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반미의 출발점은 제너럴셔먼호 사건
서옥식박사, 오늘 151주년 맞아 역사조작 소개
 
조영환 편집인

 

반미의 출발점은 제너럴셔먼호 사건

묘지기였던 김일성 증조부를 격침자로 날조  

대동강서 통상요구하던 미 무장상선 평양 軍民이 격침

소위 신천군 학살사건과 함께 反美선전교육에 이용

해마다 한미연합훈련반대-對美 적개심 극대화 위해 거론

壬亂의 김응서장군을 김일성 선조로까지 조작하려다 포기

 

한미연합방위훈련을지 프리덤 가디언’(UFG)이 실시된 821일은 북한이 반미(反美)의 출발점으로 삼는 미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 격침 151주년이 되는 날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란 1866년 이날(고종 3년 음력 712)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응징하여 불태워 격침시킨 사건인데도 북한은 김일성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응우(金膺禹)가 이 작전을 지휘하며 주도했다고 모든 교과서와 역사서에 조작, 기술하고 있다.

 

북한문제 연구가인 서옥식 박사(정치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는 셔먼호사건 151주년이 되는 21일 이같이 밝히고 왜곡, 조작된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 내용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 출신의 언론인기도 한 서박사는 북한은 셔먼호사건을 조선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약탈의 출발점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미교육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당시 만경대 묘지기로 소작을 얻어 생활하던 김일성 증조부 김응우가 평양 군민(軍民)을 동원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중무장한 미국상선을 불태워 격침시켰다는 것은 완전 조작이라고 밝혔다.

 

1866821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평안 관찰사 박규수, 퇴역장교 박춘권을 비롯한 군민 합동작전으로 격침됐지만, 북한 역사서에서 이 사건의 주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로 대체돼 있다.

 

북한은 사건발생 120주년이 된 1986년 대동강변에 제너럴 셔먼호 격침비를 세워 이를 반미항전의 상징물로 삼고있으며 매년 이맘때면 TV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 주민들을 상대로 셔먼호를 미제 침략선이라고 소개하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증조 할어버지가 많은 사람을 살육하고 약탈을 한 미제 강도놈들을 족쳐 죽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셔먼호는 당시 청국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W. B. Preston)의 소유였지만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명장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의 이름을 딴 80t급 증기선으로, 12파운드의 대포 2문을 장착하고 선원들 또한 모두 개인화기 등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셔먼호는 톈진에 기반을 둔 영국 회사 메더우즈 앤 컴퍼니(Meadows and Co.)로부터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의 상품을 사들여 적재하고 있었다. 승무원은 선장 페이지(Page), 1등 항해사 윌슨(Willson), 청국인 13, 말레이시아인 3명 등 총 23명이었다. 그리고, 소유주 프레스턴과 함께 항해사 겸 통역을 위해 런던 선교회 소속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한국식 이름 최난헌)가 승선했다.

 

이들은 18615월에 굴욕적으로 개항된 체푸(Chefoo, 현재의 중국 산동성 옌타이-煙臺)89일에 출항해 816일에 조선의 해안가에 도착했다. 셔먼호는 중국 정크선의(선장: 우웬타이 - 于文泰) 인도로 820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우웬타이는 1865년말 선교사 토마스가 포교를 위해 황해지역에 왔을 때 함께 타고 왔던 배의 선장이며 20년 이상 조선인들과 무역을 해왔다.

 

셔먼호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비단과 천리경, 자명종 등을 조선의 쌀, 홍삼, 호랑이가죽 등과 교역하자고 했다. 하지만 당시 15살 고종황제의 섭정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청나라 이외의 어떤 외국과도 교류를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던 관계로 평양 감영은 중군(中軍: 2품 무관) 이현익(李玄益)을 보내 셔먼호를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이에 미국인 선장은 이현익을 납치하고 구경나온 평양시민들을 대포와 소총으로 위협했다.

