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수선생 전쟁회고: 내가 겪은 6.25(6)
생생한 6.25 경험기
 
화곡 김찬수 선생
[편집자 주: '내가 겪은 6.25'를 6월 25일 전까지 연재합니다. 올인코리아의 회원이신 화곡 김찬수는 도서출판 명문당으로부터 이 글의 게재를 허락 얻었다고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은 32년 교직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교감으로 명퇴하시고, 수필가로 활동하시고, 시인이며 농업인이기도 합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며, 강원도의 좌경적 신부들과 투쟁하는 애국적 천주교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김찬수 선생님의 연락처는 <alex223@hanmail.net>입니다.]
 


47. 가고파

거제도의 바닷가 마을이나 뒷산에 가면 내 고향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아름다운 꽃나무가 많았다. 겨울에도 내 고향처럼 춥지를 않았고 눈이 내리는 것을 거의 보지를 못하였다. 양양 속초 등 영동 해안 중부지방엔 음력설 가까이서부터 보름 넘기까지 함박눈이 참으로 많이도 온다. 1951년 1ㆍ4 후퇴 뒤에 우리 고향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왔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거제도에도 안 오던 눈이 너무나 많이 와서 원주민들이 말하기를 “피난민들이 이북에서 폭설까지 몰아 가지고 왔다”고 했다. 나의 고향은 그맘때가 되면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어떤 때는 밤낮 3일씩 눈이 내려 마을 사람들이 대포 항 바닷가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줄기차게 내리는 눈에 홀려 멀미도 나고 또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진 인명사고가 난 일도 있다고 어른들이 말하였다.

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 산짐승들이 마을로 일시에 무리지어 몰려 내려올 때도 있었다 하였다. 어떤 때는 동네끼리 서로 연락도 되지 않고 이웃집과 가래나 삽으로 쌓인 눈을 치우고 이동 참호 같은 기다란 길을 내야만 이웃끼리 서로 다닐 수가 있었는데 그 곳 남쪽지방은 참으로 기후가 많이도 달랐다.

겨울인데도 얼지 않고 잎이 반짝반짝 윤이 나고 추울 때 꽃이 피는데 동백꽃이라 했다. 나는 그 동백의 홑겹으로 된 동백꽃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봄이 지나면 우리학교 운동장 끝엔 치자나무로 울타리를 했는데 치자 꽃이 필 때면 하얀 꽃의 향기가 너무 좋아 친구들 모두는 가까이 가서 자주 그 냄새를 맡았다.

학급엔 한 교실에 형과 아우가 같은 학년인 경우도 있었고 한 학급인데도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형들에게도 한 학년이라고 반말 짓거리를 하였고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터놓고 철없이 지냈다. 형이나 누나를 한 학급에 둔 아이들은 형과 누나가 항상 동생을 지켜 주기 때문에 제일 안전하였다. 선생이 나와서 산수 문제를 풀라 했는데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형이 풀지를 못하여 절절매며 얼굴이 벌겋게 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애를 장난꾸러기들 몇이 골탕을 먹였는데 그 친구가 형에게 일러 놀린 아이들이 모두 학교 뒤 으슥한 곳으로 불려가서 주먹으로 얻어맞고 아주 혼쭐이 난 때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매 맞은 아이의 누나가 교실 안에서 때린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쳐 이유를 안 담임선생이 때린 개구쟁이를 교실 앞 구석에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하루 종일 손들고 서 있게도 하였다. 난리 통이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우리들은 가끔 마을 극장에도 갔었다. 그 극장에는 흑백 무성 영화만 상영하였다. 영화 상영을 하면 남자 변사가 직접 해설하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육성으로 영화를 엮어 가는데 아주 멋이 있었다. 출연 배우 남녀노소의 목소리를 혼자 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여자의 목소리나 아이들의 목소리를 낼 때엔 어울리지도 않았으나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내가 젊은 시절 직장 회식 자리에서 그 변사의 능숙한 목소리를 한참 흉내 내어 좌중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도 있었다. 그 변사는 연초 면에서 인기가 있는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일 정도였다. 우리들은 변사가 거리를 지나가거나 변사가 친구들과 어울려 개울가에서 쪽대로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때면 아주 훌륭하고 높은 분을 존경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다.

우리 반에는 김영희 라는 여자애가 인기가 있었다. 고생스럽게 가난 끼가 가득한 피난민답지 않게 얼굴이 귀티가 나고 뽀얗게 예뻤었는데 미군부대에서 나온 국방색으로 된 우리 모두가 부러워한 아주 좋은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 아이가 입어서인지 아주 돋보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별명이 ‘사지즈봉(서지즈봉)’이라 하였다. 천이 사지(?)로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사지즈봉은 노래를 잘 불렀다. 특히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시조이고 김동진 선생이 곡을 붙인 우리 민족의 가곡「가고파」를 너무도 아름답게 아주 잘 불렀다.

그 애가 부르는 노래는 온 교실에 울렸고 교실 밖 교정으로도 넓게 저 멀리로 울려 퍼졌다. 이 노래만 불렀다 하면 어린 우리들이지만 교실 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우리들이 마구 뛰어 놀았던 북녘의 그리운 고향의 동산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어느덧 우리들도 따라 불렀다. 이 곡이 단연 최고의 노래였고 김영희는 우리 반 최고의 가수였다. 피난시절 학교뿐만 아니고 거제도 전체에서 랭킹 1위 곡이 바로 우리 가곡「가고파」였다. 내가 결혼 초기에 가고파 이야기와 그 예쁜 사지 즈봉에 대하여 아내에게 열심히 열을 내어 그 때의 일을 말하였는데, 내 아내는 시큰둥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49. 친구 영희 언니의 애절한 이야기

영희에겐 바로 위로 연초 중학교에 다니는 영회라는 오빠가 있었고 그 위에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의 이름은 김영옥이다. 피난시절 나의 부모와 장승포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그 누나는 거제도 피난민 중에서 제일 미인이라 했다. 누나가 거리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넋을 잃고 뒤돌아 멀리 갈 때까지 몇 차례씩이나 다시 쳐다본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북에서 결혼을 하였고 남편이 인민군 장교로 전쟁터로 나갔는데 인편으로 남편이 남쪽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했다. 1ㆍ4 후퇴 때 피난을 나와 눈물로 남편을 그리다가 놀랍게도 남편이 거제 고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있다는 기쁜 소식에 깜짝 놀라 달려가 보았다. 인민군 장교인 남편은 포로 신분이었다. 영옥 누나는 고현 포로수용소 ‘진들’이라는 곳의 천막 막사 근처까지 여러 번 달려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면회하고 반공포로 대열에 들라고 목을 놓아 애절히 울며 간청했는데 누나의 남편은 적개심에 불타는 눈초리로 완강히 듣지를 않고 오히려 “무엇 하러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하고 크게 꾸짖더라는 것이다. 당시 포로들을 면담하고 심문하는 역할을 했던 오찬명이란분(평안도 서북청년단 단장역임)의 댁에 까지 찾아 가서 그분의 부인(김한봉씨의 누나) 에게 간청하여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지만은 허사였다고 했다. 김한봉(요셉)씨가 그때의 슬픈 기억을 더듬어 영옥누나의 애태우던 당시의 사실을 훗날 나에게 소상하게 말하기도 했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포로수용소 앞에 가서 철조망 밖에서 애절하게 남편 이름을 불렀는데도 한 번도 나오지를 않고 나중에 한번은 운동장에서 포로들끼리 배구 시합을 하는 도중인데도 철조망 밖에서 만나자고 애절하게 "여보~!" 하고 소리쳐 부르는 사랑하는 아내 영옥 누나에게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외면하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수용소 안은 점차로 험악해졌고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공산포로들의 폭동이 나고 포로 교환 때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도 외면하고 냉정하게 이북으로 갔다 하였다.

사상이 무엇인가? 젊은 시절에 일단 세뇌가 되면 장교도 이 정도가 되고 만다니…!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전쟁과 대립이 이렇게도 무서운가? 그 뒤 풍문에 마산인가 어디에서 포로들을 석방했는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누나의 남편인 듯한 사람을 육지에서 봤었다고 하여 영옥 누나는 그 혼란기에 배를 타고 혹시나 하고 다시 마산으로 쫓아가 눈물의 세월을 보내면서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 나서서 마산 일대를 샅샅이 헤매고 뒤졌으나 남편의 자취는 흔적도 없었고 나중에 들리는 말은 남북 포로 교환 할 때 맨 처음에 이북으로 벌써 넘어갔다고 했다.

