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마르크스 136주기, 죽어서도 수난
2월 동안 런던 교외 마르크스 묘비 두번 테러
 
서옥식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자본주의 사멸(死滅) 장담했으나 오히려 공산주의가 붕괴

사유재산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그의 이론은 출발부터 오류

지상낙원 약속했으나, 지옥 밖에 만들지 못했다

강제로 국민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범죄라는 사실 문재인 정권은 깨달아야

거꾸로 가는 정권, 헌법·경제정책·교과서에 사회주의 강화

큰정부외치며 결과적 평등에 함몰돼 국가개입·분배만 강조

 

서옥식(政博, 전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

 

314일은 사유재산제도를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규정함으로써 계급투쟁을 통해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공산주의 시조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가 사망한지 136년이 되는 날이다.

 

공산주의 시조 마르크스()와 그의 동료 겸 후원자 엥겔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적과 함께 추종자를 거느렸던 국적 없는 혁명가마르크스가 폐종양으로 런던의 자택 서재 의자에서 앉은 채로 쓸쓸히 6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것은 1883년 그날이었다. 그는 사흘 뒤인 317일 런던 교외 하이게이트 공동묘지’(Highgate Cemetery)의 아내 곁에 묻혔다. 금년은 또한 마르크스의 탄생(181855) 201주년, 그리고 폭력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그의 공산당선언발표(1848221) 171년이자 프롤레타리아트(무산자)의 바이블로 불리는 자본론(Das Kapital) 1권 출간(1867914) 152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타도강령으로서의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표지()와 영국의 런던 근교 하이게이트 공원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비, 그리고 마르크스가 말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주력군(driving forces)인 노동자 군단

 

공교롭게도 지난 216일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비가 붉은 낙서로 뒤덮여 있음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묘비 오른쪽 측면에 증오의 교리(Doctrine of Hate)’, 왼쪽 옆면에는 빈곤의 이념(Ideology of Poverty)'이라고 각각 적혀 있었다. 모두 공산주의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묘지관리소가 트위터를 통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누군가 빨간색 페인트로 묘비 전면에 볼셰비키 학살 기념비 1917~19536600만명 사망이라고 적었다.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이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때부터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6600만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최근 훼손된 마르크스 묘비

  

지난 24일에는 묘비가 손상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묘지관리소 측은 금속 도구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내리친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관리소측은 전문 수리공에게 수리를 의뢰했지만, “완벽하게 원상복구 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아직까지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마르크스의 묘비는 지난 1954년에 세워졌다. 이후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됐다. 마르크스의 묘비가 테러를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0년대에는 마르크스의 흉상에 폭탄을 설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여 년 동안 세계에서 사상적, 실천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은 마르크스였다. 만약 예수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는 기원전(B.C.)과 기원후(A.D.)가 아니라 마르크스 탄생 전(B.M.: Before Marx)과 탄생 후(A.M.: After Marx)로 구분될 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 BBC2005년 조사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마르크스는 27.9%를 얻어 흄(David Hume, 12.7%),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6.8%),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6.5%)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의 사상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인물은 그의 사상적 동반자이자 경제적 후원자인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자연과 사회의 운동 원리를 규명한 철학이론인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 Dialektischer Materialismus)’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Historischer Materialismus)’을 체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 방식과 그 문제점을 밝힌 경제학 이론’,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 방법을 제시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체계화했다.

 

1875년의 마르크스(사진=위키피디어)와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문양 낫과 망치

 

