 잡았다.

두 여동생은 낯이 설어 별 표정이 없이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다가 큰 여동생이 좀 컸다고 내게 다가와 쳐다보며 손을 잡았다. 어머니가 급히 저녁을 차려 들여오는데 두 여동생이 밥상 양옆에 착 달라붙어 내가 밥을 먹는 것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의식 못했는데 내가 밥숟가락으로 밥을 뜨면 고개를 내려 떠지는 밥을 보고 입으로 숟가락을 올리면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것이었다. 내가 두 동생들에게 같이 먹자고 했더니 어머니가 “얘들은 먹었으니 너만 먹어라”고 했지만 동생들이 자꾸 걸려 고집을 부려 같이 먹었다.

이튿날, 나는 두 동생들이 왜 그러는지를 알았다. 놀랍게도 피난민 전체가 거의 굶으면서 생활했고 끼니때마다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억세고 껄끄러운 메수수만 삶은 걸 먹는 게 전부였다. 숟가락에 잘 담아지지도 않는 그런 밥이다. 중부전선 고향에서의 전쟁 통에서도 구경해 보지 못했던 그런 밥이었다. 동생들이 하얀 알랑미 쌀밥을 보고 밥상 옆에 바싹 다가앉아서 군침을 흘리고 숟가락이 오르내리는 것을 따라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쳐다본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틀 정도 식사 때마다 나의 밥만 하얗고 다른 식구들의 밥들은 새빨갛게 된 수수 삶은 것뿐이었다. 3일 뒤부터 나도 본격적으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메수수 밥만 먹기 시작했다.(계속)

39. 생이별한 이산가족

중부전선 전쟁터 한가운데서 식량난으로 고생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심각한 피난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튿날부터 연초중학교 운동장과 우리 집은 나를 보려고 오는 사람들의 면회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나의 소문은 거제도 전역에 있는 피난민들에게 퍼져 나갔고 멀리 육지에까지 퍼져 나갔다 한다. 모두들 와서 나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엉엉 울며 눈물을 쏟고, “교장 선생님 댁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런 축복을 받느냐”고 부러워했다.

띄엄띄엄 통영, 마산, 부산, 진해, 진주 등지에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우리 집을 일부러 찾아와 나를 만나는 피난민도 있었다. 나의 부모와 피난시절 친했던 장갑송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어린 딸 명숙이를 데리고 통영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와 나를 만나고 며칠을 우리 집에서 묵고 간 일도 있다.

아저씨 가족은 성진에서 부모와 세 딸을 두고 피난을 왔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와 동갑인 그 아주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이북 이야기만 나오면 두고 온 세 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한숨을 내쉰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 댁 어른들과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은 피난시절 정이 들어 지금까지 가까운 친척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또 얼마나 답답했으면 어린 나에게 “통일이 언제 된다고 하더냐?”고 시국에 대하여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분들은 그때의 응어리진 가슴이 이제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을 테니 이산가족의 삶이란 이렇게도 모질기만 하단 말인가…….

40. 대한민국이 배척하는 마르크스 레닌 사상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역사 바로 세우기니 뭐니 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이미 우리가 다 경험하고, 다 알고 있는 6ㆍ25라는 그 생생한 사실까지도 엉뚱하게 거짓으로 뒤집어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 두려움 없이 대한민국이 북침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현실에 놀랄 뿐이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순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6ㆍ25의 아픔을 안고도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려는 국민들의 실천 행위는 이제껏 값졌던 것이다. 국민 모두가 도처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실망을 딛고 열심히 일하면서 희망에 찬 목소리가 우렁찼고 전쟁터에서 우리 국군의 열정이 남달랐던 것을 모두는 깨달아야 한다.

거제도에서 만난 김성천이란 친구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함경남도 함흥에서 개신교 목회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나 종교를 탄압하고 목사들을 못살게 하는지 목회활동을 함께 하던 친구 목사 두 명은 이북에서 사상범으로 붙들려 어디론지 행방불명되었고 그때부터 친구 가족들은 슬픈 운명의 나날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내 친구는 마침 1․4 후퇴시 부모를 따라온 가족이 같이 김일성 치하를 피해 거제도로 피난 왔다. 성천이 아버지께 납치된 가족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잡혀간 가장의 생사를 몰라 어떻게 남겨두고 우리만 피신하겠느냐면서 망설이다가 그만 나오지 못했다. 성천이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성천이 아버지는 피난 중 너무 쇠약해져서 거제도 장목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 어느 곳 남의 땅에 산소를 정해 모셨는데 자식들이 숨을 좀 돌릴 만하여 얼마 전까지 여러 차례 아버지 묘소를 찾고자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어떤 곳인지 산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했다. 1955년도에 부산으로 나와 제2송도의 고아원에서 세 남매가 크고 그의 어머니는 고아원(지금은 보육원)에서 밥 짓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내가 간혹 찾아가면 친구 어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을 털어 놓느라고 듣는 나로 하여금 숨도 미처 내쉴 수도 없을 정도로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놓았다.

성천이는 음악지식과 미술지식이 아주 깊었다. 특히 학창시절에는 클라리넷을 잘 다루었고 일어 공부를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고 어머니가 이북에서의 일을 이야기 주제로 삼으면 친구는 도망가듯이 하며 듣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의 한이 너무 안쓰러워서였고 밤낮으로 들어서 어머니 아픈 마음을 통달하였기에 이제는 오히려 듣기 싫어하는 마음이 먼저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 이야기의 맨 처음 이야기 시작은 가짜 김일성의 무모하고 못된 개신교도 탄압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나도 몇 번 들었지만 말을 한번 꺼내시면 앞에 앉은 세 남매가 꾸벅꾸벅 졸 정도로 끊임이 없었다.

나의 외가는 아직도 함경북도 청진에서 북괴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 90을 바라보는 내 어머니는 지금도 헤어질 당시 청진에 있었던 친정집 형제들을 그리워하고 북쪽에 관한 이산가족 뉴스만 나오면 당시의 김일성을 욕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때의 이산가족들의 애절한 정황을 생각하면 이제까지도 평생의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아까운 긴 세월을 다 놓치고 지낸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마음 이를 데가 없다.