영옥 누나는 우리 집 학교 사택에 자주 왔다. 어머니 앞에 와서는 잠시나마 남편을 만나 행복을 찾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뿌리치고 이북으로 돌아간 그 매정한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수도 없이 말했다. 몇 걸음 떨어진 사이에서 철조망을 사이에다 두고 다정하게 서로 손도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헤어져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아쉬움, 다시 찾을 수 있는 행복이 다 날아간 허탈하고 서운한 심정에서 방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먹여 울기도 많이 울면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하며 슬프고 격한 마음에 하루에도 여러 차례나 내 어머니 앞에서 답답한 가슴 속을 풀지 못해 까무러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 슬픔! 어이 다 이야기하랴! 예쁜 영옥 누나와 같은 일이 온 나라에서 어찌 이 한가지뿐이었겠는가? 아직도 많은 이들이 말도 못하고 가슴으로 울고 이 땅에 파뿌리가 된 머리로 세월이 지나감을 한탄하고 있다. 누나는 그 뒤 정신이 멍하니 흡사 깎아 놓은 석고상 조각처럼 표정도 없이 마을을 오갔고 내가 다니는 학교 위 뒷산 쪽으로 샛길이 있는데 그 길로 고개를 멍하니 쳐들고 혼자 오가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그 뒤로 부산으로 이사 나간 뒤 곧 서울로 가서 산다 했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알려 드리려고 명동성당 앞에서 사지즈봉을 만났을 때 언니의 안부를 물어 보니 벌써 외국으로 이민 갔다 하였다.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친구 영희네도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나의 이모와 이모부의 애절한 사연도 가슴이 아프다. 전방에 내려온 군인들로부터 기사문리의 이모 내외의 총살 소식을 자세히 듣고 아버지는 어머니 몰래 교무실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했다. 이모부와 이모의 결혼은 아버지가 주선하신 것이기에 아버지의 슬픔은 더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아버지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비보를 듣고서

나로 더불어 젊은 그대들의 백년가약을 맺었고 수륙 양천리 길을 줄여 청홍수를 놓아 화촉의 불을 밝혔음이라.
한해 꽃다운 청춘의 단꿈은 무르녹아 8년 설상이 흘렀고 귀한 열매 쌍반(雙半)을 얻은 기쁨이 슬픔으로 사라졌음을 알았노라.
애처롭다.
그대들 못 본 채 7년의 허무한 세월이 갔는가.
38도선의 저주로운 숙명은 천추에 원한을 빚어 너 나의 심장에 불길을 질렀고 6․25 동란으로 강토와 민족을 불바다로 휩쓸어 적은 사정도 없이 인륜마저 끊어 버렸구나.
그래도 살아 만날 한 오리 실마리를 당겨 그윽한 희망에 잠겼고 기뻐 만날 그 장면을 얼마나 그려 애를 태웠는가.
그리운 사람들아.
허나 이 무슨 운명이기에 그대들 소식을 듣는 날 희망의 꿈이 조각으로 흩어질 줄이야.
그대들이 죽다니.
아― 슬픔은 넘쳐 피를 얼구고 아픔은 신경을 끊어 6척 못되는 내 육신의 넋을 뺀다.
비보― 이는 정녕 꿈 아닐진대 충혈된 눈을 멀리 멀리 그대들 있던 곳을 응시한다.
신묘 섣달 그믐날 야반에 거제도 한 모퉁이에서.
우리 가족의 가까운 친척들까지도 전쟁의 와중에서 이렇게 비참한 슬픔을 당하였다.(계속)

50. 기초학업 손실

1954년 4월 나는 6학년이 되었다. 제대로라면 중학교 1학년이 되었어야 하는데 1950년 6월이 지나면서부터 6ㆍ25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난리 통에 1년을 쉬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동란 전후해서 피난을 다니다가 처음부터 나중까지 이북 정치바람이 든 사람들에게서 눈치 보며 감시를 받는 처지였으니 신통하게 공부가 되었을 리 없는 격동의 시절이었다. 6ㆍ25 나던 그 한 해만 하더라도 학교의 아까운 1년의 세월은 완전히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전쟁 통에서 잠시 멈칫한 학생도 있으나 곧 정상적인 학습을 한 학생들이 많이 있지만 중부전선에서 전쟁 통에서 쫓겨 다니면서는 못 볼 것만 수두룩이 보고 경험하고 다닌 나 같은 아이들은 나중에 이를 극복하느라고 또 다른 몸살을 앓았다. 전쟁으로 이 나라의 모든 것은 따뜻한 자연 이치와 함께 어깨동무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아니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그 뒤 나는 수학을 전공하였고 명색이 평생 수학교사였지만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다. 초등수학을 공부할 때도 중등수학, 고등수학을 공부할 때도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불안 심리현상이 내 마음 안에서 작용했다. 열등의식도 아니고 참으로 이상한 심리였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창피하기까지도 하였다. 어려운 문제를 풀 때나 남들처럼 계산을 쉽게 해 정답을 구할 때도 그 언뜻 지나가는 이상한 심리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부족한 듯한 두려움 비슷한 그런 불안한 심리가 있었던 것이다.

수학은 수의 이치를 연구하여 실생활에 이를 적용시켜 유익을 창출하는 데 목적을 두는 학문이라 나름대로 간단히 말하고 역시 그 수학을 시작하는 기초 수단이 산수 즉 계산(셈)을 하는 것이라 간단히 정해 놓은 가운데 나의 말을 해 보고자 한다. 기초적인 뺄셈 계산문제를 만날 때 나는 몹시 불안해하는 습관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5 + 2 = 7, 9—3 = 6, 15—2 = 13의 계산은 거침이 없고 불안하지도 않았으나 12—5 = ?, 16—9 = ? 의 문제가 나오면 아주 불안한 마음의 동요가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간 뒤에야 마음을 가다듬고 그 계산을 올바르게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서 이러한 마음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모르는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참으로 내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이하는데 왜 이러한 뺄셈에서 두려움을 가지는가? 상급학교 진학을 할 때도 어려운 시험에 통과했을 때도, 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54년 거제도에서 국민학교 6학년 초에 산수 경시대회에서 제일 잘했다고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었던 경험도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계산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뺄셈만 나오면 멈칫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유치원생도 쉽게 푸는 이 기초과정에 왜 나는 두려움의 심리가 발동하는가? 중등교사인 내가! 심리적 원인은 나중에 내 스스로 진단하면서 해결되었다. 모든 과정을 체험한 것과 체험하지 않은 것 바로 그것이 문제점이었던 것이다.

51. 학습 불안심리

1984년 44세 되던 해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12월, 서울대학에서 나는 상담(카운슬링) 지도교사 자격 취득을 위한 강습을 겨울 내내 받았다. 이때가 교사로서 새로 태어난 내가 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심리상담 교사로서 아주 시야가 넓어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상담강습을 받는 그 안에도 내가 겪은 6ㆍ25 관련 이야기가 있으니…….