하지만 마르크스의 최대 오해는 사유재산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데 있다. 그가 실제로 이런 표현을 직설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저작물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자본(capital)의 핵심을 이르는 사유재산(private property)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점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성서 디모데 전서 610절을 보면 만악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구절이 나온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all kinds of evil)으로 돼있다. 그러나 이는 돈 자체를 만악의 근원이라거나,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적 메시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온건좌파 단체인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같은 사람은 디모데 전서 해당 구절과는 반대로 돈이 없는 게 만악의 근원”(Lack of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아나키스트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마르크스 보다 한 술 더 떠서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La propriete, c'est le vol!/Property is robbery(theft)!)라고 했다. 일체의 부(wealth)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이것이 누적되어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을 뿐, 거슬러 올라가면 자본은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도둑질의 축적일뿐이라며 모든 재산을 사회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재산이 부정되는 한 시장경제는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소유가 부정되는 데 어떻게 시장경제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모든 생산수단은 국가(정부)에 귀속됨으로써 경제는 계획경제 내지 통제경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산 국가에서 말하는 노동자근로 인테리는 정확한 의미에서 국가 공무원 내지 공직자이다. 정부가 임명하고 고용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베를린의 훔볼트대학(Humboldt-Universitat zu Berlin) 본관 입구에는 런던의 공동묘지 묘비문에 새겨진 영문 어록과 동일한 것이 독일어(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ert; es kommt darauf an, sie zu verndern.)로 새겨져 있다.

 

원래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제도가 인간을 사악하게 하는 근원이라 하여 이를 폐지해야한다는 면에서는 공산주의와 비슷하나, 이러한 사회주의는 개혁을 민주주의적 절차, 특히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과격사상인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그의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이 말해주듯 정통적인 국가나 민주적 통치기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폭력혁명에 의해 브루주아(유산자) 계급을 타도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일시에 없애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로 존재했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really existing socialism: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공산주의)는 스미스(Adam Smith)의 지적처럼 개인의 이익(self-interest)’ 추구가 동력인 자본주의를 배격하고, 자본가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 투쟁심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과거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붉은 혁명을 완수하고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자신들을 공산주의국가로 부르지 못하고 사회주의국가로 칭해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에는 노동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독재가 필요하며 폭력혁명이 수반돼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혁명으로 성공시킨 레닌과 혁명에 동원된 지지자들

 

문재인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시장경제, 시장원리에 대해 우리나라 역대 어느 정치지도자보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문 대통령에 있어 시장경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다름없는 것으로 비춰졌다. 그의 소위 큰 정부론정부가 최대의 고용주가 돼야 한다는 사고가 그것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에 게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언제나 불의의 결과를 낳는 악마의 맷돌’(Satanic Mill)에 다름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는 2006118일 대통령 신년연설이 끝나기 무섭게 카지노 경제에서 도박과 투기로 돈을 번 20%와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80%로 갈라진 대한민국은 아프리카 밀림보다도 못하다. 카지노 경제는 배가 부르면 더는 사냥을 하지 않는 아프리카 밀림의 사자보다도 백배 천배 잔인하다는 글을 자체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노대통령은 시장원리를 공정과 정의를 위반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시장도 이념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집권 5년간 기업노사교육부동산산업복지 등의 모든 정책적 논란속에서 시장원리가 편가르기의 지표가 돼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10월 혁명당시 크렘린의 붉은 광장장앞에 나와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연설하는 선 레닌

 

인류 역사를 보면 큰 정부론이 세계의 한 축을 지배하고, 정부가 최대의 고용주인 시기가 분명 있었다. 마르크스의 교의(敎義)에 따라 시장경제를 붕괴시킨 레닌의 러시아혁명(1917) 성공이후 소련과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소멸(1991)70여 년간의 기간이었다.

 

시장경제는 인류가 고대 이후 영위해온 생활방식으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화하고 가격신호에 따라 자원이 배분되어가는 가치중립적 사회운용방법이지 이대올로기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장절대주의(흔히 신자유주의로 표현)나 시장지상주의가 우리 사회의 대안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계획이 시장을 대체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시장원리의 작동결과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위해 정부의 인위적인 계획으로 시장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시장대신 계획을 택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다. 그것은 어쩌면 산업사회에서 지식활용과 정보전달기구로서 작용하는 시장의 중요한 역할을 간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시장실패를 치유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보나, 시장실패가 바로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 어떤 시장실패는 정부가 치유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부 자체의 문제로 인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적절한 법과 제도의 구축을 통해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을 살려 좋은 시장을 만드는 길 뿐이다.

