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은 '김일성 지령'으로 발발”
서옥식 박사, 관련 북한 문헌 기술 내용 소개
 
조영환 편집인

“김일성의‘單選·單政반대’호소 받들어 제주도민이 나섰다”

괴뢰 군경의 탄압에 의한 저항..노무현정부 규정과 유사

북한은 ‘4.3 사건’ 대신 ‘4.3 인민봉기’로 표기

“미제축출·통일중앙정부수립 위한 구국투쟁이었다”

 

 

3일은 제주 4.3사건 69주년. 제주 4.3사건은 대구 폭동(1946년 10월 1일),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19일)과 함께 해방과 건국의 전후시기에 공산당(남로당)이 일으켰던 3대 유혈폭동의 하나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28돌 기념 집회에서 경찰이 집회에 참석한 뒤 가두시위에 나선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발생한 좌익계열의 폭동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계속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군경과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망자는 1만 4천 4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종래 4.3사태, 4.3폭동, 4.3반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4.3사건은 노무현 정권 때 만들어진 정부 공식문서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이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민중봉기였다고 천명했고 현재 국내 좌파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서도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부인하면서 ‘제주 4.3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 발표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역사적 규정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를 기점으로 경찰과 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單選)?단정(單政)반대를 기치로 1943년 4월 3일 무장봉기한 이래 제주에서 발행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4.3사건을 공권력 탄압에 대한 저항이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무장봉기를 과잉 진압한 토벌대에 의한 주민 희생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장폭력을 일으킨 남로당 당사자들은 정당한 저항 행위로 평가받고 책임소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 및 미군정, 그리고 국군, 경찰 및 이승만 대통령으로 귀결됐으며,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만든 정부 조사보고서에 근거하여 사과했다.

 

하지만 제주 4.3사건 69주년을 맞아 서옥식 박사(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가 공개한 북한의 조선 대백과사전 기술 내용에 따르면 “제주4.3사건은 제주도민들이 남조선의 망국적인 5.10 단선 책동을 분쇄하고 전(全) 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하라”는 김일성의 호소(지령)를 높이 받들어 일으킨 무장봉기로 기록돼있다.

 

조선대백과사건 제20권 348-349쪽을 보면 아래와 같이 김일성의 호소에 따라 제주도민이 미 제국주의 타도, 유엔임시위원단 철수, 남한만의 단선)·단정수립반대, 인민의 원수 반동무리배 처단, 북조선 정권수립 지지 등을 구호로 외치며 일어났다는 기술이 나온다.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책동과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여 온 미제는 1947년 10월 조선문제를 비법적(非法的)으로 유엔에 상정시키고 그 간판을 도용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꾸며 냈으며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조선에서 5.10망국단선을 실시하고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이 영구화될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선거하고 전 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남조선로동계급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주체37년 2.7구국투쟁에 일떠섰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주체37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 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미제를 타도하라!》, 《단선단정 결사반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 반동무리들을 처단하라》,《주권은 인민위원회로》 등 구호를 웨치며 도처에서 경찰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들과 주구놈들을 처단하였으며 미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다시 복구하였다. 30만의 도내 인민들중 24만을 망라한 봉기군중들은 적극적인 투쟁으로써 제주도에서의 망국단독선거를 완전히 파탄시켰으며 적들의 통치질서를 마비상태에 완전히 빠뜨리게 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金達三: 본명 이승진)이 350여 명의 무장폭도들을 조직, 5.10 제헌국회의원선거를 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하고 1947년 2월 17일자로 이미 수립됐던 ‘인민공화국’을 지지?지원하기 위해 일으킨 반국가적 무장폭동이었다.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에서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회국이 수립되면서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해체됐다.