다시 거제도로 돌아가 본다. 이때 아버지의 일기장에 쓰인 글이다.
아버지! 부르며 달려드는 자식의 얼굴
4년 풍진 속에 몰라보게 큰 자식을
안아보는 부모 된 마음

찬수야! 얼마나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었던고
못난 아비 어미를 얼마나 그리워 저렇게도 눈물이 용솟는가

어머님 홀로 고향에 두고
우리 모두 한자리에 앉아
고향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11월 2일 권상사 가족을 불러 식사를 하다. (맺어진 인연은 인생에 추억을 남기고)

내가 배낭으로 지고 온 찹쌀은 한동안 조금씩 조금씩 수수밥에 소중히 섞어 밥상에 올려졌다. 연초엘 와 보니 고향에서 전쟁으로 피해 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피난민 생활은 참으로 처참했다. 매일같이 초등학교 운동장 서쪽으로 커다란 텐트를 친 우유죽 배급소에서 우유 배급표를 내고 점심때는 피난민 학생들이 모두 줄을 서서 끓인 우유죽 한 사발을 후루룩 마시는 것으로 한 끼를 때우는 정도이니…… 한참 성장할 나이에 얼마나 배들이 고팠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즉시 연초 초등학교 4학년 2반(담임 김근자 선생님)에 편입되어 학교에 다녔다. 각 학년 1반은 본토박이 자녀들로 편성되어 있고 2반, 3반, 4반은 피난민 자녀들만으로 학급이 편성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강원도 양양지방의 사투리는 쓰지 않고 함경도 피난민 아이들과 어울려 함경도 사투리만 써서 지금도 함경도 억양이 내게서 떠나지를 않는다.(계속)

41. 할머니 거제도 도착, 이산가족 상봉

당시 아버지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던 일기장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12월 24일(음 11월 8일) 부친 제사
12월 25일 어머님이 오셨다(오전 11시)

오랜 세월(4년)을 두고
가슴 웅크려 쥐고 그리워하던
어머님 오시었네

검은 머리에 흰 가락 섞이어도
옥체 건강하심에 더욱 기뻐라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어도
머리 쓰다듬어 주시며
아무 말 없는 그 모습 장엄하여라

울지도 말하지도 않는 어머님
아마도 그 마음속엔
혈관이 부서져 피눈물 머금었으리

오직 자손들 보시려는 일념으로
62세의 노령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다만 홀로 천리 먼 길 오셨나니
오! 거룩한 나의 어머니여

기쁨 없는 평생 고애 속에
만고풍상을 낱낱 겪으시어
더욱 그 몸 괴로우시련만
도리어 자손들 위로하시는
그 마음 믿음직하여라
진정으로 희열에 찬 반생의 오늘이여

1953년 1월 6일 선화모가 부산을 다녀옴{모친이 가져온 돈으로 재봉틀 한 대 구입 110만원(화폐개혁 이전의 화폐단위)}

2월 7일 권상사(오홍) 내방. 어머님과 오래간만에 상봉함을 기뻐하면서 저녁을 즐기다. 고향 박소령에게 소식을 전하다.
2월 14일 우리의 명절 ‘설날’ 오전 8시~10시간 일식(日蝕)을 하다. 수년 만에 모친을 모시고 온 가족이 기쁘게 새해 계해년을 맞다. 풍진 속이나 나는 행복하다.
3월 6일(음 1월 21일) 오전 4시 18분 선심 출생 산모와 함께 건강. 어머님이 오셨으므로 모든 것이 안심.
5월 14일 고향에서 서종원 중사 옴. 내가 오래간만에 그리운 고향 사람들의 소식을 듣다.
어머님의 희열에 넘치는 얼굴을 보다.
5월 17일 서종원 중사 편에 고향에 소식을 전하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고향에서 농사지어 장만한 돈이 금방 없어질 것을 염려해 그 돈 모두를 가지고 부산으로 나갔다. 재봉틀을 사서 삯바느질을 하기 위함이었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나갈 때는 날씨가 괜찮았는데, 부산 국제시장에서 재봉틀을 사는 과정에서 차질이 있어 같이 간 두 분(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재직하였던 박선생의 어머님과 젊은 부인)과 헤어져 시장을 본 뒤에 늦게야 만나자고 한 부두엘 갔다. 그런데 파도가 일면서 바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고, 같이 온 두 분은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한 시간쯤 전에 창경호(?)라는 큰 여객선으로 먼저 떠났다.

어머니는 다른 배를 기다리면서 자갈치 시장에 머물러 있었는데, 뒤늦게 창운호라는 70톤급(?) 목선에 올라 재봉틀을 싣고 장승포 항을 향해 출발했다. 태풍이 몰려와 파도가 산같이 일어나는 가운데 창운호는 낙동강 하구로부터 바다로 흘러 내려오는 거대한 강물결에 크게 흔들리고, 태풍까지 겹치니 한 조각 나뭇잎처럼 금방 침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파도가 폭포수같이 몇 차례씩이나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와 배 밑바닥에 있던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난간과 계단을 붙들고 바닷물에 빠진 생쥐처럼 쫄딱 젖어 무서운 추위와 싸우면서 버티는데 그 와중에서 어머니는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장만한 재봉틀이 파도에 휩쓸려 갈까봐 계단에 무명 띠로 붙들어 매고, 어머니도 그 옆에 매달려 사투를 벌여 평소에는 4시간 정도면 갈 뱃길을 8시간이 넘게 표류하면서 버티다가 가까스로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인파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가운데 모두 울고불고 아우성인 사람 속을 어머니는 무사히 재봉틀을 지고 나와 아버지와 만났다. 안타깝게도 앞서 떠난 창경호는 수백 명이 넘는 승객과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아직까지 연락이 두절이고 남은 식구들이 부두에 나와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그 속에서 절망의 눈물을 흘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재봉틀을 지고 나오는 어머니를 만났다.

낙동강 하구는 지금도 큰 장마가 지면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하여 배가 이곳을 항해할 때는 항상 조심한다고 한다. 창경호 사건으로 살아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몇 대 독자라고 했다. 어머니와 부산에 같이 나갔던 두 분은 시체도 찾지 못했는데 박선생 어머니는 영영 시체를 찾지 못하였고 부인의 시체만은 멀리도 떨어진 부산 해운대 앞 바다에서 연락이 와서 찾았다.

배 안에서 난간을 붙들고 어찌나 애를 썼는지 고기들이 살을 뜯어 먹어서 그런지 양 팔목에 살은 없고 뼈만 앙상하였다고 하면서 박선생이 우리 집에 와서 방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던 생각이 난다. 이 창경호 사건도 피난민들의 애환으로 기록된 일이다. 거제도 연초면은 이 사건으로 또 한번 슬픔에 싸였다. 바느질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는 그 재봉틀로 우리 집 생계를 위해 삯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42. 명견 에쓰와의 만남

하루는 이웃에 사는 내 친구 명훈이의 아버지가 경북 안동으로 이사 간다면서 키우던 셰퍼드 새끼를 아버지더러 맡아달라고 해서 얻어 왔다. 미군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개였는데 생후 5개월쯤 된 강아지(수놈)였고 이름이 에쓰(S)라 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강아지를 선물했다. 자라면서 내 말을 잘 알아듣고 체구가 커 갈수록 용맹하기가 동네 일대에 소문이 났다. 그 후에도 여러 종류의 개를 키워 봤지만 에쓰처럼 똑똑하고 충성스러우며 용맹한 개는 보지 못했다. 평소에는 순하기가 이를 데 없으나 밤에는 학교 주변을 지키는 번견(番犬)으로서 과연 명견의 소리를 들을 만했다.

