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이주성이 경험한 유가강의 정체
북한에서 만난 탈북자를 외면한 유우성
 
조영환 편집인


머리가 비상한 탈북자로 알려진 이주성씨가 북한에서 유우성(유가강)을 만난 체험을 인터넷에 올렸다고 한다. 이주성씨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에 북한의 특수군이 침투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다. 이주성씨는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사법당국이 유가강의 북한 행적을 알고 올바른 조사를 하기 바래서"라며 "유가강의 사건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혼란과 불신을 조장하고 어느 특정의 정치 장사꾼들이 불순한 목적을 실현하는 도구나 구실로 이용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주성는 북한에서 생며이 걸린 인연까지 가지게 됐던 화교 간첩혐의자 유가강의 정체를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고백했다.

이주성씨는 유우성(유가강)의 과거 북한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유가강은 내가 탈북 하기 전 살던 북한 국경도시 회령시에서 유별난 인연으로 알게 된 화교(북한에서 살면서 중국 국적을 가진 한족)출신의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다"며 "말이 별로 없고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지 않던 유가강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는 그런 인물로 등장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가강의 집은 회령시 성천동 '남문여관' 후문에서 150m가량 떨어져 있는 거리에 높은 담장으로 들러 싸인 단층 독집(방 크기 :40평 정도 / 마당 50평 정도)이다"며 "그의 집은 회령시에서 돈과 재산이 5번째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생활이 유족한 중국 화교 집이었다"고 회상했다.

"나의 친구가 중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여 보내준 것이 그가 한국으로 도주를 하는 바람에 국가 보위부에 발각 되면 수용소에 끌려갈 판이었다. 북한에서는 한국 행을 도와준 사람은 무조건 공개처형 아니면 수용소에 넣어버리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북한을 급하게 떠나게 되었다"며 이주성씨는 "2006년 10월 하나원을 나와 정부로부터 서울 송파구 거여2동 임대 아파트에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며 그해 11월 중순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4년 전 북한에서 중국으로 갔다고 하던 유가강을 만나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에도 이주성씨는 북한에서 밀접하게 만났던 유가강(유우성)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주성씨는 "2006년12월 관계 기관에 유가강의 행적에 대해 알리고 추적해 보라고 이야기 했었다. 2008년 5월 나는 마포구 X X 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유가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며 "그로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탈북자로 위장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언론에 보도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최근에 북한에서 유가강을 알게 되어 지나온 과정을 짧게 돌이켜 보았다. 북한에서 부러운 것 없이 살던 유가강이 왜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북자 행세를 해가며 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가강이 탈북민들과 단체들의 명단을 북한 보위부에 넘긴 것이 사실인지…"라고 물었다. 이주성씨는 북한에서도 풍족한 유가강이 왜 탈북자로 위장해서 남한에 왔는지에 대해 의혹을 가졌다.

"유가강의 사건을 놓고 그를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론을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며 이주성씨는 "유가강 사건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 끌고가 자신들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이용하려는 일부 정치 장사꾼들과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국가안보를 총괄하는 국정원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찟한 생각이 들곤 한다"고 했다. 이주성씨는 "북한 지령을 받지 않고서야 백주에 한나라의 안보를 총괄하는 기관을 뒤집어 놓으려고 난리를 부릴 수 있겠는가"라며 유가강에 대한 자신의 평을 했다. 유우성을 빙자하여 국정원을 뒤흔드는 법조계나 언론계의 좌익분자들을 주목할 기회다. [조영환 편집인: http://www.allinkorea.net/]



실제 간첩 유가강을 경험했던 분이 쓰신 글이다(임박사 일베회원)
http://www.ilbe.com/3181742780 2014.03.19

묶어서 올려달라고 해서 한번에 올린다.
이주성이란 분이 쓰셨는데, 금과 옥조같은 글입니다.
북한에서 알고 지낸 화교 유우성

최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서울 공무원 간첩 사건의 주인공 유우성(북한에서 본명 유가강)은 누구인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사법당국이 유가강의 북한 행적을 알고 올바른 조사를 하기 바래서이다. 나의 글이 유가강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있어 그를 놓고 공방을 벌리는 정치세력이나 법조인들에게 불리 또는 유리하게 되겠는지는 법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대한민국의 사법기관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다만 유가강의 사건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혼란과 불신을 조장하고 어느 특정의 정치 장사꾼들이 불순한 목적을 실현하는 도구나 구실로 이용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가강은 내가 탈북 하기 전 살던 북한 국경도시 회령시에서 유별난 인연으로 알게 된 화교(북한에서 살면서 중국 국적을 가진 한족)출신의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다. 말이 별로 없고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지 않던 유가강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는 그런 인물로 등장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유가강이 '간첩이다. 아니다.'를 떠나 북한에서 내가 그를 알게 되어 지낸 3년 남짓한 기간 보고, 듣고, 느낀 유가강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리는 것이 국가와 국민들에게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 그의 행적을 알리기로 마음 먹었다. 몇 년째 끌어오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사건을 빨리 마무리 하는 것이 유가강 본인에게도 좋고 사법기관과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다.

