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조국광복회 창설했다"고 날조
서옥식 박사, 김일성 항일업적 조작의 극치 지적
 
조영환 편집인

김일성, 여운형과 조국광복회 창설했다고 날조

5일은 김일성이 81년 전 조국광복회 결성했다는 날

오성륜 등이 주도한 것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회고록에 거짓기술

24세때 생면부지 50세 여운형과 창설하고 자신이 회장됐다고 조작

모스크바 코민테른 지시 따른 것을 독자적 구상이라고 선전 (조영환 편집인)

  

 

5월 5일은 북한의 김일성이 24세때 동만주(東滿洲)에서 만들었다는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 결성 81주년이 되는 날. 북한은 조국광복회 결성을 보천보(普天堡)습격사건과 함께 1930년대 김일성 항일투쟁사의 양대 사건으로 자랑하면서 모든 관련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것은 완전 날조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를 결코 만들지 않았다. 더욱 웃기는 것은 김일성이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1936년 5월 5일에 발표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에 자신이 김동명이라는 가명으로 이동백, 여운형과 3인 공동발기인으로 참여해 설립을 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고 적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샛빨간 거짓말이다. 문제는 우리 언론이 해마다 5월 5일이면 한결같이 북한의 주장대로 김일성이 조선광복회를 결성했다고 기정사실화해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국광복회는 김일성 아닌 중국인 웨이정민((魏拯民: 중국공산당 동만특위(東滿特委) 서기 겸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위원)이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국제공산당) 7차대회의 ‘테제’에 따라 창설을 주도하고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주요 간부인 오성륜(吳成崙), 엄수명(嚴洙明), 이상준(李相俊)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1936년 6월 10일 동만주에서 조직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이다.

 

웨이정민은 1935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7차대회가 채택한 ‘중국 내 제(諸)민족 반파쇼 인민전선과 반일민족통일전선 구성에 관한 테제’에 근거해 창설을 주도한 것이다. 동만에서의 원래 명칭은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在滿朝鮮人祖國光復會)였다. 남만에서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로 불렀다.

 

이에따라 1936년 6월 10일 남만주(南滿洲) 김천현(金川縣) 하리(河里)에서 열린 이른바 하리회의(河里會議)에서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 <전민족의 계급, 성별, 지위, 당파, 연령, 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白衣)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하여 구적(寇敵) 일본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선언’과 함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김일성은 하리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강령등을 발표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리회의는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7차대회의 결정사항을 남만(南滿)지역에 전달하기위해 소집하고 주재했다.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檢事局 思想部)가 1938년 3월 1일자로 발행한 사상휘보(思想彙報)14호에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 결성을 주도한 인물로 오성륜, 엄수명, 이상준이 나오며 김일성은 언급 자체가 없다. 사상휘보에 따르면 오성륜의 본명은 전광(全光)이며 이상준은 이동광(李東光)의 본명이다. 또한 엄수명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직을 맡고있던 엄필순(嚴弼順)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문제 연구가인 서옥식 박사(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는 자신의 저서 <거짓과 왜곡 조작 날조를 가르치는 사회-북한 교과서 대해부(2015년)>에서 북한 교과서와 역사서, 관영매체들의 보도문 등에 나타난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결성 날조 사실을 일제의 조선총독부 기록 등 광범한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다음은 서옥식 박사가 저서에서 소개한 날조된 북한 문헌의 기록이다.

 

 

◈조국광복회를 김일성이 결성했다고 날조하고있는 북한문헌 기록들

 

▲북한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이런 준비밑에 주체25(1936)년 5월 동강에서 력사적인 조국광복회창립대회를 여시였다.

회의에는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과 국내에서 온 독립운동자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에서 력사적인 보고를 하신다음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규약?,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발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수행해야 할 기본과업을 밝혀 주시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때려 부시고 진정한 조선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문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울 혁명군대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 산업국유화와 토지개혁, 8시간로동제, 남녀평등권, 전면적인 면비교육을 비롯하여 제반 민주주의적 시책을 실시할데 대한 문제들을 규정하였습니다.?...중략...

그리고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 같은 의사와 념원을 담아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을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높이 모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주체25(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 창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립하신 조국광복회는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조직에 튼튼히 묶어 세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통일전선조직이였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굳게 묶어 세울수 있게 되었다.(출처: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92(2003), p. 61.)