당시엔 집집마다 개를 풀어놓고 키워서 개들끼리 무리지어 다녔는데 그 중에서 에쓰는 대장노릇을 했다. 낯선 개가 우리 동네에 들어오면 다른 놈들은 꼬리를 내리거나 슬슬 피하는데 에쓰는 상대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어깨 위의 갈기를 세우면서 낯선 개에 서서히 접근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낯선 개들은 그 위세에 눌려 냄새를 맡거나 혀를 내밀어 핥아가며 복종을 표시하는데 그런 개들은 가만 놔두고, 덤비려는 의사를 표시하는 개들은 사정없이 공격했다. 빠르기가 전광석화 같았고 또 내가 그 옆에서 고함을 지르며 위세를 북돋아주기 때문에 지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동네에서는 당연 왕초 노릇을 했고 10여 마리의 개들을 거느리고 다녔다. 아버지가 피난 와서 처음 근무한 오비국민학교가 있는 오비리 마을에 다녀온다든지, 고향 소식을 전해 주던 한내리의 서종원 중사 아저씨 댁엘 갈 때면 반드시 에쓰를 데리고 다녔다.

간혹 집에 먼저 가라고 보내면 에쓰는 그 먼 길을 혼자 집으로 돌아갔고, 저녁 늦게 아버지와 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한밤중에도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동구 밖까지 나와 앞발을 가지런히 하고 떠억 버티고 앉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할머니는 전쟁 통의 머나먼 객지에서 당신 마음을 안정시키느라 그랬던지 나에게 이런 이야기도 해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잊어버릴 수 없는 함경도 행영에 살 때의 전 포수 이야기다.

전 포수는 1935년경 함경북도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전 포수가 살던 마을이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 행영면(行營面) 영리(營里)인데, 그 마을 53번지가 내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세종 때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 장군(일명 호랑대신)이 6진을 개척할 때 진영(오늘로 말하면 사령부)을 친 자리가 있었던 동네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곳에서 출생하였다는 자긍심이 지금까지도 대단한 편이다.

1941년 그곳에서 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거기서 살았으니 꽤 오래 산 곳이지만 나에게는 그때의 희미한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그 때의 일들은 대개 할머니와 부모님이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속에서였다. 단지 네 살 때부터 서너 가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정도인데, 다만 전 포수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여섯 살 가을쯤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나이 40이 다 될 때까지 할머니에게서 수도 없이 많이도 들은 이야기이고,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끔 들려 주셨고, 지금 생존해 계시는 기억력 좋기로 소문난 어머니의 경험담 이야기이니 이 일화는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간직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전 포수의 집은 영리(營里)의 우리 집으로부터 바로 한 집 건너에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 전 포수는 30세가 갓 넘었고 미모가 뛰어난 부인과 8살, 6살 난 두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특이한 것은 만주벌판에서 구해 왔다는 호개(胡犬)라는 새까만 색의 사냥견이 전 포수 가족과 한 방에서 침식을 같이한다는 것이었다.

그 호개의 크기를 말만 하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말씀하기를, 커다란 망아지 정도는 족히 된다고 했으니까 대략 짐작할 수가 있고, 그 집 아이들이나 어린 나를 등에 태울 정도였다고 하니 꽤나 큰 사냥개라고 짐작된다.

내가 태어나기 전, 전 포수 댁을 처음 알았을 당시 어머니는 갓 스물도 안 된 새색시였는데, 전 포수가 부인과 두 아들 앞에서 자기가 기르는 사냥개를 가리키면서, “이 개를 누가 달라고 하면, 내 아들애를 주면 주었지 개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또 섬뜩한 느낌마저 가졌었다고 하였다.

당시엔 어떻게나 그 개가 유명한지 함경북도 일대엔 전 포수만큼이나 호개 이야기가 널리 퍼져 대단한 이야깃거리였다고 한다. 표범, 곰, 멧돼지 등 맹수만 눈에 띄면 사생결단으로 용맹스럽게 대들어 해치우고, 노루나 토끼같이 약한 짐승이나 동네 개들을 보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순하디 순한 양과 같았다 하니 그 용맹성과 호개의 기질을 알 만하다.

이웃의 어린 내가 겁도 없이 호개를 붙잡고 털가죽을 잡아당기고 귀퉁이를 때려주어도 그저 눈만 끔벅거리며 양쪽 귀를 뒤로 젖히고 꼬리를 치는 순둥이였다고 한다.

전 포수는 마음이 아주 순하고 붙임성이 있고 또 사냥을 할 때면 비호같이 이산 저산을 치닫는데, 보통사람들은 따를 수 없는 지혜와 용력의 소유자라고 했다. 이름난 전 포수가 유명한 호개를 데리고 함경북도 북방 백두산 두만강 유역을 누비며 골짜기 휘파람 소리로 엄동설한의 쨍하는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모습은 지난날 우리의 옛 역사 속에서 이 지역에서 맹활약하던 선조들의 삶을 다시 한번 상상해 보게도 한다.

전 포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짐승과 날짐승의 이동경로와 그 짐승들의 특징들을 너무나 잘 알아 포수로서의 전문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한번 사냥을 나가면 사격술이 너무 정확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고, 사냥해 온 꿩이나 짐승들은 반드시 먼 지역일 때는 그 지역 사람들과 산짐승 고기를 같이 나누는 기쁨의 시간을 가졌고, 우리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여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웃뿐만 아니라 멀리 백두산 근처 주민들까지 전 포수 덕에 한 해 동안에도 몇 차례씩이나 호강을 하였다고 한다.

어느 해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때다. 호개가(개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마당으로 뛰어 나가려 해서 전 포수는 개가 오줌을 누려고 하는 줄 알고 문을 열어 주었다. 한참이 지나도 나갔던 개가 문 밖에서 기척을 내지 않아 이제나 들어오나 저제나 들어오나 하고 기다리다 선잠이 들었는데, 새벽녘에 잠을 깨어 보니 그때까지도 호개가 옆에 없었다.