상담과 심리치료 과목을 공부할 때였다.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은 자기가 고민하는 문제를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 심리인데 카운슬러가 이 같은 태도를 인정(recognition)하고 명료화(clarification)하게 됨에 따라 학생은 점차 선생과 자기와 공동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변하고 마침내 자기 결정에 책임을 지게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타의와 자의의 차이가 상담과 심리치료에서는 극히 중요한 뜻을 내포한다’ 는 내용과, ‘어떤 경우에서든지 경험하지 않고 뛰어넘은 것(손실된 것)은 반드시 그 손실된 때로 돌아가서 스스로 발견하고 채워지도록 도움을 주어야 된다’는 상담에 관계되는 전문서적의 내용을 읽고 나는 아하! 하고 순간 뇌리에서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는 바로 여태껏 마음속으로 지녀온 나의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교사가 되려고 교육학을 공부할 때도 상담과목을 공부했을 때 다 집고 넘어간 내용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다니! 나는 당장 동대문 평화시장 헌책방에 가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산수책을 모두 구입했다. 다음날 강습을 다 받은 뒤 곧장 집에 온 나는 내 방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스스로 상담교사가 되었고 또 동시에 피상담자의 신분으로 책을 펴고 그 뺄셈 부분을 찾아 확인한 뒤 전쟁 통에 잃어버리고 경험하지 못한 나의 세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내 스스로 마음속의 정다운 그 때의 내 교실 안에 스스로 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말했다. 스스로 자문자답하였던 것이다. ‘찬수야! 이제 책을 폈지?’, ‘네’ 하고 대답하면 ‘그러면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자!’ 조금 있다가 나는 마음속으로 또 ‘네!’ 하고 대답을 하고 천천히 문제를 보았다. ‘자! 여기를 한번 보고 생각해 보자!’ 하고는 조금 있다가 문제 풀이 과정을 보고…… 대충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 강습 도중 지도 교수님의 숙제이기도 하여 나는 내 자신을 사례로 상담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15— 6 = (10 + 5)—6
= (9 + 1 + 5)—6
= (9 + 6)—6
= 9 + 6—6
= 9 + (6—6)
= 9 + 0
= 9

또는

15—6
= 10 + 5—6
= (4 + 6) + 5—6
= (4 + 5) + (6—6)
= 9 + 0
= 9

이런 풀이 과정으로 나름대로 쉬운 방법을 택하는 형식을 취하여 진행했다. 6ㆍ25 당시 이북에서 우격다짐으로 손가락 발가락 다 동원해 가며 학교 선생이 지도하던 원시적 주먹구구식 지도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거나 누구든지 다 아는 뺄셈 과정과 다른 손실된 학습과정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채워져 갔다.(계속)

52. 상담 심리치료 방식으로 학업 상실감 해소

‘자! 이제 이해되었으면 문제를 하나 풀어 볼까?’, ‘풀이할 수 있겠지?’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 묻고 대답하고 계산해 가면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다 아는 것을 가지고 혼자서 이렇게 하니 매우 어색하고 우습기가 짝이 없었다. 그 때의 수준으로 그때의 연령과 환경으로 천천히 다시 되돌려 경험시켜 주어야 한다는 지도교수의 말에 따라서 내가 직접 실천해 본 것이다.

싱겁기가 이를 데 없었으나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초등학교 과정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심리적으로 내가 잃어버린 초등학교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서 교실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나를 서서히 인식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뺄셈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의식으로 우선 해결하려는 습관이 앞섰던 것이다.

‘13—6 = ?’ 두 손바닥을 내 눈앞에 펼쳐놓고 왼쪽 엄지손가락 옆에 상상으로 세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머릿속으로 더 그려 놓아둔 뒤 오른쪽 엄지손가락부터 차례로 여섯 손가락을 꼽아 놓고 일곱째 손가락부터는 접히지 않은 손가락까지 상상으로 아래턱을 끄덕대면서 차례대로 세어 나간 뒤 헤아린 숫자 ‘7’ 이런 식만이 초등학교 2, 3학년을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고정관념 전부였다.

매번 수학문제를 풀 때도 쉬운 뺄셈이 간혹 나오면 초등학교 생각을 두려운 마음으로 먼저 하고 떨쳐버린 다음에 내가 아는 대로 계산하고…… 이 얼마나 번잡스러운 억눌린 잠재의식인가.

나는 스스로 자신의 선생이 되고 학생이 되어 내 자신을 6ㆍ25 전쟁 때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잃어버린 과정을 아주 천천히 단계적으로 되찾아 채워 놓았던 것이다. 이 이외의 손실된 초등학교 산수의 다른 과정을 경험하는데 1주일 정도 걸렸다. 그리고 그 과정을 다 경험한 뒤에 나는 내 자신에게 말했다. ‘찬수야! 너는 이제 다 배웠으니 초등학교 때 배우지 못한 그 교실에서 자신 있게 나와도 된다!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도 된다!’ 사람의 심리가 참으로 무섭고 놀라운 것이라 생각되는 며칠간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지도교수에게 보고했다. 그 이후에 나는 6․25로 인해 마음 안에 쌓인 불안 요인이 비로소 말끔히 없어졌다. 모든 계산 과정에 나는 멈칫하는 두려움이 말끔히 없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마음이 상쾌하였다. 이렇게 6․25때 잃어버린 초등학교 때의 그 소중한 1년을 35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되채웠다. 채우지 못한 그때의 경험을 나이가 많은 내가 그 때로 다시 되돌아가서 채워 놓았던 것이다. 내가 경험한 ‘상담의 신비’였다.

전쟁은 이렇게 우리나라 전역에서 모든 사람의 여러 가지 발전의 기회를 앗아갔던 것이다. 모두를 뒷걸음치게 하여 불안 심리를 깊이 안겨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국토의 어린이 마음 안에 이런 여러 가지 손실이 있었다면 국가적으로 따지면 엄청난 손실이 아니겠는가.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 전 지역의 모든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되고 다치게도 되었고 슬픔의 사연을 남기게 했고 또 아까운 목숨을 매몰차게 빼앗아가기도 했으니…… 이로 인해 6ㆍ25 동란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응어리진 모습으로 살아왔던가. 그러고도 지금도 그때 이후의 응어리가 풀려지기는커녕 또 더하게 이어지는 공포와 불안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으니…….

53. 우선해야 할 교육풍토 확립

6ㆍ25의 시련을 통해서 본 그 이후의 우리 교육 실정을 한번 떠올려 본다. 사실은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의 문제가 지금까지 위정자들의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맴돌고 뒤바뀌고 하는 그런 전시행정 쪽으로 이끌리어 왔다. 교육담당 장관이 수시로 바뀌고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과 심지어 국가 교육의 방향까지 달라지는 현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런 국가적 교육풍토에서 청소년들의 사회관 국가관이 어떻게 바르게 정립될 수 있겠는가.

6․25 가 일어났을 때 전 국토에서는 교육활동이 중단되다 시피 되었다. 갑자기 이북에서 침략해 내려온 인민군들과 정치 보위부 사람들이 점령지 마을마다 우선적으로 정치선전 영화를 상영한다, 노래를 가르친다 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매일같이 김일성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시켰다. 교육이라기보다 그들의 정치적 선전이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진두지휘 이후 남한 각지에서는 점차로 피난민들 자녀들 있는 곳마다 그들을 모아놓고 도처에서 노천교실을 운영하면서 아동 교육을 실시하였다. 국가가 계획적으로 교육을 주도한 것이 아니고 민간인들이나 심지어 전투 중인 군인 장교들이 자발적으로 피난민 아동을 가르쳤던 것이다. 당시의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은 이렇게 비참하였다.

내가 거제도 피난시절에 우리 친구들과 공부한 내용 중에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김일성의 무모한 공산주의가 이 땅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에 모두들 공감한 것이다. 국민 모두가 6․25를 통하여 뼈저리게 체험하고 또 느꼈기 때문이었다. 교육행위란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라는 활동을 통하여 심오한 지식을 얻고 사회 흐름의 옳고 그름을 배우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서 내가 속한 국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에 이바지하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능력과 정신을 심어주는 활동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국가에서는 나라 건국이념을 분명히 한 가운데 홍익인간의 정신을 살려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그 이념에 동참하는 애국심 고취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교육목표는 절대로 흔들림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나라통치개념도 다시 흔들려 제2의 6․25가 오지 않는가 하여 모두들 좌불안석인 현실임에 우려감을 크게 느낀다.(계속)

54. 아버지의 용단 부산으로 이사 결정

1954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거제도 전역에서 국회의원 선거열풍이 불었다. 선거라는 것을 내 생애 처음 구경했는데 동네 담벼락이나 판잣집 외벽에 뽑히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든 벽보가 나란히 붙여져 있었다. 차 위엔 확성기가 있어서 아주 커다란 소리로 누구누구를 지지해 달라고 외쳐 밤낮으로 거제도 전체가 요란스러웠다.