 

▲김일성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1936년 5월 1일 무송현 동강회의에서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으로서 조국광복회를 결성, 김일성수령님을 회장을 추대하고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을 채택하시었고 기관지로 <3.1월간>을 발간할 것을 결정하시었다.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10대강령을 발표하시게 된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은 일본제국주의를 때려부시고 진정한 조선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문제, 조선의 독립을 이하여 싸울 혁명군대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 산업국유화와 토지개혁, 8시간 로동제, 남녀평등권, 전면적인 면비교육을 비롯하여 제반 민주주의적 시책을 실시할데 대한 문제들을 규정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널리 내오고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의 기치밑에 각계각층의 대중을 묶어세울데 대하여 가르치시어 1937년 1월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의 하나인<조선민족해방동맹>이 결성되게 된다. 국내에서는 국경일대에서 멀리 경상남도의 부산까지 여러 도시와 농촌들로 확대되었고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도 후에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하게 된다. 또한 진보적인 천도교인들도 자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는등 광범한 애국역량이 김일성 수령님의 두리로 묶이게 되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대회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 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리동광과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선을 타고 교원대표와 로동자대표들이 각각 한사람씩 왔다.

력사적인 조국광복회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였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가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였다.

먼저 리동백이 대회앞으로 보내온 축사들을 랑독하고 그 다음 내가 보고를 하였다.

나는 보고에서 조국광복의 기치밑에 전민족을 하나의 정치적력량으로 결속할데 대한 과업과 국경지대와 국내에 진출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전개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국경연안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할 새로운 근거지를 창설할데 대한 과업들을 제기하였다. 이 보고가 후에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전반적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리자》라는 제명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였다.

나는 또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을 대회심의에 붙이였다.

우리는 10대강령에서 1930년대의 혁명정세와 우리 나라의 사회경제적조건, 계급호상관계 등을 정확히 분석한데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전략전술적원칙을 규정하였으며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리익과 각계층 애국적인민의 공통된 리해관계를 철저히 고려하여 조선혁명의 전도를 명백히 밝혀주었다.

회의참가자들은 강령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면서 뚜렷한 투쟁목표를 가지고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확신성있게 나아갈수 있게 된데 대한 기쁨을 토로하였고 강령에 제시된 과업들을 적극적으로 실현해나가겠다는 굳은 결의들을 다지였다.

대표들의 가슴을 이만 못지 않게 격동시킨것은 조국광복회창립선언에 대한 토론이였다.

창립선언의 구절구절들은 처음부터 참가자들의 심장을 거머잡았다. 특히 온 민족이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이 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기능과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한데 뭉쳐 행동으로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참가한다면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 모두다 조국광복회에 망라되여 싸울것을 열렬히 호소한 부분은 회의참가자들을 상당히 격동시켰다.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채택된 다음 이 선언을 누구의 이름으로 발표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토의를 진행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나의 이름으로 발표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조국광복회를 창립할데 대한 첫 발기도 내가 하였고 창립준비위원회사업도 내가 주관해왔으며 또 강령과 창립선언도 내가 작성한것만큼 토론할 여지도 없이 응당 나의 이름으로 발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조국광복회는 전체 조선인민의 반일력량을 총집결하여야 하는것만큼 민족적형식을 띠여야 하였다. 그러므로 발기인으로서는 과거 의병운동이나 3.1운동시기부터 조선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명망이 높고 나이지숙한 애국지사로 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 당시까지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로 만주지방을 투쟁무대로 삼아 싸워왔기때문에 국내의 광범한 인민들에게 우리의 존재가 널리 알려져있지 않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있었다. 우리의 이름이 국내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백두산에 새로운 비밀근거지들이 설치되고 무장투쟁이 국내깊이까지 확대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움직임과 투쟁에 대하여 국내신문이 처음으로 보도한것이 아마 1936년 9월 어느날의 《매일신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 《매일신보》는 장백현에 150~16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진출하였는데 《부대의 수령은 김일성이라고 한다.》라고 슬쩍 언급하였다. 이것을 시발로 국내의 출판물들은 우리의 활동을 자주 보도하였다.

나는 대회대표들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누가 첫 발기자였고 누가 준비위원회를 책임져왔고 또 누가 강령과 규약을 작성하였기때문에 아무개의 이름으로 내야 한다고 모두다 우기는데 그런 사실이나 따져가며 나 한사람을 내세우는것은 큰 의의가 없다, 2천만 동포가 다 아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조국광복회에 결집해나설것을 호소하는것이 훨씬 더 효과성이 있다, 나를 동포민중의 한 아들로 여기고 민중을 위해 남모르는 수고를 했다고 치면 그만이 아닌가, 대의를 위하여 소의를 버리고 나이도 지숙하고 명망도 높은 애국지사들로 공동발기인을 삼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리동백과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하여 창립선언문을 발표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나의 제안에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것은 리동백이였다. 그는 년세나 지난날의 명망 같은것은 별로 고려할바가 못된다고 하면서 실천적으로 전 민족을 대표하여 조국광복의 대업을 맡아나서 지도하고있는 지도자는 국내외를 통털어도 김장군밖에 없는데 그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같은 사람을 발기인으로 할수 없다고 하면서 조국광복회 회장도 마땅히 김장군이 돼야 하고 발기인도 김장군이 돼야 한다고 다시금 고집해나섰다. 그는 나의 제안을 참작하여 나와 함께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하자고 하였다.

