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처(이수자)와 딸(윤정) 고발당해
납치범이 납치당한 자를 고발하는 적반하장
 
조영환 편집인


오길남 박사 가족을 북한으로 유인해서 월북시킨 윤이상의 아내와 딸이 채병율(실향민중앙협의회 회장)과 지만원(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에 의해서 검찰에 고발당했다. 이들은 고발장을 통해 "반국가 범죄자로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던 윤이상의 딸 윤정을 무고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그의 처 이수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합니다"라며 "2011.12.경 윤정은 오길남 박사가 구체적 물증도 없이 윤이상이 오길남과 그 가족(3모녀)의 월북을 권유했다는 거짓 주장을 펴, 사자(윤이상)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송두율이 송두율의 정체를 밝힌 황장엽씨를 상대로 고소를 했던 파렴치한 행동처럼 낯 뜨거운 무고행위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오길남의 증언을 담은 수많은 언론들은 윤이상은 물론 이수자도 오길남에게 ‘무얼 망설이세요’(증4의 1항)하면서 입북을 회유했고, 오길남이 독일에 가서 윤이상에게 가족을 살려달라 애원했을 때 윤이상이 오길남 가족의 육성테이프와 사진을 건네주면서 재입북을 강요하는 의미의 협박을 하였다는 기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라며  2011.12.16.경 김정일이 사망하자 이수자 모녀는 평양에 나란히 잠입하여 2011.12.27.경 김정일에 조문을 했습니다. 비록 이들 피고발인들이 독일 국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나 헌법에 분명히 북한은 우리 영토로 명시돼 있고, 이들은 우리 영토인 평양에서 범죄행위를 저질렀기에 엄연히 대한민국 법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서 ‘구라파 거점 북한문화공작원’으로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이는 공안계 공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동맥림 사건은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습니다. 종신징역을 받은 그는 어찌된 일인지 2년 후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그 후 95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간첩 활동을 했습니다. 1990년11월 20일에는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 난 범민련의 공동의장이 됐습니다"라며 고발사실을 밝혔다.
 
또 "예술문야에서의 윤이상은 세계적 작곡가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는 김일성에 충성한 간첩입니다. 예술이 국가의 정체성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평양에는 1992년 10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되었고, 통영에는 2009년에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라며 "이수자와 윤정은 평양에도 김일성으로부터 하사받은 저택이 있고 통영에도 저택이 있으며, 독일에도 있다 합니다. 이수자는 윤정과 함께 독일, 북한, 한국을 마음대로 들락거립니다.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위험한 인물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대한민국을 왕래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 현상을 왜 방치하는지에 대해 검찰당국은 살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고발장을 통해 "2011.12.27. 이수자와 윤정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가 김정일을 조문한 사실이 사진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우리 영토인 평양에 와서 범죄행위(국가보안법위반)를 저질렀습니다"라며 "딸 윤정은 간교하게도 오길남에 대해 무고를 하였습니다. 2011.12.9. 오길남(69) 박사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부친 윤이상이 오길남의 입북을 권유한 사실이 없는데도 권유한 것처럼 주장해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찰에 고소했습니다(증5). 이는 무고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수자와 윤정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여 주시고, 윤정을 무고죄로 처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고발했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윤이상의 처 및 딸에 대한 고발장

고 발 장

수신: 대검찰청장
참조: 대검찰청 공안부

고발인1. 채병율(실향민중앙협의회 회장)
주소:
연락처:

고발인2. 지만원(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주소:
연락처:

피고발인1. 이수자(윤이상의 처)
주소 및 연락처 미상

피고발인2. 윤정(윤이상의 딸)
주소 및 연락처 미상

고발 취지

반국가 범죄자로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바 있었던 윤이상의 딸 윤정을 무고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고, 그의 처 이수자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합니다. 2011.12.경 윤정은 오길남 박사가 구체적 물증도 없이 윤이상이 오길남과 그 가족(3모녀)의 월북을 권유했다는 거짓 주장을 펴, 사자(윤이상)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를 했습니다. 이는 마치 송두율이 송두율의 정체를 밝힌 황장엽씨를 상대로 고소를 했던 파렴치한 행동처럼 낯 뜨거운 무고행위입니다.
 