아주 젊고 잘 생긴 청년 한 사람이 입후보 했는데 바로 이 사람이 1992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뽑힌 김영삼 이란 정치가였다. 당시에 야당에서는 정치계에서 알아주는 채모 의원이 또 입후보했었고 김영삼 입후보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라고까지 소문내면서 여당인 자유당으로 입후보했다. 두 사람이 아주 유력하였는데 피난민들에게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고까지 널리 알려졌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저렇게 가까우니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자며 개신교회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하여 전국에서 몰려든 6․25 피난민의 몰표 행사로 김영삼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당시 제일 젊은 26세 나이로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고 하였다. 한번은 김영삼이 유세 중 우리들이 다니는 중앙교회에 왔는데 어린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자상하게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생각도 난다. 가까이서 보니 참 멋있게 생겼다 생각했다. 서울대학교를 나왔고 당시 장택상이 총리를 하였었는데 그의 비서로 일했다고도 했다. 그의 아버지가 거제도 일대에서는 큰 재력가여서 소문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70대나 있고 소유한 배가 200척이나 된다 하였다.

피난민들로서는 입이 딱 벌어지는 아주 부러운 귀공자로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그가 당선되고 나서 우리가 부산으로 이사를 나온 몇 달 뒤 그가 양자라고 내세우면서 가깝다고 자랑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갑자기 배반하고 당시 야당 입후보자 채모 씨의 민주당인가 뭔가 하는 당으로 옮겨 앉았다. 만나는 어른들 사이에 김영삼이란 사람이 저렇게 젊은데 벌써부터 저러하다니 하며 몹시도 의아해 하는 말들이 자주 오갔다.

1954년 새 봄이 되면서 우리 집은 또 한 번 엄청난 변화가 생겨났다. 할머니가 이 거제도 섬에서 살기 싫다는 말을 하고 고향으로 빨리 되돌아가든지 아직 수복지구여서 어려우면 고향 가까운 육지 부산이라도 나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여기 분위기 때문에 당신의 병이 또 생겨날 것 같다는 말을 아버지 어머니에게 한 것이다. 며칠을 고민한 아버지가 크게 용단을 내렸다.

여기 연초 중학교에는 다른 훌륭한 선생들이 열심이고 원주민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계속 발전할 것이라 하면서 나는 하나뿐인 어머니를 잃고는 도저히 세상을 살 수 없으니 고향 가까운 부산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을 다녀왔다. 우리 가족이 거주할 곳과 아버지의 직장을 구하러 나갔다 온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이 문제를 학교 선생님들과 지방 유지와 피난민 연락사무소의 관계 인사들과 통영군과 경상남도 학무과에 알린 것이다. 거의 한 달을 여러 기관에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학교를 떠나는 뜻을 거두어 달라는 설득을 만류를 하고 학생들이 울면서, “교장선생님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들이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할 터이니 여기 계셔서 저희들을 지도해 주십시오!”하며 학교 사택엘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아우성들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결정은 단호했다. 할머니 소원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효도를 택한 것이다. “너희들은 다른 훌륭한 선생들이 계셔서 배울 수 있지만 나는 떠나야 할 사정이 있다” 했다. 이곳에 있으니 또 병이 날 것 같다 하는 할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차마 당신의 어머니 말을 하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에는 오직 할머니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수용소 앞에서 학교를 세워 배움의 전당을 꾸밀 구상을 하고 갑자기 고향을 떠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다 되어 미군들에게 초콜릿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아이들을 모아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관계기관에 탄원을 하고 서류를 준비하느라 밤낮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어찌 이들 제자들과의 헤어짐이 아쉬움이 없고 가슴 아프지 않았으랴.

아버지의 일기 속에 자세하게 적힌 하청중학교 연초 분교를 세우고 분교장의 직책을 맡아 이끈 사도 실천의 사연은 후일 내가 교육활동에 임하는 생활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연초 중학교와 관련된 아버지 일기의 내용 몇 가지이다.

1951년 8월 15일, 연초 중학교 설립 착수(통영군수와 각 관계기관과 토의) (피난민 중학생을 위하여 헌신키로 각오)
12월 15일, 정식개학 개교식 성대(명칭 연초중학교. 교장으로 취임)(교사 4명 채용 3학급)
1월 3일, 신축교사 건축 상량식 거행
1월 13일, 통영중학교 연초분교로 인가 신유년 복잡한 해의 다단함이여, 내 뜻은 끝내 성공하여 학생들은 자란다.
1952년 2월 15일, 문교부차관 본교 시찰
3월 27일, 하청중학교 연초분교로 변경 인가
3월 30일, 국가 보조금 실현(도, 문교부 출장 해결)(3월 8일부터 신 교사에서 수업 실시)
1953년 4월 16일, 학생 책상 의자 제작(20일 완료. 운동장 확장) 5학급 340명 분의 수업시설 완료

햇수로 3년
일마다 괴로운 벌칙이었다.
욕이란 욕 다 먹으면서도
오직 하나의 신념과 인내로써
빈 터전에 학교가 섰고
나 혼자의 힘은 아니었으나
모든 시설을 위하여 얼마나 힘을 썼던고
하면 되고야 마는 것을
피 저린 풍진 속에
오늘에야 시설 완비되어 마냥 기쁘네.

우리 집이 부산으로 이사해 나오기 직전 잊혀지지 않는 사회상이 하나 있었다. 연초중학교에 윤씨 성을 가진 젊은 영어선생님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아주 좋아했고 인기가 많아 여학생 누나들이 졸졸 따라다니다시피 했다. 어느 날, 그 윤선생이 입대를 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송별연을 여는 둥 난리법석이었다.

학교 앞 행길을 지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탄 트럭 한가운데에서 얼큰하게 술에 취한 듯한 벌건 얼굴의 윤선생이 ‘군 입대’라는 굵은 글자가 씌어 있는 어깨띠를 두르고 이마에는 태극기가 새겨진 천을 질끈 동이고 오른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옆 사람들과 함께 군가를 하늘이 떠나가라 목청 높여 힘차게 불러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참으로 영웅적인 모습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슬퍼하며 선생님의 무운을 빌었고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그 윤선생은 입대를 하였다. 그런데 열흘 정도 지난 어느 날, 그 윤선생이 학교로 슬며시 다시 돌아왔다. 군 입대를 하여 적군을 무찌르려 훈련을 받고 전방으로 가지 않고 되돌아온 것이다. 무슨 사유인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그리고 얼마간 학교에 다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렇게 따르던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아침 등교시간 정문에서부터 인사조차 하지를 않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이런 쌀쌀한 분위기가 점점 학교 전체로 번져가자 이를 눈치 챈 윤 선생은 얼마간 더 있다가 소문도 없이 연초중학교 교사근무를 그만두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군대를 갈 수 있는데도 무슨 이상한 수를 써서 군 입대를 면하였다고 했다. 학생들이 이 사실을 알고 매섭게 싹 돌아섰던 것이다. 6․25 이후 휴전되기 전 이때의 전국적 사회 상황은 어디를 가든지 대체적으로 이러했다.(계속)

55. 명견 에쓰와의 이별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아는 사람을 통하여 부산에서 살 집을 마련했으니 6월에 이사한다 하며 짐을 꾸리라고 했다. 부산으로 나갔다가 그때는 아직도 전쟁터의 한가운데인 고향이 안정되면 재빨리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기쁘시게 해드리자는 말이었다. 학급친구들에게도 부산으로 나간다고 이별을 고했다. 나는 지금도 만나는 거제도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는 6ㆍ25때 모진 피난생활을 같이하면서 가슴속에 간직한 서로 통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다. 함경도 아바이 모임이다.

사투리 억양이 어떻게나 억센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나서 떠들면 다방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귀를 막아야 될 지경이다. 만나면 고생스럽던 일들이 재미있는 듯한 추억 속의 얘기로 변한다. 학급 친구들에게도 부산으로 나간다고 이별을 고하였다.

아버지는 평생 사명감을 가지고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어떤 직책이나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엔 항상 초연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할머니 말 한마디를 듣고 따르는 데도 단호했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뒤 1985년 9월21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내 형제들은 아버지의 출판기념회를 열어 드렸다. 그간 아버지의 학술, 고전, 저서가 무려 38책 64권이었다. 전국에서 피난시절 연초 중학교를 나온 남녀 제자들이 많이들 참석했고 2차로 밤늦게까지 우리 집 뒤뜰에서 지난 이야기를 했다.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그때 일들을 상기하면서 사제지간에 오래간만에 다시 다정히 눈물을 흘리던 광경을 보았다.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이사하기 며칠 전 아버지는 나의 든든한 친구 사랑하는 에쓰를 처리하자고 하였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개는 배에 태울 수 없어 부산으로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난 엄청난 고민이 생겼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개백정에게 팔기로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사 가기 7일 전 에쓰가 홀연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수소문해 봐도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에쓰는 주인 말에 눈치를 챈 것이다.