신중한 토의끝에 결국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쓰는 조건에서 내가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되는데 동의하였다. 나의 양보를 받자 리동백이도 발기인으로 나서는데 동의하였다.

이리하여 5월 5일에 발표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에는 김동명, 리동백, 려운형 세사람의 이름이 공동발기인으로 기재되였다.

나에게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붙여준것은 리동백이였다. 내가 가명을 쓰는 조건에서만 동의하겠다고 하자 그는 더 우기지 못하고 생각을 더듬다가 가명의 성은 그대로 김씨로하고 이름은 동녘 《동》자 밝을 《명》자를 붙여 《동명》으로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김동명》이라고 달게 되면 민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 여러모로 뜻깊은 이름으로 될것 같다는것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로 찬성의 뜻을 표시하였다. 《김일성》이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김동명》이라는 가명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진것이다.

우리가 발표한 조국광복회선언은 그후 국내외 여러곳에 발송되였는데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자기대로 복제하여 발표하면서 각기 자기 지방의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저명인사들의 이름을 발기인으로 바꾸어 써서 발표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실정에 따라 융통성있게 하는것을 허용하였다. 조국광복회 명칭자체도 동만에서는 동만조선인조국광복회라고 달았다면 남만에서는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고 달았다. 당력사연구소에서 발굴한 조국광복회선언문들에 더러 오성륜, 엄수명, 리상준(리동광), 안광훈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나있는것은 그런 사정에 기인한것이다.

나는 참가자들의 총의에 따라 조국광복회창립대회에서 이 조직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가 탄생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서의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였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전국적범위에서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였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나라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였다.

민족의 총력을 광복전선에 집결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투쟁시초부터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으며 우리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해전부터 인내성있는 준비를 해왔다.

조국광복회창립은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꾸준히 키워온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주동적이며 적극적인 노력의 위력한 산물이였다.

그것은 우리 인민이 민족자체의 힘으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나갈 의지를 다시금 엄숙하게 선포한 력사적인 계기로 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하는 전반적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떠밀어가는 전환점으로 되였다.조국광복회의 창립은 조선혁명자체발전의 요구와 시대적흐름에 부응한것으로 하여 내외의 커다란 지지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외 각지에서 그것을 찬동하는 목소리들이 높이 울려나왔다. 선차적인 반응을 보인것은 독립군부대들이였다.

조국광복회창립이 선포된 직후 조선혁명군 정부참모장으로 있던 윤일파는 우리에게 서한을 보내여 조국광복회창립을 축하하고 앞으로 반일전선에서 긴밀한 련계를 지을것을 희망해왔다. 또한 상해에서 활동하고있던 민족주의운동자 박모는 불원천리하고 만주까지 찾아와서 조국광복회 남만대표들을 만났다. 상해, 베이징, 천진 등 중국관내에서 다년간 독립운동에 종사한 애국지사로서 민족주의운동자들속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던 그는 앞으로 국내와 국외를 포괄하는 넓은 령역에서 조국광복회사업을 널리 전개해나갈것을 약속하였으며 앞으로 전민족적인 무장력량으로서 《독립혁명군》을 결성하기 위한 방도문제를 놓고도 많은 론의를 하고 갔다.

《3.1월간》 창간호에 리동백이 《천도교상급령수 모씨! 우리 광복회대표를 친히 방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쓴것처럼 천도교 도정이였던 박인진도 조국광복회가 창립됐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고 우리를 찾아 백두산밀영을 방문해왔었다. 천도교청년당에 속한 100만당원을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것이 그때의 일이다.

리창선, 리제순, 박달 기타 많은 사람들이 련속 우리를 찾아왔고 조국광복회의 조직확대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단시일안에 수십만 회원을 가진 범민족적조직으로 확대발전한 조국광복회의 발전사에 대해서는 아마 큰 책 몇권에도 다 담기 어려울것이다.

