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3.1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규정
“민족대표 33인은 일제에 투항한 부르주아들”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북한, 3.1운동을 계급투쟁으로 규정...명칭도 3.1인민봉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아닌 레닌의 러시아 10월혁명 영향” 주장
“김형직이 주도했고 김일성이 7세 나이에 스스로 참가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일제에 투항한 부르주아 상층분자들”
봉기의 가장 큰 실패원인에 탁월한 혁명적 수령 없었다는 점 꼽아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책동’도 실패원인에 포함시켜

북한은 3.1운동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북한의 문헌들은 3.1운동이 서울의 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평양에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이 이끈 독립만세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먼저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손병희 등 33인이나 유관순이 아니라 김형직이 일찍이 혁명의 씨앗으로 뿌려놓은 평양숭실학교의 애국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돼 일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의 교과서와 김일성 저작집, 역사서적, 백과사전 등 문헌들은 또한 1919년 3월 1일 김일성이 만 7살이 채 안된 나이(1912년 4월 15일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양의 만경대에서 보통문까지 행진했다고 적고 있다. 이들 문헌은 김일성이 어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짚신까지 벗어들고 뜀박질로 시위 대열을 따라갔다고 적고 있다. 또한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다.

김형직은 평양 숭실학교를 중퇴한 이력은 있으나 그와 3.1운동을 연결시킬 아무런 근거나 자료가 없다. 북한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김형직은 1917년 10월 ‘조선국민회’ 설립사건으로 이듬해 체포돼 수감중이어서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다.

북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3.1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 만 명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 왔으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3.1인민봉기’로 이름을 바꾸고, 3.1 인민봉기가 평양에서 김형직 주도로 일어나 각지로 확산됐으며 나이어린 김일성이 참가했다고 적고 있다. 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이름을 바꾼 것은 이 운동이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소위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 일으킨 계급투쟁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평양의 백과사전출판사가 2000년에 펴낸 ‘조선대백과사전’ 13권 458쪽을 보면 3.1인민봉기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등 각계각층 애국적인 인민들의 희생적인 투쟁이었으나 평화적 시위가 폭동적 시위로 변하자 이에 놀란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분자들이 시위를 막아보려고 책동했다고 적고 있다.

이 사전은 특히 408쪽에서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를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인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민족대표를 자처하여 나선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헛된 기대를 걸고 청탁과 구걸의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투항주의 분자들”이라고 매도했다. 이와 관련, 북한이 펴낸 역사서적 ‘근대조선력사’는 3.1인민봉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1917년 마르크스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도하에 단행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인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33인이 약속을 어기며 독립선언식 장소를 당초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 요리집인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청년학생들과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고조되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면서 “태화관에 모인 뒤에도 그날 오후 2시 먹자판을 벌여놓고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은채 불교대표 한용운의 짤막한 연설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자수, 대부분 투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사전은 그동안 외면해오던 유관순에 대해서는 “3.1 인민봉기 때 일제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운 여학생” 정도로 간략하게 처음 소개했다.

북한의 문헌들은 3.1인민봉기가 세계 여타 식민지예속국가 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에 고무적인 영향을 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그리고 혁명적인 당(黨)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3.1인민봉기는 어떠한 혁명운동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조선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에게 남겼다고 주장한다.

문헌들은 실패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인으로 각각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과 미국의 책동을 들고 있다. 조선대백과사전은 13권 459쪽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일제의 탄압만행을 적극 지지하고 부추겼으며 저들의 선교사, 의사 등을 내세워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반일항쟁의 기운을 가라않히려고 책동했으며 투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독립청원운동’의 테두리안에 머물러있게 하려고 집요하게 날뛰었다”고 적고있다.

북한의 역사 왜곡 중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는 현대사의 시발점을 우리와 다르게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 광복 이후를 현대사의 시발로 보고 있으나 북한은 김일성이 만주 지린(吉林)의 육문(毓文)중학교 1학년 때인 1926년 10월 27일 불과 14세의 나이로 결성했다고 주장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을 현대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의 날조다. 북한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처음 언급된 책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 지음, 평양: 인문과학사, 1968)이다. 만약 1926년이 현대사의 시발이라면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만들었다는 보도나 기록이 1968년 이전에 있어야 하나 당시의 어느 문헌이나 언론보도에도 이런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날조된 이 내용은 북한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기사입력: 2014/02/27 [20:39]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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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뀌는 소리 반도지기 14/02/28 [10:55] 수정 삭제
  33인이 일제에 투항한 부르주아들이라니 참으로 방귀 뀌는 소리같다. 불의에 항거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일수록 힘들다. 항거하지 않고 부화뇌동하면 그들의 부를 그대로 누릴 수 있는데 미쳤다고 항거하나. 사실 이러한 친일파들이 33인 보다 수백배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는 판이니 저항하는 것이 정당하나 브루주아지가 항거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항거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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