우리 집이 부산으로 떠나는 날 이른 새벽 어디를 갔는지 모르던 에쓰가 집에 나타났다. 오랫동안 굶어 기운이 다 빠져 나에게 꼬리를 치는데 힘이 없었다. 개백정 영감이 왔을 때 에쓰는 그 영감을 보고 어깨의 갈기를 세우면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영리한 에쓰는 벌써 알았던 것이다. 동네 아저씨들과 선생들이, “찬수야! 에쓰가 너의 말을 잘 들으니 네가 이끌어 개백정 할아버지께 넘겨 드려라!” 하고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절대 그렇게 못하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에쓰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왜 부산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되냐고 하면서 난리를 쳤다. 그리고 개백정 말고 다른 사람에게 잘 키우라고 주면 안 되느냐고 외쳤다. 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임 인사를 하는 아버지가 뻘겋게 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부산 나가면 이보다 더 좋은 진돗개를 사줄 테다. 그러니 어서 개백정에게 넘기자”하고 나를 달래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말이 끝나자 부둥켜안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던 에쓰를 개백정 철조망 수레 안으로 데리고 갔다. 에쓰는 반항하지 않고 목을 느리고 순순히 걸었다. 그때 에쓰도 울고 있었다. 연초 면 연사리 벌판과 MP 다리까지 뚝방 길을 달리며 위용을 떨치던 명견의 위세는 어디로 가고 눈자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별을 각오한 듯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우리 속으로 들어간 에쓰가 한번 끼잉 하였고 뒷 철문이 닫혔는데 들어가면서 나를 흘끔 뒤돌아보는 에쓰의 눈초리가 나를 몹시 원망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에쓰와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나를 믿고 집으로 다시 왔는데 개백정에게 넘기다니!’ 에쓰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나는 비정하게 에쓰와 헤어진 일을 떨쳐 버릴 수가 없고 지금까지도 이별한 순간만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때 그냥 풀어놓아 벌판으로 도망가게 내버려 둘걸……’ 두고두고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나에게 충성하는 너를 의리를 지키지도 못하고 보호도 못했다니…… 우리 속으로 에쓰를 들여보내 놓고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할머니가 이때의 슬픈 사실을 두고두고 말하기를, “전교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울지, 아범 울지 선생님들과 학부형들과 이웃동네 사람들이 이별을 슬퍼하여 여기저기서 울지, 찬수는 개 끌려가 죽는다고 대성통곡을 하지, 그야말로 학교 전체가 울음바다였다”라고 했다.

이때의 또 다른 헤어짐은 그렇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버지의 결단력은 대단했다. 일전 한 푼 없는 우리 집의 이삿짐은 옷 몇 가지와 재봉틀 하나 양재기 그릇 수저가 전부였다. 앞날을 예상 못하는 피난민의 객지에서의 이동인 것이다.

이산가족이었던 우리 집 여섯 식구는 저 처참한 전쟁 속의 풍비박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거제도에서 합쳐졌다. 한 많은 슬픔의 사연, 고난의 사연, 숱하게도 많은 고마움의 일들을 거제도 여기저기에 모두 남겨두고 장승포 항에서 부산행 목선 여객선을 타고 거제도를 떠났다.

거제도! 전란 속에서 평화를 실천하며 몸살을 앓은 장한 거제도! 네가 따뜻이 보듬어 주었기에 우리가 대한민국 자유에 편히 안길 수 있었고 너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만나지도 못했다! 고마운 거제도야! 네 고마움 잊지 않고 지금 떠나지만 내 기필코 다시 너를 찾아오리!

1954년 6월 초 장승포 항 앞바다 바닷물은 떠나는 뱃전을 때리고, 바다 위를 나는 흰 갈매기들이 전쟁의 무서움과 피난민의 애환을 알기나 하는지 그저 자유롭고 평화롭게 우리 가족 머리위로 배회하고 있었다. 배 밑창 객실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허전하여 멍하니 앉아 에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계속)

56. 자갈치 시장과 청구중학교

부산 자갈치 부두에 내린 우리는 리어카 한대에다 배에서 내린 간단한 이삿짐을 옮겨 싣고 리어카 끄는 아저씨를 앞세웠다. 손에 손에 보따리를 든 우리 모두는 아버지를 따라 걸어서 한국전력회사를 지나 토성동을 거쳐 아미동 산 중턱에 있는 판잣집으로 올라갔다.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병설 중학교와 담을 하나 사이로 두고 건너다보이는 바로 남쪽 비탈 언덕배기에 있는 판잣집으로 올라갔다. 6평 정도 되는 새로 지은 아주 작은 방 두 칸의 집이었다. 초장동과 아미동의 경계지역이었는데 나무도 없는 산비탈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장사가 남의 땅에 불법으로 지어 피난민들에게 싸구려로 분양한 집이었다.

거제도에서 아버지가 급히 부산에 나와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임시방편으로 장만한 집이 불법으로 지어 싸구려로 파는 무허가 판잣집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쟁 통엔 삶의 기준이 단순한 윤리 도덕 관습에만 의지했지 나라가 세운 법조문 등은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모르거나 정확한 준거에 의하여 지켜지지도 않을 뿐더러 정상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우선 살고 봐야 하니까 피난민들은 모두 그랬었다고 볼 수 있다.

부산 도처의 산비탈의 판자촌은 모두가 무허가로 지어졌고 집장사들이 단속을 피하여 낮에는 조용하다가 밤이면 후닥닥 툭탁 소리가 난다 싶어 이튿날 아침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어제까지 못 보던 집들이 하룻밤 사이에 여기저기에 몇 채씩 생겨나곤 하였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부산 사람이 되었다.

처음 배에서 첫발을 내디디자마자 엄청난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자갈치 뒤편 바다와 송도 쪽으로 나가는 남항동 축항이 있는 그 안에 엄청난 배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오가는 배도 아주 다양했다. 사람들이 사느라고 외쳐대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복잡한 큰길 한복판으로 커다란 전차가 땡땡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연 부산은 우리나라의 대도시였다. 엄청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피난민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살았으니 그때의 사회상이 어떠하였겠는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집안에서 짐을 풀고 그날 밤 창문을 열고 부산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그야말로 야경이 화려했다. 이튿날 아침 촌뜨기인 내가 처음 보는 대도시 부산의 광경은 어마어마했다. 시가지뿐만 아니라 산꼭대기 전체가 온통 다양한 건물로 꽉 차 있는데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 쪽(보수산), 우남공원(용두산), 영도다리 너머 멀리 오른쪽 위로 고갈산 중턱 영선동 일대 왼쪽으로,

임시정부청사가 들어서 있던 경상남도 도청 옆 이승만 대통령이 있던 부민동 대통령 관저, 병설 중학교 바로 왼쪽으로 조금 가면 보이는 높다란 굴뚝의 아미동 화장터, 저 멀리 서대신동, 동대신동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영도다리 왼쪽으로 시청 옆 제5육군병원 건물, 당시 부산에서 제일 높은 건물 너머로 부산항과 그 너머로 적기, 신선대 쪽 오륙도 부근까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물론 이런 지명은 부산에 살면서 차차 안 이름들이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부산 한가운데 우남공원(용두산 공원) 쪽으로 빠져나가면 바로 이어지는 전시에 가장 유명했던 남포동까지 두 줄 건물로 길다랗게 이어지는 국제시장, 그리고 광복동 남포동 미문화원이 있는 대청동 동광동 거리 등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부산의 중심인데 손 안에 잡힐 듯이 다 보였다.

우리가족은 이웃들과 인사를 했다. 모두가 피난민이었고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경상남도 하동 창원 산청 사람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온 피난민들이 다 모였으니 사투리도 가지각색이고 각자 풍기는 성품과 관습 그리고 기질도 아주 다양하였다. 그 어려운 삶 속에 서로가 내놓는 이야깃거리도 다양하였다.