전 포수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부리나케 사냥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와 두만강 중류 쪽으로 가는 상상봉 산 쪽으로 향해 새벽공기를 가르며 달려가면서 손가락을 입술에다 대고 휘파람 소리를 연달아 길게 빼며 호개를 불렀다. 산과 들 온 천지는 고요한 데다 호개가 뛰어가며 남긴 발자국마저도 새로 내린 눈으로 덮여 희미해지다가 없어지고, 호개가 짖어대는 기척은 사방 어디에서도 전혀 들을 수가 없어 초조한 마음으로 세 시간 가까이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 다녔다. 웬만하면 멀리서도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 컹컹대고 짖어대는데 그날은 도통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먼동이 터올 무렵, 저 멀리서 어렴풋이 호개가 짖어대는 소리가 컹컹 하고 났다. 전 포수는 소리 나는 쪽 방향으로 산 중턱까지 정신없이 달려 올라갔다. 마침내 눈앞에 호개의 모습이 들어왔다. 호개는 기세등등하게 큰 소리로 연신 사납게 짖어대면서 아름드리 소나무 주변을 뱅뱅 돌며 주인이 왔는데도 껑충 뛰어 오르면서 반기지도 않고 앞발로 땅을 긁으면서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며 계속 짖어댔다. 그리고는 주인을 보고 낑낑거리면서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고 번갈아가며 짖어댔다. 전 포수가 그때 호개를 보니 얼굴은 온통 퉁퉁 부어 눈을 가릴 정도였고, 어깨며 옆구리 할 것 없이 흘린 피가 낭자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나무 밑동 주변을 양 앞발로 팠는지 실히 한 자 정도는 빙 둘러 패여 있을 정도였고, 고목나무 꼭대기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나무 저 높은 끝 쪽 큰 가지에 눈빛이 새파란 표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숨어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포수는 신속하게 표범을 겨냥하였고, 단 한 방에 표범은 아래로 털썩 하고 떨어지는 순간 호개는 사정없이 달려들어 표범의 목덜미를 물고 한참 흔들어대자 드디어 표범은 숨이 끊어졌다.

상황 추리는 이러했다. 산속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한 표범이 야밤에 동네로 내려와 가축을 잡아먹으려 했다. 마침 전 포수의 집 앞에서 방안에 있는 호개의 감각에 들켜 도망을 치게 되었다. 끈질기게 쫓아간 호개가 표범에게 덤벼들어 몇 차례 싸움이 붙었는데, 오히려 표범이 호개를 당해내지 못하고 기진해서 도망치다가 마침내는 산중턱 나무 꼭대기 높은 곳으로 도망쳐 올라갔다. 기세등등한 전 포수의 사냥개 호개는 나무를 쓰러뜨려 표범을 떨어뜨리려고 기세 좋게 마구 밑동을 파가며 새벽이 되도록 밑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지키면서 망을 보던 중에 전 포수가 달려온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개들은 주인이 곁에 있을 때 더욱 사납고 주인의 위세를 앞세워 용맹을 떨치는데, 호개는 달랐다고 한다.

전 포수는 잡은 표범을 마을까지 옮겨 왔는데, 그 표범의 등 위에 태어난 지 백 일 된 나의 형을 앉히고 어머니가 양손으로 붙들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 한 번은 어느 늦가을, 호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도중 커다란 곰을 만났다. 전 포수의 사냥 순서는 호개가 먼저 곰이나 멧돼지와 싸우다 휘파람을 길게 불면 싸우던 호개가 옆으로 비켜서서 도망치듯 거리를 띄어 놓으면 전 포수는 전광석화같이 총으로 맹수를 사격하고 쓰러지는 맹수를 확인하는 즉시 뒤따라 다시 호개가 달려들어 맹수의 목덜미를 물고 한참 흔들어대면 사냥은 끝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호개가 전 포수의 사격과 거의 동시에 곰에게 달려들다가 총알이 곰의 가슴께를 스치고 그 옆 호개의 어께를 거의 동시에 관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호개를 살펴보아도 가늘게 숨만 내쉴 뿐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당황한 전 포수는 정신이 없어 직감적으로 호개가 죽어 간다고 판단했다. 호개는 마침내 눈까지 감았고 전 포수는 너무 슬프고 절망하여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총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내려왔는데, 자신도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도 몰랐다고 하였다. 집으로 와 대성통곡을 하니 온 가족이 같이 울고 하여 영리 사람들이 마치 사람이 세상 떠났을 때처럼 술렁댔다고 한다.

밤새도록 통곡한 다음날 아침, 전 포수는 쟁기를 가지고 이웃들과 함께 호개를 세상 떠난 사람 염하듯이 삼베 필까지 준비 하고 장례를 치르러 산으로 올라가는데, 일행이 보니 저 멀리서 팔을 내저으며 황급히 걸어오는 한 노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 포수가 사냥을 오갈 때마다 들렀다 쉬어 가는 주막집 주인이었다.

노인은 화급하게 전 포수를 향해 “아, 이 사람아! 자네가 정신이 있는가? 그래 그렇게 아픈 호개를 놔두고 어딜 갔다 오는가?” 하고 책망하면서 말을 잇는데, 노인이 한밤중에 주막 밖에 이상한 기척이 있어 나가 보니 평소 잘 알고 있는 호개가 거의 쓰러지듯이 낑낑대면서 주막으로 기어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주막 주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호개를 따뜻한 물로 씻기고 고약을 발라 주고 물도 먹여 주며 밤새도록 간호하다 날이 밝아서야 전 포수 집으로 급히 내려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든 전 포수는 쏜살같이 앞서 달려가 보니, 호개는 주막집 안방 아랫목에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주인이 온 것을 알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반갑다고 간신히 꼬리만 흔드는 호개를 보고 전 포수는 너무 감격하여 와락 달려들어 호개를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호개는 고통 속에서도 낑낑거리며 주인 얼굴을 힘없이 핥으면서 반가워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뒷날 전 포수가 이때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흥분하곤 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기쁘기는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 뒤 호개는 다 나았지만 앞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렸다. 전 포수는 호개가 다시 다칠까 안쓰러워 사냥개 조수격인 작은 호개만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울어대는 바람에 얼마 뒤엔 그 호개도 예전처럼 데리고 다녔고 호개는 예전보다 더 용감하게 앞장서서 사냥을 한다고 자랑을 하였다고 했다.(계속)

43. 할머니의 발병과 동생 선심이의 사망

아버지를 따라 본토박이들의 집에 자주 가 보았는데 대부분 아래 위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우연히 부엌을 지나쳤는데 부엌의 천정에 시커먼 그을음이 붙어 기다랗게 거미줄 늘어지듯이 늘어져 있었다. 불을 때면 아궁이의 연기가 장독대 뒤뜰로 나가는데 문 바로 옆에 굴뚝이 만들어져 있어서 연기가 부엌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의 눈에도 집 구조가 이상해 보였다.