 

마르크스는 181855일 독일의 트리에(Trier)에서 태어났다. 원래 유대교 집안이었으나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Heinrich Marx)는 변호사였으며, 사상적으로는 계몽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중산층 집안에서 유복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트리에의 김나지움(Gymnasium)에서 고전문학과 계몽주의를 공부했으며, 1835년에는 법학 공부를 위해 본(Bonn) 대학에 입학했다.

 

마르크스는 당시 고향에서 자신보다 네 살 많은 부유한 남작 가문의 딸 예니(Jenny von Westphalen)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지만, 주변의 반대 때문에 1843년에야 그녀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애의 후반부를 가난 속에 살았던 마르크스는 두 아들과 딸, 세 명의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마르크스는 1836년 본 대학에서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전학했지만, 법학보다는 철학과 역사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마르크스는 그 당시 독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헤겔(Hegel)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청년헤겔학파(Junghegelianer, Young Hegelians)가 주도하는 모임에 참여했다. 철학 공부를 계속하던 그는 1841년 예나대학(Friedrich-Schiller-Universitat Jena; Friedrich Schiller University of Jena) 철학부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the Democritean and Epicurean Philosophy of Nature)’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헤겔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관념론에 대한 비판의 내용도 담고 있다. 그 당시 프로이센 정부는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청년헤겔학파를 탄압했고, 이로 인해 마르크스는 대학에 계속 남아 연구하기를 포기했다.

 

1841년에 트리에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정치 신문인 라인 신문(Die Rheinische Zeitung)’을 발행에 몰두, 이듬해인 1842년 이 신문의 편집장이 됐다. 이때 마르크스는 공화제와 보통 선거권을 주장하는 급진적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점차 공산주의와 철학적 유물론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마르크스는 나중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의 서문에서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을 경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물질적 이해관계의 대립과 같은 경제적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843년에 라인 신문이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서 폐간되자 마르크스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의 파리로 이주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급속한 산업화의 모습과 함께 노동자들의 빈곤한 삶을 보게 됐다. 또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산주의 조직과 접촉하면서 조직적인 노동 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1844년에 발행한 독불연보(獨佛年譜, Deutsch-Franzosiche Jahrbucher)’라는 잡지에 기고한 두 편의 논문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Zur Judenfrage)’에서 사적(私的) 소유와 개인주의를 타파하는 혁명만이 인간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에서는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보편적인 인간 해방을 위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것인 데, 이는 그의 사상이 급진적 민주주의에서 혁명적 공산주의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스미스(Adam Smith)와 리카도(David (Ricardo) 등의 경제학 저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들을 비판하는 경제학철학수고(O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Economic and Philosophic Manuscripts)1844년에 썼다. 흔히 경철수고(經哲手稿)’라고 불리는 이 책은 초고의 형태로 보관되다가 1932년에 처음으로 출판됐는데, 여기에는 인간론 및 소외론 (疎外論: alienation, Entfremdung)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적 존재(類的 存在: The species being, Gattungswesen)’, 즉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인 노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식이 자본주의의 사적소유에 의해 왜곡되고 억압됨으로써 인간 소외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책이 1932년에 출판된 이후에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주의의 관점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이론들이 등장, 이로 인해 많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1844년에 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났는 데, 이때부터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는 사상적 동반자가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최초의 공동 작업으로 같은 해에 신성가족(神聖家族: Die heilige Familie)’을 썼는데, 이 책은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를 비롯한 청년헤겔학파의 관념론적 견해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45년에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추방당해 브뤼셀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여기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마르크스는 11개 주장으로 이루어진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Thesen uber Feuerbach, Theses on Feuerbach, Theses sur Feuerbach)’를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그 대신에 실천적 유물론을 옹호했다. 그는 널리 알려진 11번째 테제에서 변혁적 실천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이 문구는 그의 묘비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1845년부터 1846년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를 저술했다. 이 책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관념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기존의 독일 철학이나 사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M. Stirner)와 같은 청년헤겔학파의 관념론적 견해를 비판했으며, 또한 그륀(K. Grun)이나 쿨만(G. Kuhlman)과 같은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사회주의(Der wahre Sozialismus)’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과학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역사와 사회를 물질적인 생산 활동을 토대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하며 나아가 이러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체가 되는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인 단계로 성숙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원고의 형태로 보관되다가 1932년에 소련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마르크스는 1847철학의 빈곤(Misere de la philosophie)’이라는 책을 통해 프루동(Proudhon)의 사회주의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거부하는 소시민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당시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실천적인 정치 활동에도 직접적으로 뛰어들어 사회주의자들의 비밀 단체인 의인동맹(義人同盟: Der Bund der Gerechten)’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이 단체를 공개적 혁명 조직인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 Der Bund der Kommunisten)’으로 바꾸었다. 1848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단체의 강령을 밝히는 선언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산당선언이다.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던 그 해 파리에서 ‘2월혁명( Revolution de Fevrier)이 일어났고 이를 기화로 삼아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프로이센 등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봉기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Proletarier aller Lander vereinigt Euch!, Workers of all lands, unite!)”는 문구로 끝을 맺고 있는 이 공산당선언 책자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대한 분석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됐으며, 나중에는 가장 많이 읽히는 공산주의 문헌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1848년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각국에서 왕정에 대항하여 공화정을 세우려는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독일로 귀국해 새 라인 신문(Die Neue Rheinische Zeitung)’을 통해 혁명의 소식을 전달하면서 이를 급진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분석했다. 1849년 혁명이 실패한 후에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추방됐으며, 그 후에 파리를 거쳐 영국의 런던으로 옮겨가서 사망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1850년부터 1852년까지 마르크스는 자신이 겪었던 혁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의 프랑스 계급투쟁(Klassenka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1848년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가 공화국 정부에 의해서 분쇄되는 것을 보면서, 이제 부르주아지와 봉건 세력 사이의 투쟁보다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투쟁이 더 중요하며, 혁명의 과도적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1850년대에 마르크스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경제학과 관련된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탐독했으며,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수많은 경제학 저서들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발췌하거나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초고를 쓴 다음에 이것을 다시 세밀하게 수정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계획하였던 경제학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몇 권의 경제학 책을 출판했고 이와 더불어 경제학과 관련된 많은 분량의 원고를 남겼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걸쳐서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서 커다란 고통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경제학 연구에 더욱 정진했다.