오길남의 증언을 담은 수많은 언론들은 윤이상은 물론 이수자도 오길남에게 ‘무얼 망설이세요’(증4의 1항)하면서 입북을 회유했고, 오길남이 독일에 가서 윤이상에게 가족을 살려달라 애원했을 때 윤이상이 오길남 가족의 육성테이프와 사진을 건네주면서 재 입북을 강요하는 의미의 협박을 하였다는 기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2011.12.16.경 김정일이 사망하자 이수자 모녀는 평양에 나란히 잠입하여 2011.12.27.경 김정일에 조문을 했습니다. 비록 이들 피고발인들이 독일 국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나 헌법에 분명히 북한은 우리 영토로 명시돼 있고, 이들은 우리 영토인 평양에서 범죄행위를 저질렀기에 엄연히 대한민국 법에 의해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발 사실

1.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서 ‘구라파 거점 북한문화공작원’으로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이는 공안계 공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동맥림 사건은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동백림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습니다. 종신징역을 받은 그는 어찌된 일인지 2년 후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그 후 95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간첩 활동을 했습니다. 1990년11월 20일에는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 난 범민련의 공동의장이 됐습니다.

당시 안기부는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윤이상은 80.11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로부터 고려연방제 창립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해 해외대표로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만큼 북한의 지령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84.12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전위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88.7 동경에서 정부의 대북교류 및 개방화 추세에 편승, 휴전선에서 남북 합동음악제 개최를 제의, 북한 측으로부터 즉각적 찬동을 얻는 등 북한의 문화공작에 따라 남북음악제를 추진했고, 17회에 걸쳐 음악제 구실 등으로 입북하여 김일성을 접촉하는 한편, 김일성 75회 생일선물로 작곡하여 바친 반미, 반파쇼, 통일투쟁을 내용으로 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 자작곡을 10회에 걸친 연주회를 통해 발표하는 등 북한의 조종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북한의 문화공작원이다”

예술문야에서의 윤이상은 세계적 작곡가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는 김일성에 충성한 간첩입니다. 예술이 국가의 정체성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평양에는 1992년 10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되었고, 통영에는 2009년에는 ‘윤이상 음악당’이 건립을 추진하였습니다. 통영시(당시시장 진의장)가 국비와 도비 1,480억원을 투입해 경남 통영시에 ‘윤이상 음악당’건립에 나섰습니다.

2000년 북한이 펴 낸 김일성 교시집 ‘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등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성과를 통하여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올렸습니다....선생은 범민족통일음악회를 통하여 북에서 남조선당국자들의 기만선전을 깨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선생이 조국통일을 위해 앞으로 자기의 힘과 재능을 다 바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나는 선생이 이 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습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주체89-2000년 1월20일)

“선생이 민족의 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북남동포호의 소집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북남동포회의를 하자는 선생의 제의가 매우 좋은 발기라고 생각하면서 전적으로 지지합니다...나는 선생과 같이 민족 분렬을 끝장내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이 있기 때문에 조국통일 위업은 반드시 앞당겨지리라고 확신합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선생이 주체사상은 현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혁명과 건설에서 백전백승하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은 주체사상을 지침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아무 때든지 선생이 다시 와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재서독교포 윤이상과 한 담화. 2000년 1월20일)

“위대한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윤이상 선생을 아껴야 한다고 한 것은 음악계에서 그런 재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입니다...그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고 재간둥이입니다.”(북한 발간 음악연구 2000년 28호, 리철우가 쓴「내가 체험한 윤이상 음악」中)

윤이상은 1989-91년 사이에 황석영과 함께 김일성에게 불려가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습니다. 황석영은 시나리오를 써서 25만 달러를 보상받았고, 윤이상은 배경음악 ‘임을 위한 행진곡’을 깔아주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골수좌익 황석영이 5.18에 바치기 위해 작사한 노래이며 좌익들은 공식행사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임을 위한행진곡’을 부릅니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들 좌익들은 박정희도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해놓고 온갖 욕을 퍼붓습니다.

윤이상은 김일성이 직접 만든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음악으로 깔아주었으며 그 대가로 5,500평 대지에 15층짜리 음악당을 선사받았습니다.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 ‘님’은 김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말은 5.18이 김일성님에게 바치는 교향곡이라는 뜻입니다.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에서 황석영과 윤이상의 이름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 이수자는 완전한 김일성의 충복이며, 북한이 발간한 ‘금수산기념궁전방문록 실화집’“영원한 추억”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증1, 4-4쪽 1항 표시)