내 고향집의 구조는 부엌에서 불을 때면 그 화기가 안방 윗방 등의 구들장을 모두 통과하고 집 뒤쪽 끝에 있는 높다란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게 되어 있는데 내가 본 몇몇 본토박이 집은 고향 집들과 달랐다. 그러니 흰옷이 금방 검게 되기 마련이다.

손님이 왔다고 사발에 누르스름한 쌀을 가득 담아 내놓고 먹으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 쌀을 손으로 한 움큼 집어 먹는데 나는 좀 이상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어서 맛보라고 해서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쌀이 구수한 것이 맛이 괜찮았다. 그 쌀을 ‘찐쌀’이라 불렀는데 가을에 햅쌀을 특별히 쪄서 저장해 두고 육지 사람들이 손님에게 과일이나 다과를 대접하듯이 찐쌀로 대접한다고 했다.

한번은 죽토리 다리께에서 본토박이와 피난 내려온 어른 두 사람이 싸움을 했는데, 그 옆에 있던 본토박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야단이 났다고 하면서 동네방네 떠들며 외쳐대기를,

“야! 저기 사람과 피난민이 싸우고 있다!”하고 말했다. 이 말이 삽시간에 연초 면에 퍼져 피난민들이 모두 분개했었다. 우리 학교에도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려운 풍상을 겪어 사나워진 피난민 아이들이 그 말에 격분하여 얌전한 본토박이 아이들을 여기저기에서 이유 없이 패주는 바람에 학교 선생들은 비상이 걸렸고 한동안 연초 면 어른들이 긴장했던 적도 있었다. 이 소문이 거제도 전체에 퍼지고 육지까지 알려져서 ‘사람과 피난민이 싸우고 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은 한동안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다.

1953년 5월 25일 우리 집에는 너무도 큰 일이 벌어졌다. 앞에서 아버님의 일기에 잠깐 나왔지만, 할머니가 정신을 놓은 것이다. 가족 상봉의 기쁨은 잠시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형상이었다. 할머니는 순간 기절한 것이 아니고 혼이 빠진 것이었다. 전쟁 와중에 할머니는 가는 데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가리키면서. “얘를 제 부모의 손에 쥐어 놓으면 누가 당장 그 자리에서 죽으라면 당장 꼬꾸라져 기꺼이 죽겠다” 하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내내 애절하게 말해 왔었다. 할머니의 소원이 이루어지니까 모든 긴장이 풀어졌기 때문이리라! 온 가족의 놀람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애통함은 너무나 애절해서 매일 눈물로 지냈다. 학교에서 틈만 나면 집으로 달려와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간호하다가 수업종이 울리면 교실로 분주히 달려갔다.

할머니는 그간 온 가족을 만나 기쁨에 넘쳤으나 차차 말이 줄어들더니 갑자기 식기를 집어 내던지며 고함을 지르고, 걷잡을 수도 제지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머니는 그동안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한 많은 난리 통의 답답한 원한들이 가슴에 꽉 차서 풀어져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학교도 가기 싫고 할머니 옆에서 울기만 했다. 우리 가족은 너무 놀라고 슬퍼서 울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의 아버지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월 25일 오호! 저주로운 오늘이여, 태산같이 믿어온 어머님 병이 발생.
일주간 천막교회 부흥회 철야기도에 다니시더니 오늘 뜻 아닌 발병.

오후 5시 내내 소란.
의사를 불러 진단결과 광증(狂症)이라 하였다.
철야 간호하다. 점점 더하다.
오후 4시 목사 집사들 4명 내가(來家). 맥박은 정상. 체온은 36.7도, 기도로써 안정되지 않음.
조금도 차도 없으매 자식들 속 애달파라.

5월 31일, 병세 여전. 의사와 상의하고, 교회 만류도 무릅쓰고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 옴.
6월 1일, 덕도리 한의사 김성헌씨를 모셔와 치료.
6월 14일, 저녁부터 차도가 있는 듯하였으나 새로운 징후가 나타남.
6월 15일, 휴전 반대 면민 궐기대회 개최. 어머님의 소란으로 의사치료를 일시 중지.
6월 16일, 1학기 중간고사 시작 각 학급을 통하여 엄격히 감독키로 함. 금일부터 농구대 제작착수. 모친 병은 여전.
6월 18일, 중간고사 완료 채점시작. 오늘 오후 6시부터 어머님 병이 돌아섰다(2시간 동안). 반공포로 석방.
6월 25일, 6ㆍ25 3주년을 북진통일 대회로 체육대회 출전. 선수단 훈련.
오늘부터 어머님 병환이 덜하는 것 같다. 기쁜 일이다.
7월 3일, 어머님 병이 쾌차 일로, 희열.
7월 10일, 어머님의 병은 완쾌하시다. 아! 기막힌 1개월의 가환(家患)이여.
7월 26일, 덕도리 김성헌 한의를 찾아 모친 병 치료에 사례. 병 치료 완료.
선화 발열. 찬수와 함께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나 몰래 갔구나.
7월 27일, 휴전 조인 성립. 한국 남북통일 없는 휴전을 나는 반대한다. 국가 민족을 위하여 슬픈 일이다.
8월 12일, 가아(家兒) 선심이가 치명적 부상. 인근가의 이씨 댁 여자아이가 몰래 업고 돌아다니다가 넘어져 두부(頭部)를 크게 상함. 뇌가 상하고…… 오호 기막힌 노릇이다. 조모와 어미가 타아(다른 집 아이)에게는 잠시간 손 못 대게 하던 선심이를 자는 사이 몰래 훔쳐 업고 다니다가 치명상을 당하다니 제 딴엔 귀여워한 일이지만…….
9월 15일, 선심 병 악화.
9월 19일, 찬수 부상(얼굴).
9월 20일, 선희 부상(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어깨, 가슴).
오호! 금년은 왜 이다지도 가환(家患)으로 연속 불상사인고. 불행한 해여.
9월 28일, 흉통으로 쓰러짐.
9월 29일, 병세 여전, 사지(死地)로 갈 것만 같구나.
9월 30일, 선심 사망.
불행한 선심이는 기어이 가는구나!
너무도 기막힌 주검. 병으로 죽어도 한이 되는데 타인에 의한 부상으로 최후의 숨을 거두다니! 가상(加傷)한 아이나 그 가족에는 일체 불쾌한 말 아니했으나 천추의 한이 될 일임은 사실. 인생인 고로 병후 어머니의 비통해 하시는 것 자식으로 차마 못 볼 일 위로해 드리다. 오호 통재라 선심이의 죽음.
10월 1일, 시무식 거행 가을바람과 함께 심사 종일 쓸쓸.
중략.
1954년 1월 25일, 개학식 거행.