나는 바로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새로 근무하게 될 보수산 공원 오른쪽 언덕에 있는 피난민 학교 청구중ㆍ고등학교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버지가 아미동 바로 아래에 있는 토성국민학교나 보수산 아래에 있는 보수국민학교에 데리고 가지 않고 아버지가 근무하게 될 청구중학교로 간 것이다. 교무실에서 간단한 수속이 끝나고 나는 갑자기 국민학교 6학년이 아니라 중학교 1학년 교실에 덜커덕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그날 6월부터 나는 국민학교 6학년생이 아니고 1년 2개월을 건너뛰어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예고도 사전 준비도 없이 바로 중학생이 되어서 한편으로는 중학생 모자도 쓰고 그럴 듯하게 보이기에 약간 우쭐대려는 심리도 있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아주 심각한 고민과 당황 속에 그해 겨울방학 지날 때까지 몸살을 앓았다. 매일같이 나는 학교 생각만 하면 무엇에 쫓기는 듯 모든 것이 부족한 듯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평소 친구들처럼은 하는 공부인데 갑자기 공부에 대하여 그렇게 몸살을 앓아 보다니……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어린 나로서는 갑자기 일시적으로 6ㆍ25 전쟁만큼이나 감당 못할 큰 일이 생긴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다 이해된다는 아버지의 소싯적 생각만 하고 나의 능력을 살피지 않은 것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재직하는 학교의 교사이면 자녀의 등록금이 면제된다는 그때 상황으로 따지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엘 매일같이 나를 데리고 다닐 수가 있어서 혼란한 세태 속에서 보호할 수 있겠다는 동기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쟁 뒤의 가난이라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본다면 천재도 아닌 내가 크게 흔들린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주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계속)

57. 학습 지진아 열등생

다시 생각해 본다. 6ㆍ25로 1년이 늦었다 하더라도 늦는 대로 자연스럽게 절차를 밟아 토성국민학교 6학년에 가고 그 다음해에 중학교 시험을 보고 옆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시험을 쳐 볼 기회도 있었는데…… 평생의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땐 제일 우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교과를 이해하고 따라갈 정도는 되었었는데 그해 6월부터는 하루 사이에 나는 우리 학급에서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가장 열등생이 되었던 것이다.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피난민의 애환과 가난의 서러움이 나에게 또 다른 이런 모습으로 운명적인 것처럼 다가왔다.

특히 영어와 수학이 문제가 되었다. 우선 알파벳도 모르는 실력에 수학 속에 기호가 나오는데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고 영어시간에 독본 읽을 때는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멍텅구리가 되었다. 용어나 잘 이해할 수 없는 뜻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고 문법까지 나오니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자존심은 삽시간에 다 무너지고 갑자기 부끄러워 남의 눈치나 슬금슬금 살피게 되고…… 옴짝달싹도 못한다더니 너무나 커다란 짐이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심리적인 압박을 배겨내지 못한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나는 갑자기 손톱을 깨무는 습관이 생겼다. 손톱뿐만 아니라 손톱 근처의 피부까지도 이빨로 물어뜯어 손가락 끝이 벌겋게 되어 피부병이 생긴 것처럼 되었다. 이 현상은 욕구불만이라 했다.

그 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엔 나 혼자 집에서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하였다.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그게 말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내가 혼자 극복할 수밖엔 없기 때문이다. 한문이나 역사나 국어는 아버지께 배운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말과 문자와 기호가 나오는 영어․수학! 나중엔 영어․수학책은 거들떠보기도 싫었다. 자연스러운 심리현상이었으리라…….

무슨 가정교사나 선배가 있어서 물어 볼 데도 없었다. 또 1년 밀린 새로운 공부를 하는데 눈에서 불이 났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마음대로 잘 되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지, 집안 심부름도 해야지, 또 그 사이 자꾸 쌓이는 그날그날의 교과 과정도 해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열등의식! 이는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리를 잘 모른다. 내가 30년이 넘도록 교사 생활을 했으니 이 어린 시절의 나의 경험이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었으랴. 상담실에 있을 때도 어린 시절의 쓰라린 경험은 나의 스승이었고 학생 지도의 길잡이가 되었다.

한동안은 아버지와 같이 학교에 다녔지만 친구들이 생기고 도시생활에 적응도 하게 되어 나는 그 뒤부터 집에 올 때는 나대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이때 김상일을 만났다. 사귄 친구들이 많았는데 특히 상일이는 지금도 친 동기간처럼 지낸다.

1학년 우리 담임선생님은 장학수 선생님이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안경을 끼었는데 수학 교과 담당 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을 기회가 애당초 없어진 셈이다. 왜냐하면 수학공부를 못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 상일이는 머리가 명석하고 아주 부지런해서 그때 모든 학과에서 성적이 뛰어나 학급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다. 특히 수학시간은 그의 시간이었다. 수학을 너무 잘하였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학의 귀재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2학년 때 수학을 어느 정도 따라붙었을 때였는데도 2~30분을 끙끙거리고 생각하고 난 다음에 해결할 문제를 그 친구는 3분도 걸리지 않아 원리를 쉽게 적용하여 간단하게 척척 해결해 버리고 말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매사에 너무 성실하였다. 그도 수학교육을 전공했는데 평생을 그렇게 진지하고 열심이더니 나중엔 교장 임무도 충실히 하였고 서울에서도 교육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교육청의 교육장 임무도 아주 훌륭히 해냈다.책임이란 것이 근거 없이 아무 사람에게 아무렇게 대충대충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평생의 경험으로 또 다정한 나의 친구를 통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다.

그가 나와 만나기 전의 피난 이야기는 이렇다. 상일이는 연평도가 고향이다. 6․25가 일어난 직후 그의 부모는 상일이의 누나와 갓 태어난 여동생 상복이를 데리고 다섯 식구가 배편으로 인천으로 피난을 나왔다. 인천에서 살다가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이후 우리 국군이 진격하여 북으로 올라갔을 때 상일이네는 국군을 뒤따라 다시 연평도 고향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중공군이 참전하여 인민군이 다시 남쪽으로 미는 바람에 1․4 후퇴 때 온 가족과 동네 사람들 모두는 다시 인천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인천에서도 위험하다고 하여 피난 보따리를 챙겨들고 다시 육로로 걸어 수원에서 피난민 기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경상남도 울산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했고 그곳 피난민 학교에서 우리가 서로 처음 만났다.

어른들을 따라 피난 내려올 때의 고생을 너무도 많이 해서 그는 피난길에 대한 말도 하기 싫어했다. 피난 도중에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말초신경을 곤두세웠고 굶주림에 지치고 늘어져서 여기저기 같이 피난 가던 사람들이 병으로 낙오되어 주저앉아 꼼짝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도 보았다고 한다. 피난길이 뱃길이라면 목적지까지 단숨에 바다로 내려갈 수가 있었지만 육로로 피난하는 사람들은 북을 뒤로 하고 남으로 내려가는 더딘 걸음걸이였기에 허구한 날 등 뒤에서는 “적군이 쫓아온다” “적군이 또 쫓아온다” 북으로 올라가는 국군을 볼 때마다 “곧 싸움이 있겠구나” 하였고 연합군 비행기만 뜨면 혹시나 적군으로 오인하고 기총사격이나 포탄을 떨어뜨리지 않나 하며 꽁지가 빠지게 몸을 숨기며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짐들을 지고 어린아이들 돌보면서 내려갔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당시의 고초가 어떠했을까? 말이 아니었다. 상일이네 처럼 이렇게 우리 국민들 모두는 그러한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느라고 처절하고 끔찍한 삶을 이어갔다.(계속)

58. 멍드는 동심

내가 다니던 학교의 전신은 서울에서 피난을 왔다가 수복 후 귀경한 무학여고였다. 보수공원 중턱을 넘어 보수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곳에 있었다. 그 뒷자리에 들어선 문교부에서 인가도 나지 않은 사립중학교가 내가 다니는 학교였다. 1954년 가을 제일 송도 쪽에 있는 함남 중․고등학교에서 학급을 재편성할 규모의 엄청난 학생들이 한꺼번에 전학을 왔다.