저의 글을 보시는 분들은 그가 북한 보위부의 임무를 받고 탈북자로 가장하여 남파 된 간첩인지 아닌지를 알아서 판단 하시기 바란다. 유가강의 집은 회령시 성천동 '남문여관' 후문에서 150m가량 떨어져 있는 거리에 높은 담장으로 들러 싸인 단층 독집(방 크기 :40평 정도 / 마당 50평 정도)이다. 그의 집은 회령시에서 돈과 재산이 5번째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생활이 유족한 중국 화교 집이었다. 화교라고 하면 돈과 재산이 많다는 것은 북한에서 살아 본 화교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닿아 있는 국경도시들인 신의주, 혜산, 무산, 회령, 온성 등지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은 돈과 재산이 많기로 북한에서는 유명하다. 그 이유는 북한이 1990년대 중반기 부터 시작 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갈 때 북한 화교들은 중국 국적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드나들면서 식량을 비롯한 식료품, 생활필수품, 가정용품, 전자기기들을 화물차로 가득 실어 북한으로 가져다 팔곤 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고장의 장사꾼들과 타지방(청진, 김책, 단천, 함흥 등) 앞쪽지방의 대도시들에서 온 장사꾼들에게 상품들을 시장 가격보다 조금 싸게 다량으로 넘겨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폭리를 얻곤 했었다. 유가강의 집은 회령에서 주로 TV, 녹화기등 가전제품을 중국에서 많이 가져다 팔곤 한 것으로 기억 된다. 유가강을 내가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알게 된 것은 친구를 통해 서이다. 그를 친구부터 소개 받기 전에도 나는 한 달에 1~2번 꼴로 그의 집에 찾아가 중국에서 가져온 TV와 녹화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들을 구입해 청진에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주거나 그들이 회령으로 들어오면 유가강의 집에 데려가 소개해 주곤 했다. 2000년대 초기 나는 회령에서 중국과 무역업을 시작 했었다.

유가강을 가깝게 알게 된 동기는 핸드폰이 인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무역업을 한다는 것은 중국의 상품 가격을 알고 물자를 내오는 날자와 시간을 정해야 하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으면 무역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가강의 집은 중국에 친척들이 많아 중국에서 장사 물자를 내오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와 인연을 맺은 것은 회령시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 한 사람인박원철(가명)의 아내 최순옥(가명)이 때문이었다. 2001년봄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는 박원철이 나에게 자신의 아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령시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고있는 중국화교가 중국으로 전화 할 일이 있어 그러니 핸드폰을 사용하게 하면 전화비를 넣어 주겠다고 했다. 북한에서 핸드폰 전화비는 중국에서 넣어 주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그 당시 국경 지역에서만 중국과 핸드폰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기지국도 중국에 있었다. 무역을 갓시작한 나로서는 전화비를 자주 넣어 달라고 중국에 부탁하기 몹시 부담스러운 때여서 전화비를 넣어 주겠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 당시 북한에서 핸드폰을 남에게 쓰게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한 것은 핸드폰 사용에 대한 북한 사법당국의 금지령이 내렸었기 때문이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거나 사용하는 것은 반국가 행위와 같이 취급했다. 핸드폰으로 국가비밀을 넘기거나 적대행위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기를 빌려주었다가 나에게 핸드폰이 있다는 것이북한 보위부에 알려지는 날이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 등 엄청난 곤욕을 치르어야 하는 일이다. 보위부 사람들은 핸드폰 소유자를 체포하여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이유, 구입경로, 핸드폰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