할머니의 발병과 쾌유 그리고 거제도 연초 면에서 태어난 내 귀여운 동생 선심이의 갑작스런 부상과 사망으로 6․25 동란 전화와 더불어 이후 엄청난 가족의 액운은 내 부모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포기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6․25 동란 후 거제도에서 사랑하는 나의 두 여동생 선영이는 태어난 지 3주만에, 선심이는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다쳐 한 달 넘게 앓다가 6개월 남짓 살다가 하느님 나라로 가고 말았다.

선심이가 나를 보고 평화롭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온 가족의 상심과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상심은 너무 심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의지는 남달랐다. 피난민 중학교 학생 교육에 온 몸을 투신하여 전란 중 고통 받는 2세 교육에 쏟아 붓는 열정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기 시작하였다. (계속)

44. 한 많은 내 할머니의 애환(哀歡)

한 달 만에 다시 병환이 완쾌된 할머니는 점차로 밖의 출입도 종전과 같았다. 병환이 나았다지만 그런데 또 들이닥친 손녀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깊은 상심에 젖어 어머니와 온 가족들과 함께 슬픔 안에서 버티며 지냈다. 나의 할머니의 모든 생애는 이때까지의 이 땅 모든 어머니들의 애환이라 생각한다.

할머니는 구룡령 아래 미천골 부근의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라는 곳에서 평창 이씨 가문의 맏딸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70리 떨어진 강현 면 복골에 사는 마마로 박박 얽은 나의 할아버지와 혼인했는데 남설악 산골의 삶은 그대로 강현의 농촌으로 이어져 찢어질 듯이 가난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착하고 부지런하게 노력하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는 생활신조 속에 4대가 사는 집의 며느리가 되어 우리 가문에 그 강인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지금까지도 항상 4대가 북적거리고 산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품에 안고 항상, “너의 할아버지는 박박 얽었고 일자무식이었지만 심성이 착하고 행실이 곧고 부지런하며 농사짓는 데 동네에서 가장 치밀하고 신의와 형제 일가 친척간의 우애가 남다른 분이었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는 강현 면 정암리에서 온 동네 사람들이 신작로를 닦을 때에도 제일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한 해엔 작은댁 어린 아재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 솔 검불을 가지고 장난하다가 불이 아궁이 밖의 솔 검불로 옮아 붙는 바람에 온 집이 다 타고 어린 아재까지 생명을 잃는 큰 슬픔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실의에 찬 동생을 달래느라고 그 해 겨울 내내 함경도에 가서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해 후하게 받은 품삯을 모아 두었다가 그 돈 모두를 동생의 새 집 짓는 몫으로 주기도 했다.

할머니는 농사를 지으면서 7남매를 출산했으나 6남매를 홍역 등 유행병으로 잃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에 기르기에도 남달리 뛰어나서 고을 일대에서도 항상 으뜸이었는데 한 해는 양양군 누에고치 품평회 심사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출한 누에고치가 상등(上等)으로 뽑혔는데, 군에서 상품을 준다고 인적사항을 적어내라고 했다. 글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글 잘하는 동년배의 집안 친척 조카 되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는데 아저씨 집은 가세가 부유해서 집안 모두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할아버지 이름을 써 넣을 자리에 그 아저씨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아 정작 상을 탈 때엔 누에고치를 잘 키우지 못해 등급에도 오르지 못한 그 아저씨가 상을 타는 일이 발생했다. 상등 상품은 자명종시계, 한란계(온도계), 그리고 뽕나무 전지가위였다. 당시엔 어마어마한 상품이었다. 요새 말로 하면 남의 이름을 도용해 자기가 타먹는 문서 위조를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하여서 분해 하는 할머니를 위로하면서 “다 무식한 탓이니 어찌 하겠나”라고 한탄했다.

공부는 많이 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이 봉사하라고 배웠을 터인데 공부 좀 했다고 그것도 친척 아저씨인 내 할아버지의 몫을 가로챈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집 위세에 눌려 모두 함구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 때 일곱 살이었는데 그 집에 들를 때마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어머니 저기 있는 자명종 시계와 한란계는 우리 것이니 가져가요!”하고 울며 몇 년간 떼를 썼다. 나의 할머니는 무식이 억울하여 속으로 울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되돌아오곤 했다. 할아버지 상품을 가로채 대신 타간 아저씨가 미안했는지 나중에 뽕나무 전지가위만 할아버지 몫이라고 어물거리며 줘서 할아버지는 뒷말 날까 하여 거절 못하고 마지못해 그 가위만 받아 왔다. 지금으로부터 84년 전 일이다.

할머니는 그 가위를 보거나 사용할 때마다 가위에 얽힌 이야기를 반드시 나에게 해주었다. 할머니는 피난통에도 그 가위를 항상 지녔고 나중에 부산에 나온 뒤 서울로 이사할 1961년까지 보관했다. 하잘 것 없는 뽕나무 가위 하나지만 할머니가 대포에서 가마니를 짜다가 숯불 가스에 중독되어 일찍 돌아간 남편을 어떻게 그리워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원예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도와 항상 그 가위를 자주 사용했다. 나는 그 가위를 쥘 때마다 가위 속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렸다.

“두고 보자! 공부 못한 일자무식의 할아버지를 모욕 준 그 못된 집구석! 나는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무슨 한풀이를 대단히 할 것도 아닌데, 그저 쓴웃음만 나온다.

할머니의 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이후엔 평생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 하나의 태풍은 이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어려운 피난살이, 굶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하는 그 시절에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성은 지금도 우리 자식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어머니의 삯바느질 솜씨는 온 동네에 소문이 났는데 바느질 삯으로 과자나 쌀이나 과일 등 맛있는 것을 푸짐하게 가지고 오면 할머니보다 우리가 먼저 기웃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우선 할머니의 의중이 어떠한지 여쭈어 보고 할머니가 허락하면 그 후에야 우리 몫으로 돌아오곤 했다.(계속)

45. 아버지의 가정교육

나는 태어나 14개월 만에 연년생인 남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할머니 차지가 되어 그때부터 할머니 앞에서 응석만 부리고 위함만 받았다. 12살 때 부모님과 거제도에서 상봉한 뒤에 비로소 어른들이 할머니를 어떻게 모시는지, 즉 어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매일 보고 배우게 되었다. 함께 모여 사는 가정의 분위기를 체험한 것이다.