 

셔먼호가 양강도까지 물러났을 때 평양 감영의 퇴역장교였던 박춘권(朴春權)이 작은 배를 타고 대담하게 셔먼호에 올라 억류돼있던 이현익을 구출했다. 그래도 셔먼호가 퇴거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철산 부사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해 포격을 가한 뒤 박춘권이 나서 대동강 물에 기름을 풀고 불을 붙여 선박을 불태워 격침시켰으며, 이로 인해 승무원 23명 대부분이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건은 5년 뒤 신미양요(1871)의 원인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 북한은 사실을 날조, 김일성의 증조 할아버지가 셔먼호를 격침시킨 것처럼 모든 교과서와 역사서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셔먼호 사건은 고종실록과 패강록(浿江錄), 평양지(平壤志) 등에서 사건의 전모와 성격이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서도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 김응우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1967년 이전의 역사서들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퇴역군인 박춘권을 셔먼호 퇴치 유공자로 기술해 왔다.

 

하지만 북한은 1968년 백봉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이란 역사책에서 갑자기 셔먼호사건의 주역 박춘권을 지우고 대신 김응우란 이름을 넣기 시작했다. 박춘권을 보조역할을 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북한 측에서는 김응우가 결사대를 조직해 셔먼호를 공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이른 바 신천군 학살사건과 함께 반미 교육에 적극 활용하고 있지만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조정에 올린 민관군 포상대상자 27명에는 김응우란 이름이 없다. 1972년 설립한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입구 첫 전시실 정면벽에 김응우가 횃불을 휘두르며 화선(火船)전술을 지휘하는 벽화를 그려놓고 그가 셔먼호를 물리친 사람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소위 신천군 학살사건이란 북진하던 미군이 195010-12월 북한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군내 전체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천명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했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것이지만 미군의 악행이라는 증거가 없으며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기 좌우익이 갈라서 서로 죽이고, 보복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시발은 북한 인민군이었다.

 

북한의 대표적인 反美교양 학습장인 신천박물관(황남 신천)에서 강사가 참관객들에게 전시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신천 사건을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주장하며 반미교육과 계급교양의 구심체로 삼고 있다김정은은 201511월 말 신천박물관을 찾아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군대와 인민들 속에서 반제반미교양, 계급교양을 더욱 강화해 천만 군민을 반미대결전으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백봉의 이 책 이후 북한의 모든 역사서들 즉, 33권에 달하는 조선전사라든가 조선력사’, ‘백과사전’, ‘정치사전’, ‘철학사전등이 모두 박춘권을 김응우로 대체하고 있다. 가장 나중인 1990년대 들어 쓰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김응우가 주로했고 박춘권이 단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슬쩍 흘리고 있다참고로 백봉의 이 책은 보천보습격지휘사건을 비롯 김일성의 항일투쟁왜곡, 조작, 날조의 결정판이다. 이 책이 나온 뒤 우리의 근현대사는 모조리 김일성의 혁명역사로 날조된다.

 

북한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날조하면서 김응우의 생물학적 나이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역사적 사실 조작은 그만두고라도 당시 김응우의 나이가 몇 살 정도인지 추산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북한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에서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의 출생을 1894710(사망일은 1926625)로 기술, 모든 다른 문헌에도 그같이 나온다. 김형직의 아버지인 김보현(金輔鉉)의 나이는 정확히 밝혀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정해보면 최소 20살 쯤 더 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874년 전후로 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김보현의 출생년도가 이 정도라면 김응우의 출생은 그에서 다시 20년 쯤 거슬러 올라가 1854년 쯤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맏아들에서 맏아들로 이어진 경우라 해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었던 1866년에는 김응우의 나이가 대략 12살 정도 된다. 그러면 당시 12세의 어린 소년이 평양 군민(軍民)을 이끌어 대형 상선을 격침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이와같은 불합리성을 제거하기 위해서인지 북한은 1970년대 초 김응우와 출생일과 사망일을 184548 - 1878104, 김보현의 출생일과 사망일을 1871103 - 195592일로 각각 정리해 역사서를 비롯한 문헌에 수록하고 있으나 이런 출생기록이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됐건 이같은 기록에 따르면 김응우는 1845년에 출생한 것이 되는만큼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1866년에 21세의 나이로 군민을 이끌고 상선을 격침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한편 김일성 회고록 등에 따르면 김일성의 가정은 대대로 빈곤했다. 원래는 평양 중성동에서 살았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 증조부 때에 지금의 만경대 생가로 이사를 갔으며 거기서 김응우는 어느 지주의 묘지기로 일했다. 그렇다면 그 때 김응우는 일개 농군이었는데 그런 12(또는 21) 난 사내아이가 평양 감영을 젖혀놓고 평양 군민을 이끌어 셔먼호를 격침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당시 평양은 요충지로 조정으로부터 많은 군대가 파견돼 있었다.