1936년 5월 백두산북쪽기슭에서의 조국광복회의 탄생은 조선혁명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조국광복의 밝은 서광을 안아온 력사적사변으로 되였다. 조선혁명의 보다 창창한 새날은 이렇게 백두산기슭에서부터 밝아오기 시작하였다.(출처: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권 제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1936.3-1936.5)-제5절 조국광복회 편)

 

▲대남선전선동매체‘우리민족끼리’

(조국광복회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창건하시고 령도하신 우리 나라에서의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벌려오시는 과정에 쌓으신 성과와 경험에 기초하시여 주체25(1936)년 2월 녕안현 남호두회의에서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를 결성할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으며 3월에는 조국광복회창건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시고 조국광복회창건 준비사업을 완성하여오시였다.

조국광복회는 이에 기초하여 주체25(1936)년 5월 5일 동강에서 진행된 조국광복회창립대회에서 창건되여 세상에 선포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에 의하여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높이 추대되시였다.

조국광복회는 10개 조항으로 된 강령, 본조항 8개 장 14개 조와 부칙 3개 조로 된 규약 그리고 창립선언을 가지고있었다. 조국광복회는 기관지로 잡지 《3.1월간》(1936년 12월 1일 창간)을 발행하였다.

조국광복회는 유일한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반일애국력량을 결속할수 있는 정연한 조직체계를 가진 포괄적이고 전일적인 통일전선조직체인 동시에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갈수 있는 강력한 지하혁명조직이였다.

조국광복회는 지방과 지역, 계층별 특성에 맞게 여러가지 형식과 명칭으로 하부조직을 결성하였다. 조국광복회조직은 창건후 북부조선일대를 비롯하여 서부, 중부, 남부조선일대를 포괄하는 전국각지에 확대되였으며 동만일대를 비롯하여 조선사람이 많이 살고있는 만주의 넓은 지역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튼튼히 뿌리박게 되였다. 조국광복회에는 조국해방의 념원을 가지고 그 실현을 위하여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남녀로소, 직업, 종교, 지방, 빈부, 당파 등의 차별없이 망라하여 수많은 군중을 묶어세웠다.

조국광복회는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적인민들을 교양하여 반일투쟁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을 원호하고 그의 활동을 보장하는 사업을 적극 벌리였다. 그리고 민중무장조직을 무어 항일무장투쟁을 확대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조국광복회가 창건됨으로써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반일애국력량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하나로 묶어세워 혁명의 주체적력량을 튼튼히 꾸릴수 있게 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더욱 줄기차게 밀고나갈수 있게 되였다. 조국광복회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완성하는데서 불멸의 업적을 쌓았다.(출처:‘우리민족끼리’, 주체102(2013)년 5월 5일자 기사)

 

조국광복회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부분 동북항일연군의 간부들로서,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광범한 반일세력을 모으기 위해 민족주의자와 천도교, 학생, 지식인, 반일지주까지 참가시켰다. 조선인들에게 조국광복회는 사실상 북만의 공산주의계열과 남만의 민족주의 계열과의 연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북한의 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와 ‘조선전사’를 비롯한 역사서들은 김일성이 1936년 2월 27일 조선인민혁명군(조선인민혁명군도 실재하지 않은 날조된 군대임) 군정간부들을 참석시킨가운데 열린 남호두(南湖頭)회의에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확대하기로 천명한 뒤 반일민족통일전선의 10대 강령, 규약, 창립선언문 등을 작성하고, 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그러한 준비에 기초해 1936년 5월 5일 무송현(撫松縣) 동강(東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들이 참가한 가운데 동강회의를 주재하고,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의 창설을 선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추대된 김일성이 광복회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했다고 적고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1936년) 5월 5일에 발표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에는 김동명, 리동백, 려운형 세 사람의 이름이 공동발기인으로 기재돼 있다”고 밝히고 “발기인의 한사람인 김동명이 바로 자신의 가명”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나에게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붙여준 것은 리동백이었다. 내가 가명을 쓰는 조건에서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는데 동의하겠다고 하자 그는 더 우기지 못하고 생각을 더듬다가 가명의 성은 그대로 김씨로 하고 이름은 동녘 ‘동’자 밝을 ‘명’자를 붙여 ‘동명’(東明)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 동의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재만한인조국광복회선언’의 기초자는 전광(오성륜)이며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3.1월간은 모두 남만성위(南滿省委) 서기 이동광(이상준)이 주도한 것이다. 김일성은 하리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김일성이 참석한 동강회의에서 조국광복회가 조직된 것으로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 발표일(6월 10일)까지 5월 5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와 관련해 크게 5가지를 날조했다. 그것은 ①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주요 간부인 오성륜?엄수명?이상준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도 자신이 이동백, 여운형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조작하고 ②코민테른 7차대회에서 채택된 ‘중국내 제민족 반파쇼 인민전선과 반일민족통일전선 구성에 관한 테제’에 근거해 창설된 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통일전선전략전술에 따라 조직한 것이라고 날조하고 ③오성륜(별명 全光)이 작성한 창립선언과 10대 강령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날조하고 ④창립일을 6월 10에서 5월 5일로 변개하고 ⑤조직 결성도 장백현과 국내의 혜산?갑산이 유일했는데도 서울?평양?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 결성했으며, 회원도 수십만에 달한다고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는 점 등이다.