 

당시 무장폭도들은 북한의 혁명가요로 사용되고있는 ‘적기가’와 ‘인민항쟁가’를 부르면서 경찰지소 12개소를 비롯한 수많은 관공서 건물을 불태우고, 우익인사와 군경가족을 습격하는 등 폭력적 수법으로 반인륜적 살인 만행을 저질렀다. 주동자인 김달삼은 폭동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25일 월북, 해주에서 열린 이른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4.3폭동의 전과를 보고했다. 김달삼은 보고 말미에 “북조선 민주개혁을 남조선에서도 하루속히 실시하도록 용감히 싸웁시다”라고 선동하면서“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쏘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다. 그는 제주 4.3폭동에 대한 공로로 1949년 1월 8일 수상이던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으며, 6.25 발발 직전 빨치산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가 19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는 남한에서 두 번째로 긴 이름의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데 김달삼이 이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달삼은 고향이 제주이며, 일본 오사카에 있는 성봉중학교를 거쳐 도쿄의 중앙대학에서 수학하던중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후쿠치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으며 교사로 있을 때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고 4.3사건이 발발하면서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이자 군사부장이 됐다. 김달삼은 사후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안장됐으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당시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북한의 문헌과 대남선전선동매체들은 4.3사건이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제주도 인민들이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일으킨 반미 구국항쟁’으로 규정하면서 그 명칭을 ‘4.3인민봉기’ ‘제주도 인민봉기’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1947년 3월 중순), ?미24군단 G-2(정보참모부)일일보고서(1948년 2월 6-7일), ?동아일보의 제주도폭동현지답사 기사(1948년 5월 8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결성식 연설문(1949년 6월 25일) ?조국전선선언(1949년 6월 25일) 등 각종 자료가 남로당에 의한 계획적인 폭동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 일원에 살포된 남로당의 선전삐라에 따르면 “원수들을 처부실 날도 멀지 않았다”면서 “인민군은 오랜 전투에서 정예화되고 적을 완전히 섬멸시킬 만반의 준비와 결의가 확고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949년 1월13일 북제주군 구좌면 투쟁위원회가 제작한 이 삐라는 또 “조국해방의 결정적 계기인 (1949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민족은 총궐기 하였다”면서 “김일성 수상은 1월1일 신년사에서 장래에 남반부 동포들에게도 노동자에 노동법령을, 농민에게 토지개혁을, 여성에게 남녀평등권을 실시케 하며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단정을 타도 하겠다“고 밝혔다고 선전하고 있다.

 

<사진> 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PDF 파일 캡쳐

 

이밖에 북한이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의 ‘말씀’ 에 따라 남조선 인민들이 주체의 기치를 높이들고 일으켰다는 사건들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46년 8월 화순탄광로동자들의 투쟁(하순탄광폭동)과 하의도(荷衣島)농민투쟁(하의도 농민폭동)

△ 남조선 로동자들의 9월총파업(1946년 9월 23일 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을 시작으로 일어난 전국적 파업)

△ 1946년 10월1일 인민항쟁(대구 10월 폭동)

△ 1947년 3월 22일 총파업(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 즉, 전평(全評)이 주도한 남한 전역 24시간 파업사건)

△ 1948년 2.7구국투쟁(단선 단정 반대 2.7폭동)

△ 제주도 4.3인민봉기(제주 4.3사건)

△ 5.10 단선반대투쟁

△ 려수군인폭동(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 남조선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인 진보당의 출현(진보당 사건)

△ 1960년 4월인민봉기(4.19혁명)

△ 4월인민봉기 발단으로서의 마산봉기(1960년 3.15 마산의거)

△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과 통일전선적 련합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

△ 주체형의 혁명적 당건설을 위한 투쟁,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의 결성과 그 활동

△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3.24-6.3투쟁(6.3사태)

△ 한일협정을 짓부시기 위한 대중적 투쟁, 1965년 8월투쟁

△ 1967년 6.8 부정선거 반대투쟁

△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남조선혁명의 전위부대 통일혁명당의 창립

△ 1971년 4월 청년학생들의 반‘교련’투쟁,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

△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대중적 반파쇼 민주화투쟁

△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의 결성과 4.3투쟁

△ 1974년 울산현대조선소로동자들의 폭동

△ 1978년 ‘민주주의국민연합’ 결성과 반파쇼 민주화투쟁(1979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확대 개편)

△ 1979년 10월민주항쟁(부마사태)

△ 1980년 4월 탄광로동자들의 폭동(사북사태)