특히 한국과 전화한 일이 없는가를 별의 별 방법으로 자백을 받아 내곤 했다. 핸드폰 주인뿐 아니라 핸드폰을 판사람, 한번이고 두번이고 사용한 사람이라면 죽기를 각오해야 했다. 국경지역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 가거나 공개 총살을 당한 사람들의 80% 이상이 핸드폰 사용자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잘 알 수 있다. 핸드폰으로 한국과 통화를 하다 북한 보위부에 잘못 걸려 반역행위로 낙인 찍히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 가든가 아니면 공개처형을 당해야 한다. 친구 박원철의 아내 최순옥(회령시 동 담당 병원의사)은 유가강과 회령시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유가강은 청진 의학대학에 통신(일하면서 자체로 대학 공부를 하는 제도)을보며 회령시 병원에 준의사(의사가 되기 전 직책)로 근무하고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누구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때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박원철이나 그의 아내 최순옥이 내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이유는 그의집 아파트에서 중국과 전화통화가 잘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과 전화를 할 일이 있으면 박원철의 집에서 전화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변의 위험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핸드폰으로 전화하는 일을 박원철네 집에서 허물없이 할 수 있은 것은 박원철과 그의 아내 최순옥과 우리 집 사이 관계가 인간적으로 가까워서이다. 박원철의 아내 최순옥은 나의 아내와 어릴 때 부터 한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이었다. 최순옥은 유가강이 화교인 까닭에 생활적으로 신세를 많이 지고 또 그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다 보니 그들 사이도 어지간히 가까운 모양이었다. 최순옥이 나에게 유가강이 중국 친척집에 전화 할 일이 있는데 핸드폰을 한번 쓰게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 바람에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드폰을 사용하다 보위부에 나에게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이라고 하자 최순옥은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한 것은 유가강이 회령시 보위부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단속을 당해도 문제가없다는 것이었다. 최순옥의 말에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이유는 보위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시보위부에서 필요한 물건이라든가, 생활필수품은 화교들을 통해 많이얻고 있기 때문에 화교들과 보위부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깝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화교들은 중국에서 필요한 물건과 식량을 트럭으로 가져와 북한 장사꾼들에게 팔아야 살수 가 있다. 북한에서는 화교들이 보위부의 요구나 말을 듣지 않으면 중국에 오갈 수 없기 때문에 싫든 좋든 북한 보위부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여권을 보위부에서 발급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한번은 유가강과 함께 최순옥의 집에서 전화를 하고나서 소주를 한잔 함께 한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유가강에게 어떻게 중국에 자주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가 물었더니 웃으며 회령시 보위부의 요구를 들어주면 쉽게 중국여권을 낼수 있기 때문에 자주 중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었다. 회령시 성천동 담당 보위부 지도원은 유가강의 집에 제집 드나들 듯이 했고 회령시 보위부에서도 유가강의 모습을 여러 번 보아온 나로서는 최순옥이 유가강의 말이 맞다고 생각 했었다. 친구 박원철과 아내 최순옥이장담하고 또 그들과 가까운 사이라 내가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들어주기로 했다. 전화비를넣기 힘든 때어서 유가강이 중국 전화를 몇번 하고 위안화 100원을 전화비로 넣는 것도 괜찮은 장사였다. 전화비 위안화 100원을 넣으며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때어서 3개월 정도를 쓰곤 했다.

한마디로 핸드폰을 함께 사용하는 정도이면 웬만히 가깝거나 사람 파악이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2002년12월이라고 생각된다. 한번은 회령천 가까이 있는 회령인민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의 아파트 집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다 북한 국가보위부 전파 탐지국 사람들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평양 국가보위부에 적을 두고 국경지역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중국과 한국으로 오가는핸드폰 전파를 탐지하거나 추적하여 범인을 잡아내는 임무를 맞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회령에도 그런 사람들이 전파탐지기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중국과 핸드폰 통화를 하면 장소를 추적하여 체포해내고 있었다. 그들도 회령시 어느 장소가 핸드폰 통화가 되고 안되고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전파 탐지국 요원들이 차를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핸드폰 전파가 들어오면 차로 이동하여 급습하기 때문에 핸드폰 통화를 5분 이상 하면 안되었다.그날 따라 중국과 통화가 조금 길어져 10가량 했는데 그만 국가보위부 전파 탐지국 사람들이 내가 전화를 하고 있던 집 문을 부스고 들어오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일로 1주일 가량 회령시 보위부에 끌려가조사를 받았다. 중국에서 물자를 내오는 일로 핸드폰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나의 직업이 무역기관 책임자였고 평양 본사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다행히 벌금40만원 물고 삼성 핸드폰을 빼앗기고 풀려났었다. 그때 유가강이 전화했던 전화번호가 그핸드폰에 남아있어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핸드폰에 찍혀 있는 전화번호의 출처를 대라고 곤욕을 치르며 유가강이 중국에 전화 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유가강이 보위부에 끌려가 엄청난 처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일 없는 것을 보고 확실히 보위부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다른 일반 사람들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가강과 나는 핸드폰으로 중국과 전화를 하면서 잘 아는 사이가되었다. 2003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한번은 내가 중국에서나오는 상품들의 가격을 유가강의 친척들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중국 가격을 알아야 북한에가지고 나오면 얼마나 마진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가강에게 부탁한지 2주 정도 지나도 그가 나타나질 않아 그의 집에 가보니 그의 부모들이 하는 말이 당분간 집에 없다고 했다.