《아- 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떠나신지 벌써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 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수령님께서 보고 계실 것입니다. 부디 평안을 누리시고 영생불멸하십시오. 우리의 강토를 지켜주시고 민족의 념원인 통일됨을 열어주십시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령전에 큰절을 올립니다. (주체88년 7월 8일 리수자)》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민족의 재간둥이라고 부르시던 저의 남편 윤이상은 오늘 병원 병석에 누워있어 저와 같이 수령님 령전에 가서 수령님을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만사의 원리라고는 하지마는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신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항상 수령님께서 저희들 곁에 계심을 느끼며 수령님을 추모할 때마다 그 인자하시고 인정 많으시고 눈물 많으신 우주와 같이 넓으신 덕성과 도량, 세상의 최고의 찬사를 올려도 모자라는 수령님, 살아계셨어도 그러하였고 돌아가신 뒤도 부디부디 불우한 저의 민족의 운명을 굽어 살펴주소서. 수령님 령전에 무한한 평화와 명복을 빕니다. (1995년 7월 8일. 리수자)》

3. 이수자와 윤정은 평양에도 김일성으로부터 하사받은 저택이 있고(증1의 2쪽 좌측사진, 증2의 1항 표시, 증4의 3항 표시) 통영에도 저택이 있으며(증1의 4쪽 사진, 증2의 2항 표시), 독일에도 있다 합니다. 이수자는 윤정과 함께 독일, 북한, 한국을 마음대로 들락거립니다.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위험한 인물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대한민국을 왕래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이 현상을 왜 방치하는지에 대해 검찰당국은 살펴야 할 것입니다.

4. 2011.10.31. 조선일보(증2)에는 기자가 윤정에게 “'통영의 딸(오길남 씨 부인 신숙자 씨 모녀)'을 돌아오게 힘써줄 수 있나”고 묻자 윤이상의 딸 윤정은 “이 여자 미쳤구먼”(증2의 2항표시)이라고 쏘아붙였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신숙자 구출운동이 전국에서 열기를 얻고 있는 이 때 같은 통영에 산다는 윤정이 동정심이 아닌 적개심을 표출한 것입니다.

5. 2011.12.27. 이수자와 윤정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가 김정일을 조문한 사실이 사진으로 밝혀졌습니다(증1의 1쪽 사진, 증3 사진). 그들이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엄연히 헌법에 명시된 우리 영토인 평양에 와서 범죄행위(국가보안법위반)를 저질렀습니다.

6. 딸 윤정은 간교하게도 오길남에 대해 무고를 하였습니다. 2011.12.9. 오길남(69) 박사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부친 윤이상이 오길남의 입북을 권유한 사실이 없는데도 권유한 것처럼 주장해 사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검찰에 고소했습니다(증5). 이는 무고입니다.

윤이상은 송두율 김종한 이수자 등과 조직적으로 연대하여 오길남 가족의 입북을 권유했고, 오길남이 탈출하여 독일에 다시 왔을 때 윤이상은 요덕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여 찍은 오길남 가족 3모녀 사진과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주면서 재입북을 강요했고 협박했다는 진술들이 못 매체들을 도배하고 있습니다.(증2 1항 표시, 증3 증4 1,2,3항 표시, 증6, 1항 표시, 증7 1,2,3항 표시, 증8 4쪽 1,2,3항 표시). 이수자 역시 오길남의 입북을 군유했습니다,

증4의 1-2항:
오씨는 재독 작곡가 윤이상씨가 1985년 자신의 첫 입북을 적극 권유했으며 자신이 단신(單身) 탈출해 부인과 딸이 북한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러 찾아갔을 때에도 윤씨가 북한 당국한테 받아온 가족사진과 함께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며 재입북을 강권했다고 증언했다. 오씨는 당시 윤씨뿐 아니라 부인인 이수자씨도 "북에도 2000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어요. 왜 망설이시죠"라며 평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작곡가 윤씨의 딸은 이 같은 오씨의 증언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오씨는 이런 윤씨 등의 권유와 종용을 받아 독일에서 파독(派獨) 간호사 출신인 부인 신씨와 두 딸을 데리고 북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혼자 탈출했다. 오씨는 단신 탈출 이후 수십년간 북에 남은 가족을 빠져나오게 하려고 발버둥쳐왔다. 오씨 가족들은 요덕수용소에 수용됐다는 것이 알려진 다음 그 후 소식이 끊겼으나 평양 부근 통제구역으로 옮겨져 아직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올해 초 일부 탈북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신씨의 고향인 통영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과 반기문 사무총장이 잇달아 유엔 차원의 개입 가능성을 밝히는 등 국제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증6의 1항:
오길남이 탈출하자마자 처 신숙자와 혜원(76년 생). 규원 (79년 생) 두 딸은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에 갇히고 만다. 87년 4월 윤이상으로부터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는 첫 질책을 받았고, 10월 아내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이때 북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 않자 윤이상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으로 몰아붙이며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91년 처자식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들려주며 북으로 돌아가라고 또 다시 강권했다. 윤이상에 대해서는 북한 측 자료가 더 정확하고 방대하다. . 한 사나이는 처자식을 형극에 땅에 몰아넣고 죽지 못해 살고 있고, 또 한 남자는 반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다음가는 영웅이 되어 애국자로 추앙받고 있다.