△ 광주인민들의 영웅적 봉기(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 광주민중봉기 후 민주와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한편 법무부는 2014년 8월 통합진보당(통진당) 정당해산심판청구와 관련,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통일전선전술에 따른 반미자주 대중투쟁’이라는 제목의 준비서면에서 통진당이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따라 ‘의회투쟁’과 ‘대중투쟁’을 유기적으로 병행했으며 2012년 총선 야권연대도 이같은 투쟁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법무부는 준비서면에서 “북한은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다양한 수단으로 반미자주투쟁 전선을 만들고 중간층을 결집해 보수층을 고립시키려는 대남전략을 펼치고 있다”며 “특히 1990년대 이후 정당을 통한 혁명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법무부가 북한의 대남혁명론이 스며들었다고 밝힌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매향리 미군 폭격장 반대(2000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2002년)

△평택 미군기지 저지(2005-2006년)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2005년)

△한미 FTA반대(2006-2007년)

△광우병 촛불시위(2008년)

△반(反)이명박 투쟁(2008-2009년)

△제주 해군기지 이전반대(2011년)

 

문제는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들이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를 폄훼하기 위해 제주 4.3사건을 왜곡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역사서 등 문헌들은 제주 4.3사건을 ‘망국적인 단독정부 수립’ 반대이자 ‘전 중앙적 통일정부 수립’ 투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남로당의 주도 하에 전개된 투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자유민주적 총선거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단독정부 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이란 곧 전 조선반도(한반도)의 공산화를 의미하는 것임에도 우리 교과서들은 북한의 역사서 내용을 그대로 벼껴 충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래는 우리나라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 기술내용이다. 그 어디에도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기술이 없다. 북한의 주장처럼 ‘무장봉기’란 표현도 똑같다.

 

ㅇ. 경찰이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주민들에 대한 탄압 중지와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 등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하였다.(비상교육 351 쪽) 

ㅇ.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5?10 총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 저지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였다(1948.4.3). 미군정은 무력 진압을 시도했지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미래엔 312쪽) 

ㅇ.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천재교육 309쪽)

 

더 큰 문제는 1948년 4월 3일은 국내 좌익세력들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일으킨 반국가적인 폭동일인데도 이날이 정부와 국회에서 추모일로 통과됐다는 점이다. 2014년 3월 18일 국무회의는 4.3폭동일을 추념일로 결정했고 이어 3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명`공포했다. 이러한 추모일 제정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게엄령을 발동, 국군과 경찰로 하여금 1만 4천여명의 양민을 학살한 ‘장본인’으로 낙인 찍히는 꼴이 돼버렸다.

 

군경이 폭도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도와 양민을 구분할 수 없어 억울하게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은 게 사실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을 추모하는 날은 별도로 국가에서 추념일로 지정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폭도를 제외한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과 진압 때 사망한 경찰과 국군을 같이 추모하는 날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네번째 엄수된 올해 제69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을 맞아 정치권의 추모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각 정당들은 한결같이 성명을 발표하고 4.3의 완전한 해결 약속과 더불어,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보상 추진, 수형희생자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 유족신고 상설화 등을 약속했다. 

 

다음은 김일성의 ‘남한 단선단정(單選單政)반대와 전조선 통일적 중앙정부 수립’ 호소에 따라 제주도민들이 ‘4.3민중봉기’를 일으켰다는 북한 문헌 및 대남선전선동매체들의 기술내용이다.

 

◈제주도민들이 통일적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위대한 수령님 호소를 높이 받들었다

 

미제침략자들이 조작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주체37(1948)년 4월 3일 제주도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 4.3인민봉기라고도 한다. 남조선을 강점한 첫날부터 민족분렬책동과 식민지예속화정책을 감행하여 온 미제는 1947년 10월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상정시키고 그 간판을 도용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꾸며 냈으며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감시 밑에 남조선에서 5.10망국단선을 실시하고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이 영구화될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북과 남의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선거하고 전 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높이 받들고 남조선로동계급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주체37년 2.7구국투쟁에 일떠섰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주체37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 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미제를 타도하라!》, 《단선단정 결사반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인민의 원쑤 반동무리들을 처단하라》,《주권은 인민위원회로》 등 구호를 웨치며 도처에서 경찰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들과 주구놈들을 처단하였으며 미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다시 복구하였다. 30만의 도내 인민들중 24만을 망라한 봉기군중들은 적극적인 투쟁으로써 제주도에서의 망국단독선거를 완전히 파탄시켰으며 적들의 통치질서를 마비상태에 완전히 빠뜨리게 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도내 부락의 절반이상이나 되는 296개의 부락에 불을 지르고 7만여명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나 원쑤들의 그 어떠한 발악과 학살만행도 제주도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은 미제와 남조선괴로도당의 야수적폭압과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도당의 간첩행위로 말미암아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인민봉기는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완강한 투지를 뚜렷이 부여 주었으며 미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출처: 『조선대백과사전』 제20권, 백과사전출판사, 평양: 평양종합인쇄공장, 주체89(2000년), pp.348-349)