1학년 때 생긴 일이다. 두 학교가 갑자기 합쳐지니 학생들 간에 세력다툼이 생겨났다. 우리 학교에 이승욱 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같은 반이지만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와는 거제도에서부터 한 학급에서 공부했는데 피난을 왔는데도 그의 아버지가 광복동에서 명시당이란 시계 보석상 가게를 운영하여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운데 학교엘 다녔다. 그는 그 당시부터 학업에는 힘쓰지 않고 권투도장에 다녀서 다른 학생들이 그의 위세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다. 그의 주먹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함남중학교에서 온 학생 중에는 박태구라는 아이가 있었다. 역시 그도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목이 긴 새까만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약칠을 하여 신고 재면서 다녔는데 몸이 날렵하고 우리 학교에 전학 오는 학생 중 주먹이 세기로 벌써부터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두 거물이 미리 한판 붙자고 약속을 하고 방과 후 꼭대기 운동장에서 맞붙게 되었다. 우리가 양쪽 학교 출신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둘이서 이승욱이가 갑자기 손에 들고 온 운동 가방을 천천히 땅에 내려놓더니만 아주 느긋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권투선수가 시합 전 입에 끼우는 마우스피스를 보란 듯이 천천히 꺼내어 자기 입술 안에 끼워 넣으며 오물거렸다. 갑자기 입술이 평상시보다 두툼하게 튀어나왔는데 거기에 삼각형 눈매에 거무튀튀한 얼굴의 승욱이가 입술을 씰룩대며 세모눈까지 날카롭게 쏘아보는 듯 상대를 쳐다보니 고약한 인상이 더 고약하고 험하게 보였다.

긴장한 가운데 승욱이가 취하는 여유만만한 행동과 날렵한 권투선수 동작과 거기에 무서운 얼굴을 하여 씰룩대며 싸울 태세를 취하니 멀거니 건네다 보던 태구가 싸움 동작을 맥없게 슬그머니 허물었다. 그러더니 싸우려던 기세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기가 폭삭 죽어 눈물까지 글썽거리더니 갑자기 “누가 싸운댔어! 누가 싸운댔어!” 하며 죽어 들어가는 자세로 소리지르며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전학 온 함남 중 패거리들이 판정패로 끝났다. 세력의 기 싸움은 우습고 싱겁게 끝났으나 큰 싸움이 되지 않아 서로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싸움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는데 다행히 승욱이가 싸움도 없이 이기는 바람에 얌전한 우리학교 학생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이후 집단으로 전학 온 함남중학교 출신 학생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이 사건 바람에 승욱이의 위세와 무용담은 촐싹거리고 부풀리기를 잘하는 대포가 센 친구들 입을 통하여 더욱 부풀려 퍼져 나갔다. 실상 그들은 싸우지도 않았는데도 “권투선수 승욱이가 번개같이 태구에게 한방 놓으니 태구가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이런 식이었다. 승욱이는 권투도장에만 다녔지 권투선수로 한번도 출전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러했다.

그 이후 세월이 조금 지나 친구 승욱이는 유명한 부산의 칠성 깡패단 창설 초기 두목이 되었고 태구는 칠성파보다 약한 영도섬 제2송도 지역의 백조 깡패단 두목이 되었다. 당시 부산은 깡패 그리고 온갖 범죄행위의 박람회장 정도의 도시였다. 서대신동의 20세기, 초량 수정동의 라이온스, 마라푼다, 교통부의 자이안트, 영도의 백조파…… 등등. 그리고 그 당시는 지금의 고아원(보육원)에 해당되는 아이들이 한떼로 몰려다니면서 아주 사납게 설쳐대어 여기저기서 나쁜 소문이 나 있었다.

학생들의 제일 큰 고민은 깡패 등살이었는데 그 공포감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웬만한 골목마다 지켜서서 지나가는 착한 아이들을 불러 돈을 빼앗는다든지 수틀리면 주먹질하며 상해를 입히는 깡패들 등살에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전쟁 후 피난시절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고민 중 가장 커다란 고민 덩어리였다.

부산의 중심가에 있는 국제시장, 보수동 헌책방 골목, 부산극장, 동아극장, 남포극장, 보림극장, 미화당 백화점, 광복동 거리, 동광동 거리, 우남공원(용두산 공원), 부산 본역앞, 부산진역앞, 서면극장앞, 국제극장앞, 초량극장앞, 제1송도, 자갈치 등등 그 일대 중심 거리는 구경할 만한 곳도 되지만 동시에 아주 무시무시한 공포의 거리이기도 했다.

청소년들이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수틀리게 잘못 걸려들기만 하면 얻어맞거나 돈을 빼앗기기가 일쑤이고 이렇게 매일 여러 장소에 지켜 서서 위협하는 바람에 청소년들은 심지어 시내를 거쳐 학교 가기를 꺼려 할 정도였다. 부산일보, 국제신문, 민주일보 등 일간지 사회면 신문지상엔 6ㆍ25 전쟁의 상처 아픔에 대한 기사만큼이나 깡패들의 패거리 싸움과 그 피해상황이 뻔질나게 기사화되어 실려 있을 정도였다. 6ㆍ25 동란 직후의 험난한 또 다른 사회상이었다.

당시에 부산에는 ‘뽕끼’라는 별명을 가진 전설적 깡패대장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이 든 그런 어른 같은 학생이었다. 피난민학교 함남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아주 점잖고 그들끼리의 의리를 다지는 데 수완이 놀라웠다. 그의 부하들은 함경도 난다리(또는 기계다리), 원산돼지, 평안도 박치기, 북청 물장수(내가 그때 보기엔 성격이 아주 순하고 성실해 보였음) 오산 돼지 등 우리 청소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무용담(?)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이었다. 모두 ‘뽕끼’라는 거물을 두목으로 하여 뒤따르며 충성을 다하는 무서운 무리들이었다. 주로 제1송도와 자갈치 시장 남포동 광복동 남항동 남부민동이 그들의 설치는 무대였다. 그러나 그 용맹(?)은 부산 전역을 휩쓸었다.

이들의 일화는 너무 터무니없이 부풀려져서 마치《수호지》나 여러 가지 무협지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함남고등학교 모자엔 하얀 줄이 두 줄 둘러져 있고 앞에 교표로 고(高) 자가 해서(楷書)체로 씌어져 있었는데 이 모자만 쓰고 다니면 부산에서는 집적거리거나 건드리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깡패가 많은 학교였다. 경찰들은 그들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다. 전시 피난시절에 부산에서는 함남고등학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나 있었다.(계속)

59. 깡패천국

그 뒤 2학년쯤 되어서는 우리 학교에 있던 공부에 뒷전인 건달패들이 결속이 되어 칠성파라는 깡패 단체를 조직했는데 초창기 이들의 행패는 부산 일대에서 우리 청소년들의 공포 대상의 제1호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중학교 2학년이라지만 전시 피난 중이라 나이들이 우리보다 대부분 두세 살 많았었다. 이승욱, 김전일, 황호, 이상조, 이종일, 김제호…… 등이 주동이 되었는데 남포동, 광복동,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보수동 헌책방 골목, 대청동, 용두산 공원, 영도다리 옆, 시청 앞, 부산 본역 앞 까지 그 깡패 세력이 설쳐대며 청소년들을 괴롭혔고 그 악랄하기가 점차로 부산의 일간신문(부산일보, 국제신문, 민주신보)에 사회면 기사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일을 크게 저지르고 있는 사회적으로 문제아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것을 한번 보았는데 서로가 날카로운 돌을 들고 상대의 얼굴이고 머리고 가리지 않고 찍어대는데 선혈이 낭자하게 싸웠다.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는 행동들을 하였다. 당시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깡패들이 자전거 체인을 들고 다니면서 싸움이 붙으면 그 자전거 쇠줄을 마구 휘둘러 상대에게 상해를 입힌다 하는 소리도 널리 퍼졌으니 이 얼마나 잔인하고 철딱서니 없는 행동이었겠는가?

그들은 3학년이 되던 여름 졸업도 못하고 모두 자동적으로 제적 처리가 되었다. 경찰서에서 수배하는 바람에 모두 잠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남포동 거리 서쪽 입구 부산극장 주변이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였는데 그들 부하들(소위 똘마니)에게 친구 상일이가 끌려가서 곤욕을 치를 뻔하였던 것을 나의 임기응변으로 무사히 풀려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행패는 점점 난폭해져서 어른들에게도 피해를 줄 정도가 되었는데, 부산지역의 사회문제가 되어 그들을 체포하라는 경찰의 수배가 내려졌고 특히 우두머리 승욱이와 나머지 6명은 당시 전국적으로 경찰 수배 대상이 되었었다.