증7의 1항:
오길남씨는 당시 재독 유학생으로 반정부 활동을 벌이다 밀파된 북한공작원과 역시 재독 음악가인 윤이상, 경제학자 송두율 등의 회유와 종용에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5년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을 데리고 월북했다. 이후 대남간첩 훈련인 밀봉교육을 받고 칠보산 연락소 '구국의 소리' 대남방송 요원으로 배치돼 남한 내에서의 지하당 방송을 위장한 이 방송의 대북 선전요원이 된 것이다.

증7의 2항:
그후 오 박사가 1985년 유학 생활 15년 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자 "좋은 조건으로 북에서의 교수직과 아픈 아내를 고쳐주겠다"고 감언이설로 꼬득인 윤이상, 송두율, 김종한 등의 회유와 평소 북한을 동경하던 이상에 의해 신숙자씨의 결사반대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북행을 결행한 것이다. 1986년 12월13일이었다.

증7의 3항:
오길남 박사가 가족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탈북 후 윤이상으로부터 재입북종용과 더불어 1991년 받은 몇 장의 사진과 육성녹음 테이프가 전부다. 오 박사는 이 날 "이후 국제엠네스티를 통해 생존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했고, 이후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통해 1999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이후로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 요덕정치범수용소 출신이기도 한 탈북 강철환 기자는, 1987년 말에 요덕수용소에 갇힌 신숙자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고, 방에 불을 내 가족이 함께 자살하려고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고 정치범수용소 참상을 폭로하면서 보고하기도 했다.

증8의 1항
그 시점에 베를린에서 야채상을 하던 김종한과 송두율이 나를 유인했다. 송두율은 내게 '부산대 교수 하던 윤노빈도 북한 갔고, 법학자 고흥식, 이창균도 북으로 갔다. 당신이 기댈 데가 어디 있느냐. 집사람 건강도 좋지 않은데'라며 은근히 입북(入北)을 권했다. “윤이상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한다. 이제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북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

증8의 2-3항
오길남 사건은… 獨 경제학 박사 "송두율·윤이상 권유로 월북"오길남씨는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70년 독일로 유학 가 브레멘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다. 1972년 통영 출신의 동갑내기 파독 간호사 신숙자씨와 결혼해 혜원(1976년생), 규원(1979년생) 두 딸을 뒀다. 1974년 독일에서 송두율 등과 함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만들어 반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송두율과는 부부끼리 절친한 사이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독일로 정치망명했다. 1985년 윤이상 등으로부터 "북에 가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아달라"는 권유를 받고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북해 '구국의 소리'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했다. 1986년 11월 유럽의 남한 유학생 2명을 유인해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덴마크로 갔다가 코펜하겐 공항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 후 독일에서 가족 송환 운동을 펼치다 실패하자 1992년 5월 자수해 귀국했다. 그를 통해 북한이 남한 내 지하방송이라고 우기던 '구국의 소리'와 '민중의 메아리'의 실체가 밝혀졌다.

결 론

이수자와 윤정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여 주시고, 윤정을 무고죄로 처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증거자료

1-8( 홈페이지 생략)

2011.12.29.
고발자1. 채병률(실향민중앙협의회 회장)
고발자2. 지만원(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의장)

대 검 찰 청 귀 중 http://systemclub.co.kr/



기사입력: 2011/12/29 [22:25]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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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대한 사건을 "좌경 검판사"들에게 배당 시켜선 안된다. 가을고수 11/12/31 [08:00] 수정 삭제
  요즘 좌경 검판사들이 오래된 간첩사건등을 무죄라 뒤집는가 하면
전교조을 보호 하는등 기소권과 재량권을 남용 하면서
녹을적으로 역적행위를 표출하고 있는 이때.
일생을 간첩으로 생활한짓을 떳떳한양 살다 급사한 역적 윤이상 가족들을
뉘우칠수 있도록 그들을 고발한 지만원 박사님과 애국님들께 먼저 감사 드립니다.
따라서 이번 사건만은 좌경 이념에 물든 부도덕한 검판사가 아닌
도덕성 있고 법리를 제대로 공부한 올바른 검판사님들에게 사건을 배당하여
올바른 수사와 판결이 있게 하여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힘 없는 우리 민초들도 다 보고 느끼고있읍니다. 애국님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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