 

◈제주4.3사건 등은 주체의 기치따라 일어났다

 

미제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가장 먼저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인민봉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지방들에서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김일성 저작집 4권, p. 376)

 

제주도 인민들이 <2.7 구국투쟁>을 계기로 반미 구국투쟁에 일떠서자 적들은 인민들을 반대하는 발광적인 폭압 공세로 나왔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는 1948년 2월부터 적의 반혁명적 폭력에 자위적 폭력으로 맞서 투쟁하는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였다. 2월 중순 제주도 안덕면 사계 모래사장에서 있은 군중집회에 대한 무장경찰과 테러단의 습격은 인민들의 새로운 분격을 폭발시켰다. 그들은 도끼, 참대창, 낫, 몽둥이를 들고 원수들에게 육박하여 경찰지서장을 생포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2월 13일에 수십명의 경찰과 테로단원들이 한림읍 금악리를 습격하자 이곳 애국청년들은 보총, 수류탄, 칼 등 무기를 들고 놈들과 맞서 복수의 불벼락을 안겼다.

 

원쑤들의 폭압공세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놈들의 테로 폭압에 단호한 타격을 가하고 나온 제주도 인민들은 단독선거를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3월 준순경에는 일부 읍, 면, 리들에서 놈들로부터 빼앗은 무장을 가지고 인민자위대를 편성했으며, 전 인민적인 봉기를 준비하였다. 대중의 혁명적 기세가 높아지고 정세가 적들의 테로폭압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전 인민적 투쟁을 벌일 것을 요구하자 제주도 인민들은 단호하게 인민봉기를 벌이는 길로 들어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의 연봉과 그 주변에서는 봉기를 알리는 횃불이 올랐고 총소리가 연달아 올랐다. 봉기자들은 대담하고 기동적인 속공전술로 조천, 함덕, 삼양, 외도, 한림, 구암, 고산, 애월, 남원, 성산, 안덕, 중문, 대정, 무릉 등 14개의 경찰지서와 출장소 그리고 제주, 서귀포 경찰서를 비롯한 경찰 및 테로단의 숙소, 행정기관들을 습격 파괴했으며, 수많은 악질경찰, 관공리, 반동 우두머리 놈들을 처단하거나 군중심판에 넘겼다. 

 

이 첫 봉기에는 인민자위대를 선두로 한 노동자, 농민, 어민, 해녀, 목동, 학생과 사무원 등 3천여 명이 참가했으며, 그들 속에는 칠순의 백발 노인과 나이어린 소년들도 있었다.

 

봉기자들은 도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보냈다.

“...시민 동포들이여! 부모형제들이여! 4월 3일, 오늘 당신들의 아들, 딸, 동생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매국적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결정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적 해방을 위해!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했습니다. 당신들은 최종승리를 위해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이 부르는 길에 궐기해야겠습니다!”