아버지는 할머니 앞에서 당신이 어른인데도 나와 같은 어린 모습으로 뵈었다. 매일 아침 코앞에 닿을 만한 거리의 교무실로 출근할 때에도 반드시 “어머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저녁때에도 돌아올 때는 “어머님 잘 다녀왔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셨습니까?” 하였다. 할머니가 아니 된다 하면 될 만한 일도 당장 그만두었다. 아주 철저했다.

나도 지금까지 집 앞 문방구에 잠시 나갔다 올 때에도 아버지 생전에 할머니를 대하던 모습으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아내가 처음엔 너무 그렇게 하니까 좀 가끔 인사드리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더니만 이제는 온 가족이 습관이 되어 어른께 인사드리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하다. 이것이 아버지가 남긴 우리 가정의 전통이다.

피난민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학교의 학생 수도 늘어났다. 연초 중학교도 교사(校舍)가 모자라서 사택 뒤로 신축을 했다. 황토 진흙을 운동장에 산같이 쌓아놓고 볏짚을 작두로 ‘쑹덩 쑹덩’ 썰어 황토 흙과 섞어서 흙벽돌을 만들었다. 교장인 아버지가 바지를 걷어붙이고 온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물을 뿌리며 밟은 황토 흙을 되게 뭉쳐서 늘어진 새-끼줄에 안팎으로 붙이면서 교실 벽을 세웠다. 이렇게 학교 건물을 만들었다.

나도 일요일이면 아버지와 같이 나가 미끈덕거리는 황토 진흙에 섞인 볏짚을 맨발로 많이도 밟았는데 발바닥이 물에 풀리는 짚과 황토 진흙에 닿아 간질간질하던 기억이 난다. 교사를 다 지은 뒤 방과 후면 교사 안에서 아버지와 탁구를 치곤 했는데 이때의 연습 덕분인지 나이가 많이 든 뒤에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사 탁구대회를 개최하면 가끔 우승을 한 적이 있다.

교사(校舍)가 부족하기는 내가 다니던 연초 국민학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피난민의 증가로 인해 학생 수는 늘어나고 교실은 모자라서 본관 동쪽 빈터에 임시 교실로 텐트를 높다랗게 치고 그 안에서 공부를 했다. 땅바닥에 각자의 깔개를 준비하고 엎드려 필기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비만 오면 낭패였다. 밖으로 흐르는 물이 텐트 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와 빗물이 고이는데 몽당연필로 땅을 파고, 실오라기처럼 물이 흘러나가도록 작은 도랑(?)을 내어 옆 아이를 놀래어 주려고 친구와 엎드려 장난을 치며 킥킥대던 생각도 난다.

46. 절약정신

그때엔 모든 물자가 부족했었다. 몽당연필도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될 때까지 가느다란 대나무를 연필 길이만큼 자른 뒤 대나무 구멍에 끼워 나머지 몽당연필을 사용했다. 모두 원조물자였다. 공책도 미군부대에서 쓰레기 처리장에다가 버린 종이들을 다시 정리하여 골라 가져와 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용했다. 한쪽 면은 인쇄된 면이고 다른 빈 면만을 사용했다. 종이의 질은 아주 좋았다. 그 공책에 글씨가 깨알같이 빼곡하게 씌어져 있어야 아주 잘 사용했다고 칭찬을 받았고, 좀 듬성듬성하게 칸을 많이 남기고 다음 면으로 넘어가면 어른들께 물건 아낄 줄 모른다고 크게 지적을 받았다. 모든 공책은 철끈으로 꿰매서 사용하였다.

저녁에 숙제를 할 때에도 호야 등불을 사용했다. 석유등인데 석유 심지를 얇은 유리 호롱으로 가려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을 이웃에서 자칫 잘못하여 호야 등이 엎어져 화재가 나서 한 밤중에 집을 태우는 사례가 너무도 많았다. 주먹이 작은 우리들이 유리로 된 갓을 맑게 닦아야 되는데 깨지기가 일쑤여서 어른들께 꾸중도 가끔 들었다. 얼마 뒤 나는 호야를 깨끗이 닦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가 되었다.

요즈음 들은 이야기이다. 누가 아들에게 6ㆍ25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 배가 고파 혼났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 참 딱하기도 하셨네요. 잠깐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을 사다가 물을 끓인 뒤 얼른 라면을 넣어 3분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그때 사람들은 이상하네요?” 하더란 것이다. 일부러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물건이 지금처럼 흔한 줄 알고 그때 어른들은 게으르다는 투의 이야기이다. 6ㆍ25가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시대가 이렇게 모든 것을 바보로 만들어 덮어 두려나? 우스갯소리로 그냥 넘어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 동네는 연초중학교 옆인데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살았다. 4살쯤 더 먹은 농아 형도 살았는데 그 형이 우리들의 대장이었다. 그 형은 성격이 아주 서글서글하고 용감하여 우리 모두가 좋아했다. 친구들이 모여 그 형을 빙 둘러싸고 그 형처럼 떠들어대며 수화도 곧 잘하며 의사소통을 하였다. 집집마다 기르는 개들을 데리고 연사 앞 논둑길을 신나게 달리면서 뛰어다녔다. 잠시이지만 이때가 너무도 신나는 때였다.

같이 모여서 노는 것 이외에 아주 아슬아슬한 일도 있었다.고현 미군부대에서 쓰레기를 싣고 MP 다리 쪽으로부터 오는 트럭을 멀리서 보면 대장 형은 연초중학교 운동장 뚝 위에 대기하다가 트럭이 아래로 지나갈 때 서부활극에서 카우보이가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듯이 트럭 뒤로 재빠르게 타고 올랐다.

쓰레기 중 형의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조건 차 밖 뒤쪽으로 내던졌고 키가 작은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길바닥에 내던져진 물건들을 집어와 한쪽 구석에 모아 놓았다. 요새로 말하면 대형 마트 같은 곳에 지천으로 있는 포장용 종이박스 같은 것들과 미군부대에서 쓰다 버리는 잡동사니 쓰레기들인 것이다.

어른들이 시킨 일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 아이들은 그렇게 영악(?)하였다. 아주 좋은 물건도 있고 잡지책도 있었다. 연초 초등학교 쪽으로 차가 멀리 가면 그때서야 형이 내려와 모아둔 물건들을 나누어주었는데 우리는 형이 주는 대로 배급(?)을 받아 집으로 가져갔다.