 

특히 김일성이 여운형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는 것은 완전한 날조다. 무엇보다 1936년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 있었고 여운형을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만난 사실조차 없었다. 여운형과 관련된 기록에도 1936년 김일성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김일성은 1912년 생으로 당시 24세였는데 자기보다 26세가 많은 50세의 여운형(1886년생)과 함께 조국광복회 공동발기를 하고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구나 1936년 당시 여운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가 폐간돼 사장직에서 물러나 경황이 없던 때였다. 그런 여운형이 만주로 달려가 애송이 김일성과 손을 잡고 조국광복회를 창립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여운형은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 이듬해인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장에 취임했다.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력사’ 과목을 가르쳐온 교사 출신으로 2009년 영국에 정착한 심은애(가명)씨는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김동명이라는 가명으로 여운형과 함께 ‘조국 광복회 10대 강령’를 선포했다고 학생들에게 세뇌시키고 있지만 북한을 떠나와 보니 모순되는 점이 참 많다고 2013년 5월 10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심씨는 여운형이 남북한 현안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6년 북으로 왔을 때 김일성을 만나는 장면을 담은 혁명영화가 있는데 그때 김일성은 여운형을 보고 “처음 뵈서 반갑습니다”는 인사를 한다며 이것만 봐도 수령(首領)의 역사가 왜곡됐다는 사실을 한 번에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936년에 김일성이 여운형과 함께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면 구면(舊面)이므로 “오랜만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한 만일 북한의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면 보천보습격사건을 주도했다는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어야 하는데 김일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이나 소련은 물론 일본의 기록에도 2군 6사장이 조국광복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회장에 취임했다는 아무런 증거나 기록이 없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광복회의 지방조직이 만주는 물론 국내 각처에 결성됐으며 전국적으로 회원이 수십만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국내 각처란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제주 까지 조직이 결성됐다는 뜻이다. 이만한 조직이면 대형 조직인데 북한은 조직의 편제나 간부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전국적으로 광복회 회원이 수십만이라면 최소한 어림잡아도 20만명이라고 할 수 있고 당시 조선 인구가 2천500여만이므로 125명에 한 사람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이를 다시 20세이상의 성인 인구에 적용하면 70-80명에 한 사람 꼴로 회원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시나 해방후 38선 이남지역에 조국광복회 회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제에 검거된 혜산사건 관련자 739명이 거의 혜산과 갑산출신 광복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혜산사건이란 보천보(普天堡)습격사건(1937년 6월 4일)후 일본관헌측이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국내 연계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광복회 회원 739명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188명을 기소한 사건이다.

 

 조국광복회는 전국적인 조직이 아니라 만주의 장백현, 그리고 국내에서는 혜산, 갑산, 함흥 등 극히 일부 지역에 결성됐다. 보천보습격사건을 지휘한 2군 6사장 김일성은 혜산 출신이었기 때문에 혜산사건에 연루된 조국광복회 혜산-갑산 지부의 많은 사람들을 엮을 수 있었다. 반면 훗날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평양 근교 출신인데다 어릴 때 중국 만주지역으로 가서 국내에 지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혜산사건에 연루된 혜산-갑산 지역 사람들과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북한 김일성은 보천보 사건 당시 25세에 불과한데다 우리말이 서툴러 자신보다 연상이거나 동년배로 조국광복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권영벽(權永壁,1909-1945), 박달(朴達,1910-1960), 박금철(朴金喆,1912-1967), 마동희(馬東熙,1912-1938)등 다수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힘들었다. 이같은 사실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사건을 이끌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조국광복회도 만들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인 셈이다. 지도자인 권영벽, 박달 등 6명은 혜산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박금철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이리하여 조국광복회 조직은 사실상 괴멸됐다. 

 

 

기사입력: 2017/05/05 [11:50]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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