 

인민들도 이 애국적 호소에 따라 성스러운 반미 구국 투쟁에 떨쳐나섰다. 원수들을 일시에 족쳐 버린 제주도의 거리와 마을은 인민들의 기쁨과 감격으로 들끓었으며, 그들의 기세는 충천하였다. 각지에서 <매국 단선단정을 절대반대한다!>, <유엔 림시조선위원단은 철거하라!>, <미제의 주구를 타도하라!>, <조선통일만세!>, <북반부와 같은 민주개혁을 실시하자!> 등의 구호를 들고 원쑤들의 죄행을 규탄하는 성토대회와 군중시위를 벌였다. 인민대회들에서는 군중심판에 회부된 악질반동을 처벌했으며, 선거인 등록과 강제공출을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봉기자들은 원쑤들에 대한 첫 타격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4월 4일에 재차 폭동을 일으켜 11개의 경찰지서를 습격 파괴하고 14명의 경찰과 반동들을 처단했다. <4.3 인민봉기>에 의해 도(道) 안의 폭압기구가 맥을 못추게 되자 미제는 국방경비대와 경찰을 증강하여 대량적인 학살과 토벌을 감행하고 나왔다. 봉기자들은 적들의 반격에 대처하여 대오를 인민유격대로 편성하고 3개 지대와 지휘부 직속 특공대로 나누어 한나산을 근거지로 하여 놈들에 대한 타격을 더욱 강화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4월 15일 적의 기동부대 25명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준 애월면 광령 부락 매복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와 단신 또는 2-3명으로 조직된 무장 소조들에 의한 기습전투를 벌여 적들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안겼다. 봉기자들은 적군 와해공작을 공격적으로 벌였다. 그들은 국방경비대 안에 침투하여 <5.10 단독선거>의 매국적 본질을 해설 선전했으며, 그들의 민족적 양심을 불러일으키며 <애국자들과 인민을 테로학살하는데 가담하지 말라!> <인민과 함께 반미 구국투쟁에 궐기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속에서는 봉기자들의 투쟁을 각종 형태로 지원하고, 토벌에 미쳐 날뛰는 경찰대와 무력충돌을 일으키고, 일부 애국적인 병사들 속에서는 인민의 편으로 의거하는 현상이 속출하였다. 4월 27일에는 국방경비대 제 9연대의 한 개 중대 100여 명 군인들이 연대장을 처단하고 애국적 의거를 단행함으로써 제주도 인민들의 무장역량을 강화하고 적들 속에서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북 연석회의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 배격하기 위한 거족적 반미 구국투쟁을 벌인다는 결정이 있은 후 제주도 인민들의 투쟁은 <5.10 단독선거>를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적들은 놈들대로 선거 놀음을 기어이 성사시켜 보려고 <5.10 토벌공세>를 준비했으며, 증강된 미군부대 외에 1천 5백여 명의 무장경찰, 3천여 명의 국방경비대, 수천명의 무장테로단과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놈들은 제주도를 바다로부터 완전히 봉쇄하고 주민들의 야간통행은 물론 여행과 통행마저도 금지하고 그들의 손발을 얽매어 놓았다. 놈들은 대중적 학살과 초토화 작전을 배합하면서 도처에 학살장을 설치하고 무고한 인민들을 빨갱이, 산 부대와의 연계자라는 감투를 씌워 잔인하게 대량학살했으며, 수십개의 부락을 불태워 버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5월 7-10일 사이에만도 5만 425명의 애국적 인민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적들의 토벌공세에 맞받아 주도권을 틀어잡고 4월 말-5월 초부터는 유격대의 무장투쟁, 대중의 폭동과 시위 등 각종 형태의 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선거인 등록의 거부, 선거인 명부의 탈취, 선거사무소의 습격파괴, 경찰과 반동의 처단 등과 같은 투쟁을 벌여 나갔다. 그들은 <전체 도민들은 항일빨치산들의 모범을 따르자!>, <단독 선거를 기어코 분쇄하고 단독정부를 절대 부인하라!> 등의 구호를 높이 들고 무장투쟁과 대중투쟁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인민유격대는 적에 대한 습격작전을 더욱 맹렬하게 벌였는데, 5월 7일 애월면 장전과 수산 사이에서 있었던 전투, 5월 8일의 도순, 화순, 상,하 가리 전투 등은 대표적인 전투들이었다. 인민들은 낮에는 벼락 데모, 밤에는 횃불 시위를 벌였고, 5월 8,9일에는 여러 공장, 기업소의 노동자, 사무원과 적 통치기관의 하급관리들까지 파업과 태업으로 선거를 반대하는 자기들의 입장을 표시하였다.