한번은 내가 종이 박스 하나를 배당받았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그 물건을 낮에 떨어진 곳에 직접 가져다 놓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아이들처럼 따라 하지 말라고 엄히 타일러 주었다. 그 이후엔 나는 형들과 같이 놀다가도 “쓰레기차가 온다!”라고 누가 고함을 치면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였다.

한번은 참다못한 미군들이 차를 세우고 내려와 친구들을 모두 오라고 해서 다 모이게 하고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면서 한참 손짓을 하더니만 우리 친구들을 한길 옆에서 한참 동안 손을 들고 벌을 받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농아 형이 우리 친구들을 데리고 쓰레기차에 대드는 일은 막무가내로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 후 쓰레기 처리장 주인이 이 사실을 알고 우리 동네에 항의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어 그 위험한 짓은 중단되었다.

우리 집에 무시무시한 일도 생겼다. 어느 날 밤, 온 식구가 곤히 자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없는 살림에 옷가지 몇 개밖에 없는 것을 몽땅 집어 갔다. 모두들 말도 못하고 놀란 가슴을 쉬쉬하면서 진정한 일도 있었다.

거제도에는 옥씨 성을 쓰는 주민들이 아주 많았다.

5학년 우리 담임선생님도 옥근석 선생님이고 월남 교사인 아버지에게 대한민국 첫 부임지로 많은 도움을 준 오비 초등학교 교장 선생 이름도 옥치상씨이다. 거제도는 옥씨 집성 지역인 것 같았다. 들은 말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뒤 왕씨 왕족이 모두 거제도로 피난을 가서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는데 그때 임금 왕자 오른 쪽 아래에 점 하나를 찍어 구슬 옥자를 성씨로 하여 행세하며 은둔하여 산 곳이라고 했다.(계속)

47. 가고파

거제도의 바닷가 마을이나 뒷산에 가면 내 고향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았다. 겨울에도 내 고향처럼 춥지를 않았고 눈이 내리는 것을 거의 보지를 못하였다. 양양 속초 등 영동 해안 중부지방엔 음력설 가까이서부터 보름 넘기까지 함박눈이 참으로 많이도 온다. 1951년 1ㆍ4 후퇴 뒤에 우리 고향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왔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거제도에도 안 오던 눈이 너무나 많이 와서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피난민들이 이북에서 폭설까지 몰아 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의 고향은 그맘때가 되면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어떤 때는 밤낮 3일씩 눈이 내려 마을 사람들이 대포 항 바닷가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줄기차게 내리는 눈에 홀려 멀미도 나고 또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인명사고가 난 일도 있다고 어른들이 말하였다.

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 산짐승들이 마을로 일시에 무리지어 몰려 내려올 때도 있었다 하였다. 어떤 때는 동네끼리 서로 연락도 되지 않고 이웃집과 가래나 삽으로 쌓인 눈을 치우고 이동 참호 같은 기다란 길을 내야만 이웃끼리 서로 다닐 수가 있었는데 그 곳 남쪽지방은 참으로 기후가 많이도 달랐다.

겨울인데도 얼지 않고 잎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추울 때 꽃이 피는데 동백꽃이라 했다. 나는 그 동백의 홑겹으로 된 동백꽃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봄이 지나면 우리학교 운동장 끝엔 치자나무로 울타리를 했는데 치자 꽃이 필 때면 하얀 꽃의 향기가 너무 좋아 친구들 모두는 가까이 가서 자주 그 냄새를 맡았다.

학급엔 한 교실에 형과 아우가 같은 학년인 경우도 있었고 한 학급인데도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형들에게도 한 학년이라고 반말 짓거리를 하였고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터놓고 철없이 지냈다. 형이나 누나를 한 학급에 둔 아이들은 형과 누나가 항상 동생을 지켜 주기 때문에 제일 안전하였다. 선생이 나와서 산수 문제를 풀라 했는데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형이 풀지를 못하여 절절매며 얼굴이 벌겋게 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애를 장난꾸러기들 몇이 골탕을 먹였는데 그 친구가 형에게 일러 놀린 아이들이 모두 학교 뒤 으슥한 곳으로 불려가서 주먹으로 얻어맞고 아주 혼쭐이 난 때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매 맞은 아이의 누나가 교실 안에서 때린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 이유를 안 담임선생이 때린 개구쟁이를 교실 앞 구석에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 종일 손들고 서 있게도 하였다. 난리 통이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우리들은 가끔 마을 극장에도 갔었다. 그 극장에는 흑백 무성 영화만 상영하였다. 영화 상영을 하면 남자 변사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육성으로 영화를 엮어 가는데 아주 멋이 있었다. 출연 배우 남녀노소의 목소리를 혼자 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여자의 목소리나 아이들의 목소리를 낼 때엔 어울리지도 않았으나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내가 젊은 시절 직장 회식 자리에서 그 변사의 능숙한 목소리를 한참 흉내 내어 좌중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도 있었다. 그 변사는 연초 면에서 인기가 있는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일 정도였다. 우리들은 변사가 거리를 지나가거나 변사가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에서 쪽대로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때면 아주 훌륭하고 높은 분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김영희 라는 여자애가 인기가 있었다. 고생스럽게 가난 끼가 가득한 피난민답지 않게 얼굴이 귀티가 나고 뽀얗게 예뻤었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온 국방색으로 된 우리 모두가 부러워한 아주 좋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 아이가 입어서인지 아주 돋보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별명이 ‘사지즈봉(서지즈봉)’이라 하였다. 천이 사지(?)로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지즈봉은 노래를 잘 불렀다. 특히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시조이고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 민족의 가곡「가고파」를 너무도 아름답게 아주 잘 불렀다.

그 애가 부르는 노래는 온 교실에 울렸고 교실 밖 교정으로도 넓게 저 멀리로 울려 퍼졌다. 이 노래만 불렀다 하면 어린 우리들이지만 교실 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들이 마구 뛰어 놀았던 북녘의 그리운 고향의 동산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어느덧 우리들도 따라 불렀다. 이 곡이 단연 최고의 노래였고 김영희는 우리 반 최고의 가수였다. 피난시절 학교뿐만 아니고 거제도 전체에서 랭킹 1위 곡이 바로 우리 가곡「가고파」였다. 내가 결혼 초기에 가고파 이야기와 그 예쁜 사지 즈봉에 대하여 아내에게 열심히 열을 내어 그 때의 일을 말하였는데, 내 아내는 시큰둥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기사입력: 2011/06/18 [10:20]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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