 

김응우가 그런 업적을 세웠다면 당시 조정으로부터 표창과 함께 상금도 받아 생활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나 김응우의 아들 김보현 마저도 소작살이를 한 것으로 김일성 회고록 등 문헌에 나오는 것을 보면 김일성 가계 우상화를 위해 가족사를 조작하다 사실관계가 뒤죽박죽 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서옥식 박사가 공개한 북한 교과서 등 역사서에 기술된 셔먼호사건 왜곡 내용이다.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킨 사람은 박규수-박춘권 아닌 김응우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선생님께서는 미국놈들이 침략선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침입해 왔을때 인민들의 앞장에서 용감히 싸워 놈들의 배를 불태워 버리시였다.(출처: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주체92(2003),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p. 6.)

 

1866년 우리인민은 평양 대동강에 기여든 미국해적선 셔먼호를 격멸하였다...중략...놈들의 만행에 치솟는 격분을 참을 수 없었던 평양인민들은 셔먼호를 격멸하기위한 투쟁에 한결같이 떨쳐 나섰다. 이 투쟁의 선두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 서계시였다선생님께서는셔먼호가 두루섬까지 올라와 머물렀을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집집의 바줄물을 다 모아 강건너 곤유섬과 만경봉 사이에 겹겹이 건너 지르고 돌을 굴리면서 해적선의 앞길을 가로 막으셨다. 선생님께서는 그후 셔먼호가 양각도에 기여들어 살인, 략탈만행을 감행할 때에는 만경대 사람들을 데리고 평양성으로 들어 가시여 화공전술로 침략자들을 소멸할데 대한 창발적인 발기를 하시였다.

 

이때 퇴역장교였던 박춘권은 혼자몸으로 대담하게 셔먼호에 뛰여들어 억류되여 있던 중군을 구출하였다. 7월 하순 셔먼호를 격멸하기 위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은 김응우선생님의 지도밑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결사대원들은 수많은 작은 배들에 나무단을 가득 싣고 류황(유황)을 뿌려 불을 붙인 다음 강웃쪽에서 셔먼호쪽으로 떠내려 보냈다. 당황한 미국침략자들은 총과 대포를 쏘며 급히 도망치려고 서둘렀으나 썰물이 시작되자 강물이 줄어들면서 셔먼호는 여울목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되였다. 드디어 수많은 불배들이셔먼호에 가닿아 침략선은 불길에 휩싸여 폭발하였다. 거기에 탔던 침략자들은 전멸되였다.(출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89(2000), pp. 63-64.)

 

미국해적선셔먼호를 소탕하기 위한 투쟁에서 김응우선생님은 실로 우리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리시였으며 이 싸움마당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무비의 영웅성과 애국적 헌신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출처: 박득준편집, 근대조선력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4, pp. 18-19.)

 

김일성의 혁명가계를 임진왜란때의 명장 김응서장군으로까지 조작하려다 포기

 

북한은 한편 김일성의 혁명가계를 임진왜란 때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왜장 소서비(小西飛)를 죽인 조선의 명장 김응서 장군(평양용강출생, 1564-1624)으로까지 확대하려했다가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북작가 장해성(국제펜 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 19965월 대한민국 입국)씨의 실화소설 단군릉과 노교수에 따르면 김일성수령의 교시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 혁명력사학부의 일부 교수 중심으로 김일성의 혁명가계를 김응우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시기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김응서 장군의 본관이 김해 김씨로서, 김일성의 본관인 전주 김씨와 다른 것으로 판명돼 조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2008323일자 북한개혁방송보도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 때 김응서를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북한 사회에서 김응서의 지명도는 높다는 것이다.

 

이 실화소설에 따르면 평소 수령의 은밀한 교시를 독자적인 채널을 통해 자주 전해듣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학자로 잘 알려진 김일성종합대학 혁명역사학부 부학장 최동식 교수가 어느날 학부장 박상민 교수에게 김일성의 가계를 김응서 장군으로까지 끌어울릴 것을 제안했으나 박교수가 김응서 장군의 본관이 김일성과 다르다는 것을 밝혀냄에 따라 없던 일이 됐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과거 서울대 교수 재직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영환 편집인]

 

 

기사입력: 2017/08/21 [10:53]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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