 

선거 날을 며칠 앞두고 약 5만 명의 인민들이 한라산에 올라가 집단적으로 투표 참가를 거부했다. 산에 들어간 인민들은 횃불을 올리면서 기세를 높였다. 봉기자들의 맹렬한 습격에 의해 많은 선거구들에서는 투표함 마저 비치하지 못했으며 선거인 명부는 거의가 탈취당하였다.

 

단독선거가 감행되는 5월 10일 새벽에 제주도 인민들은 총과 수류탄, 칼과 몽둥이, 휘발유병, 낫과 망치, 돌과 삐라를 안고 원수들을 향해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봉기한 군중들은 제주시의 투표장으로 마련되였던 시청과 세무서, <신한공사> 출장소들을 습격 파괴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단독선거반대, 결사반대>를 소리 높이 외치며 <번개 데모>를 단행하였다.

 

유격대는 한라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경찰지서 습격과 반동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날 외도, 고산, 무릉, 삼양, 세화, 도리, 화순, 남원, 위미, 아라, 중문, 함덕 등지의 수많은 경찰지서, 출장소 들을 습격 파괴하고 악질경관들을 처단했으며, 감금된 인민들을 구출하였다. 삼양 경찰지서 습격에 참가한 60여 명의 봉기자들은 견고하게 구축한 화점(火點: 기관총과 같은 자동화기를 배치한 개개의 진지)을 과감하게 쳐부수고 경관 3명을 처단했으며, 급보를 받고 달려오는 적의 응원부대를 불의의 습격으로 포위해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비롯한 많은 장비들을 노획하였다.

 

봉기자들은 또한 평대, 안덕, 조천의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불태워버렸으며 국방경비대의 병영과 반동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 봉기한 농민들은 토벌대의 기동을 파탄시키기 위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다리와 도로, 통신선을 파괴해 버렸다. 이리하여 제주도에서 <5.10 단독선거>는 완전히 파탄되었다. <미군정 장관> 딘(Dean)도 제주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유격투쟁과 기타 각종 형태의 투쟁이 결합된 새로운 특징을 지닌 반미 구국투쟁이었으며, 전체 도민 30만 명 중 24만 명이 궐기한 대중적이고 전인민적인 항쟁이였다. 제주도 인민들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 희생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4.3 인민봉기>는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5.10 단선>을 파탄시키는데 있어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5.10 단선>을 반대하여 일어나고 있던 남조선 인민들을 고무하였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또한 광범한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사상 조직적으로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군중을 옳게 조직 동원한다면 원쑤들의 그 어떤 아성도 능히 쳐부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남조선 인민운동사에 남겨놓았다.

 

제주도 인민봉기는 <5.10 단선>을 파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제주도 인민들의 투쟁은 그 후에도 2년여에 걸치는 장기간의 피어린 항쟁으로 이어졌다.(출처: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조국통일사, 평양, 1982, pp.137-142)

 

◈4. 3인민봉기는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이다

 

4.3인민봉기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침략자들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제주도인민들의 정의의 반미반파쑈인민항쟁으로 력사의 갈피에 자욱을 새겼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해방자》의 탈을 쓰고 침략의 군화발을 남조선에 들이민 미제침략자들은 파쑈적인 《군정》을 실시하고 남조선각지에 조직되였던 인민위원회들을 강제로 해산하였으며 외세의 강점과 민족의 분렬을 반대하는 애국적인 투쟁에 대한 탄압책동에 광분하였다.

미제는 1947년 10월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에 상정시키고 그 간판을 도용하여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을 꾸며냈으며 그 감시밑에 남조선에서 《5. 10망국단선》을 실시하고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는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이 영구화될 엄중한 위기가 조성되였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남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지배를 공고히 하고 민족의 분렬을 영구화하기 위해 리승만역도를 괴수로 하는 《단독정부》의 조작을 서둘렀다.

예로부터 하나의 강토에서 한피줄을 잇고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여온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외세에 의한 인위적인 민족분렬은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문제로 제기되였다.

미국의 이러한 범죄적책동은 결국 남조선 각계층의 분노와 격분을 자아냈으며 각지에서 미제침략군의 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강력한 투쟁에로 이어졌다.