그 뒤로 여러 번 찾아가 유가강의 부모님들에게 아들과 내가 약속한 일을 말하고 유가강이 어디 갔는지 말해 줄 수 없는가라고 따졌다. 그때야 그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 유가강이 중국으로 영원히 살려고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했다. '물건 가격을 알아 봐주겠다고 약속 해놓고 가면 간다고 말이나 하고 갈 것이지…' 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렇게 유가강이 다시는 볼수 없으리라 했던 나는 뜻밖에 한국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내가 북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나의 친구가 중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여 보내준 것이 그가 한국으로 도주를 하는 바람에 국가 보위부에 발각 되면 수용소에 끌려갈 판이었다. 북한에서는 한국 행을 도와준 사람은 무조건 공개처형 아니면 수용소에 넣어버리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북한을 급하게 떠나게 되었다.

2006년 10월 하나원을 나와 정부로부터 서울 송파구 거여2동 임대 아파트에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중순 경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날 오후 5시경 밖에서 일을 보고 4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던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년 전 북한에서 중국으로 갔다고 하던 유가강이 나의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사라져 가는 유가강의 뒤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내가 잘못 보지 않았나.' 보고 또 보아도 분명이 내가 알던 북한 회령의 유가강이었다. 며칠 동안은 서나 앉으나 그의 생각이었다. 내가 잘 못 보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갔다는 화교인 유가강이 어떻게 한국에 와 있을까?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 돈을 벌려 많이 온다더니 유가강이도 돈을 벌려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다.

유가강의 집은 북한 회령에서 잘 살고 돈이 많기로 소문난 집인데 한국에 돈 벌려 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다면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한국에 왔을까?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이런 생각 하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유가강을 보게 되었다. 단지 아파트 보도블록에서 만났을 때 나는 유가강에게 북한 회령에서 오지 않았는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다 할 아무런 대꾸 한마디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를 지나쳐 보내고 나서 나는 '회령의 유가강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핸드폰 사용을 함께한 내가 유가강을 몰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가강이 나를 피할까. 수수께끼 같은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던 나는 유가강이 어디서 사는지 알아볼 생각을 해보았다. 후에도 그와 한 아파트에서 사는 까닭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고 유가강이 올라가고…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는 복도식으로 되어 있어 올려다보면 사람이 집을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나오자마자 그가 어디로 가는지 밖에서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가강이 내가 살던 집의 위층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달 정도 지나 나는 우편배달을 해볼 생각으로 9인승 스타렉스 승합차를 할부로 구입했다. 어느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유가강이 웬 여성과 대우자동차인 마티즈 같은 디자인의 빨강색 경차를 타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2006년12월 관계 기관에 유가강의 행적에 대해 알리고 추적해 보라고 이야기 했었다. 2008년 5월 나는 마포구 X X 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유가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탈북자로 위장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언론에 보도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최근에 북한에서 유가강을 알게 되어 지나온 과정을 짧게 돌이켜 보았다. 북한에서 부러운 것 없이 살던 유가강이 왜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에서 한국으로 탈북자 행세를 해가며 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가강이 탈북민들과 단체들의 명단을 북한 보위부에 넘긴 것이 사실인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마땅이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가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고 하는 그가 증언한 이야기를 들어보며 여러 가지 개인적 생각을 해보게 된다. 유가강을 처음 한국에서 만났을 때 관계기관이 나와 함께 '북한 쪽의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으면 이번과 같은 황당한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다.

나는 유가강의 사건을 놓고 그를 옹호하는 일부 사람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여론을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독재자의 칼에 맞아 쓰러져가도 입 한번 뻥긋 안 하고 외면하던 사람들이 수사가 마무리 되기도 전에 살판났다며 왜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유가강이 북한 보위부 임무를 받은 간첩인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유가강 사건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 끌고가 자신들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과 이해관계에 이용하려는 일부 정치 장사꾼들과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국가안보를 총괄하는 국정원을 해체시키고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찟한 생각이 들곤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한 지령을 받지 않고서야 백주에 한나라의 안보를 총괄하는 기관을 뒤집어 놓으려고 난리를 부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법기관의 수사가 올바른 방향에서 진행되어 이번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 어느 특정 기관이나 사람들을 흠집내고 파면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에 악용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정부와 국민들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를 얻고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어 보려는 그 어떤 행위도 단호히 배격하고 유가강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하여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http://cafe.naver.com/wkdbqnrgksdls2020/555






기사입력: 2014/03/20 [01:04]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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