이들과 나는 같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무척 잘 아는 관계였고 그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깔보지를 않았다.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때로는 내가 그들에게 충고를 하고 그들이 내말을 어느 정도 듣곤 하는 편이었는데 그들의 근본 성격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그 흉포한 청소년들이 나의 동심의 벗들이라니…… 그들 중 한 사람은 지금 70이 다 되었는데도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아직도 항구에서 뱃일을 하며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한다 하였고, 승욱이는 이민을 갔고 나머지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

내 친구 이영일이도 함남 고등학교를 다녔다. 거제도 피난시절부터 한반 친구였는데 마라톤을 잘하여 교내 중거리 마라톤 대회 땐 우승도 한 친구인데 남포동거리 중간 지점의 남포극장 주변과 광복동에서 설치는 패거리 중 주먹으로 두각을 나타냈었다. 역시 그 친구도 권투도장엘 다녔는데 몸이 빠르고 성격이 강하기로 유별스러웠다.

영일이와 승욱이와 나는 거제도 연초 국민학교에서 모두 한반이었다. 영일이는 20세기 깡패단 안에서 두목 성도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는데 칠성의 승욱이와 어울리는 깡패단 패거리가 달라 서로 패거리들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마주치면 서로 눈짓하여 모르는 척 비껴 다니곤 하였다 한다.

영일이는 그 뒤 1959년에 서울로 와서 일찌감치 마음을 바로잡아 평화시장에서 장삿길로 들어서서 평생 성실히 일하면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아주 성실한 가장이 되어 장성한 자기 자식을 호되게 훈계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까지도 영일이는 70이 가까운 세월이지만 나의 다정한 벗이다. 그러나 그 강직한 인상은 언뜻 여전해 보이나 불교신자인 그는 세상을 넓게 보고 대범하며 또 아주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겸손하기가 짝이 없다.

가끔 그와 우리 몇이 산정호수 등에 바람을 쐬러 다녀올 때면 자연히 추억담이 있게 마련인데 지난 그때의 철없던 어린 행동들을 이야기하면서 씁쓸하게 웃곤 한다. 당시 세월이 지나 한참 못 보던 칠성의 승욱이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몇 차례 더 만났는데 만나 볼 때마다 얼굴 인상이 어릴 때의 순수함은 이미 없어졌고 눈초리가 희번덕대는 것이 아주 불안하고 무엇에 쫓기는 모습인 데다 또 그전에는 없던 잔인한 인상의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거제도 피난 시절의 정리가 있어서 승욱이의 명령으로 그 직속부하(?) 들은 나와 나의 친구들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이미 그들은 범죄자들 같은 인상이 뚜렷했다.

순수한 동심의 친구들이 저렇게 변하다니…… 가정적으로 살펴보면 그들 부모들과 가정은 모두 다 좋으신 분들인데 친구 잘못 만나고 6ㆍ25동란 뒤에 질서 유지조차 어려운 혼탁한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이상과 희망을 드높일 교육 목표점이 뚜렷하지 못하니 자연 그들은 전쟁 후유증에 휘말려 혼동사회에 무방비로 내던져져서 그들 스스로 해결 못할 험한 동물적 의식만 키워졌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사회질서가 무너졌을 때는 정치에 종사한다는 사람들과 공직자의 처신이 가장 모범되어야 함은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제일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공직자, 정치가들이 법을 어기고 처신이 바르지 못해 저렇게 뻔뻔스레 아무렇게나 하는데 우리 국민들이 그들처럼 못할 게 뭐냐?” 하는 식의 국민정서가 팽배한 나라는 그저 퇴보하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질서를 지키고 국가기강을 확립하는 데 동참한다는 것은 법을 잘 지키는 정신으로부터 모든 행실을 똑바로 해 나가는 데 있다고 본다.

이런 고생과 슬픔이 김일성 불법남침 6ㆍ25로 인해 된 것이니 김일성이나 그 추종자들이 책임을 져라 하고 책임질 위치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퍼져 앉아 있으면 그 누가 맥없이 일 놓고 퍼져 앉은 사람들을 돕겠는가. 김일성 불법남침으로 이 난리 통이 되었으니 어떻게 하든지 아직까지도 반성할 줄 모르고 더욱 나대는 김일성 추종 무리들을 경계하고 우리 스스로는 이를 극복할 힘을 키우기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국가발전을 위하여 다시 용감하게 일어설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다. 김일성의 만행이 언제 있었던 일이냐 하면서 마냥 잊고서 산다면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이 내 나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말인가?(계속)

60. 부산 거인 노장군

나의 집이 있는 아미동(초장동과 경계지점) 산꼭대기는 부산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는 데는 아주 적격인 곳이었다. 오른쪽으로 경남중학교 너머 한전 굴뚝이 높이 보이는 그 아래를 지나쳐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끔 자갈치시장에 구경을 가곤 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나 많은지 서로 부딪칠 지경인 시장거리였다. 구경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부두에서 화물을 내리면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수레를 끌며 “짐이요! 짐이요! 짐! 짐!” 하고 외쳐대고 지게에 짐을 진 사람들이 지나간다고 소리를 지르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부르느라고 고함을 질러대지 참으로 거대한 사람의 물결 속에 자갈치 시장은 국제시장과 더불어 외국을 드나드는 뱃사람의 입을 빌리자면 동양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라 했는데 과연 그런 것 같았다.

한번은 자갈치시장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저 사람 보라고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여 그 곳을 바라다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보는 아주 커다란 거인이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지나가는데 다른 사람들의 머리가 그 커다란 사람의 옆구리에도 못 미치는 정도였다. “노장군이 지나간다. 노장군!” 하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모두 웃으면서 감탄을 하며 쳐다보았다.

과연 그 노장군이란 아저씨는 크기도 하였다. 거인이라 할 만하였다. 알고 보니 소문난 씨름꾼이라 하였다. 더 우스운 것은 그 노장군의 친구 한 사람이 머리를 쳐들고 노장군을 쳐다보며 말을 하며 같이 걸어가는데 친구 되는 아저씨가 흡사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허공을 보며 자빠질 듯한 자세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여느 행인보다 더 작아 두 사람이 대조가 되어 모두가 손뼉을 쳐가며 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하며 저거 보라고 하는데 잊혀지지 않는 구경거리였다.

시장바닥은 행인이 많아 비좁을 지경이었으며 고기를 파는 상인 아주머니들끼리 서로 소리지르며 싸움까지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전국의 사투리는 다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따라 자갈치시장에서 쌀장사를 하는 원산 출신의 아주머니 댁을 찾아갔는데 그 댁은 우남공원(뒤에 용두산 공원이라 함) 중턱에 있었다. 좁은 골목을 비집고 올라가는데 좌우로 판잣집이 가득하여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관이었다. 요즈음으로 상상하면 동남아를 다녀온 분들의 현지 관광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광경이었다.

가느다란 막대기를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물위에 떠 있는 집 같은 모양의 판잣집이 언덕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어졌는데 지금 같으면 그런 곳에서 도저히 살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오히려 아미동 언덕배기 여섯 평 남짓한 우리 판잣집은 시내를 내려다볼 수나 있어 숨통이 트이고 고급에 속하는 편이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 집과 붙어 있는 한마당의 옆집에서 거제도에서 같은 반에서 공부한 여자애 김영길을 만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부산에 나와서도 초등학교 6학년을 그대로 다녔다고 한다. 1965년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 김영길을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만나 그가 취직하여 약사로 있는 약국에 가끔 들르곤 하였다. 약국에서 나는 옛날 부산에서의 기억을 말한 적이 있었다. 부산에 살 당시 그 여자애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슨 숙제를 하는지 방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거제도 연초 국민학교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였고 얼굴이 둥그스름하며 예쁜 편이었다. 한번은 그 해 봄 부산으로 이사 나오기 전 거제도에서 산수 경시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그 애를 앞질렀다고 선생님이 칭찬을 하여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 여자애는 그때의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면서 공부만 하고 있었다. 중학생 교복 입고 모자를 쓴 나를 한번 흘끔 보아 줄 수도 있는데 그 때의 아쉬웠던 나의 심정을 훗날 말했더니 “너는 뭐 그렇게 고리타분한 것까지 다 기억하느냐?” 하며 핀잔까지 주며 웃곤 하였다.(계속)


 http://allinkorea.net/
기사입력: 2011/06/25 [13:49]  최종편집: ⓒ allinkorea.net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