남조선로동계급과 함께 제주도인민들은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반대배격하는

1948년 2. 7구국투쟁에 일떠섰다.

미제국주의자들은 2. 7구국투쟁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만도 무려 1만여명의 애국자들을 체포, 투옥, 학살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5. 10망국단선》을 반대하는 투쟁에 더욱 힘차게 일떠섰다. 1948년 3월말부터 제주도인민들은 2. 7구국투쟁때 탈취한 무기로 인민무장자위대를 편성하고 한나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악지대에 들어가 근거지를 꾸리였으며 4월 3일 새벽 무장항쟁으로 넘어갔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주도인민들의 투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도내 부락의 절반이상이나 되는 295개의 부락에 불을 지르고 7만여명의 인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미제는 《제주도땅이 필요한것이지 제주도민이 필요한것은 아니다.》, 《전섬에 휘발유를 붓고 모두 죽여도 좋다.》는 짐승도 낯을 붉힐 살인지령을 하달하고 제주도를 완전히 봉쇄한 가운데 미제침략군과 1, 500여명의 경찰, 3, 000여명의 중무장한 국방경비대, 수천명의 무장테로단, 비행기와 살인무기들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여 함포사격과 폭격 등 전쟁을 방불케 하는 륙, 해, 공군합동살륙작전을 벌렸다.

살인마들의 살륙대상에는 그가 의로운 봉기자이건 무고한 로인들과 해녀들이건, 지어 철부지 어린이들이건 무차별적이였으며 그 수법도 히틀러 나치스들도 무색케 할 극악무도의 극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은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의 야수적폭압으로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인민봉기는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자주적인 힘에 의하여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려는 제주도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완강한 투지를 뚜렷이 보여주었으며 미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제주도 4. 3인민봉기가 있은 때로부터 시대는 바뀌고 세월은 멀리 흘러왔지만 봉기자들이 그처럼 피타게 갈망하던 민족의 자주와 조국통일에 대한 념원은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있다.

오히려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과 무분별한 북침책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하게, 더욱 교활하게, 더욱 무모하게 감행되고있으며 그로 하여 조선반도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상태에 처해있다.

미국은 정초부터 있지도 않은 《북해킹》설을 들고 반공화국추가제재놀음을 벌려놓고 못되게 놀아대는 한편 《북핵문제》니, 《북인권문제》니 하는 얼토당토않는 궤변을 여론화하면서 우리 공화국에 대한 압살흉계를 그대로 드러내고있다.

더우기 묵과할수 없는것은 괴뢰보수패당이 미국의 군사적강점과 지배, 악랄한 북침전쟁도발책동에 적극 편승하면서 조국통일과 남조선사회의 자주, 민주를 위한 각계층의 투쟁을 각방으로 탄압말살하고있는것이다.

친미사대에 환장하고 동족대결에 명줄을 걸고있는 괴뢰보수패당은 남조선인민들에게서 강탈한 막대한 돈을 미제침략군에게 《유지비》의 명목으로 섬겨바치고있는가 하면 4. 3인민봉기자들의 선혈이 스며있고 그들의 투쟁정신이 깃들어있는 제주도를 외세의 북침전쟁수행을 위한 침략기지, 전초기지로 내맡기는 추악한 사대매국행위를 저지르고있다.

더우기 괴뢰보수패당의 횡포무도한 《종북》소동은 남조선에서 초보적인 인간의 존엄과 권리마저 무시하며 사회를 반통일과 동족대결의 광란에로 몰아가고있다.

현실은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추악한 사대매국집단을 그대로 두고서는 겨레의 한결같은 지향과 념원인 북남관계의 개선도, 자주통일과 평화번영도 이룩할수 없다는 결론을 더욱 굳게 하고있다.

제주도 4. 3인민봉기참가자들이 지녔던 불굴의 의지와 기개, 투쟁정신은 남조선인민들로 하여금 미제침략군을 하루빨리 내쫓고 시대와 민족의 이름으로 괴뢰보수패당을 쓸어버리기 위한 반미자주화, 반파쑈민주화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올릴것을 요구하고있다. (출처:《우리 민족끼리》주체104(2015)년 4월 3일) 

 

 

기사입력: 2017/04/03 [22:18]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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