 

1857년에서 1858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자본론(Das Kapital)’의 초고에 해당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을 썼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으며 소련에서 1939년에 출판됐다. 이 책에 붙여진 서론은 주로 변증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경제학의 탐구 방법뿐만 아니라 변증법에 대한 그의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1859년에 마르크스는 이 초고의 첫 부분을 새로 개정, 상품과 화폐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는 정치경제학 비판(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사상적 발전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와 더불어 자신의 이론적 연구 작업에서 길잡이가 되었던 역사적 유물론의 요점을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밝히고 있다.

 

1860년대 초반에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성 방식에 대한 윤곽을 그린 다음에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갔으며, 1867년 드디어 자본론1권을 출판했다. ‘자본론의 제2권과 제3권은 초고 형태로 보관되다가 마르크스 사망 후 엥겔스에 의해서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그리고 제4권으로 명명되기도 한 잉여가치학설사(Theorien uber den Mehrwert)’는 마르크스가 기획만 하고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쓰여진 관련된 초고를 토대로 1905-1910K.J.카우츠키에 의해 편집, 출간됐다. 이 책은 1956-1962년 소련·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에서 자본론4권이 아닌 자본론속편으로 새로이 편집, 간행됐다. 따라서 통상 자본론이라하면, ‘잉여가치학설사를 제외한 1,2,3권만을 뜻한다.

 

자본론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자본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나아가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 가치설, 잉여 가치와 착취, 생산 부문간의 불균형적 생산,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실업자의 증가, 공황의 발생 등 자본주의 경제의 운영 원리와 그 문제점을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1864년에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1 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이 출범했는데, 마르크스는 이 협회의 창립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고 행정 업무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실질적인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됐다. 1871년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꼬뮌(Commune)’을 선포하자 마르크스는 이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이라는 책을 썼다.

 

이어 마르크스는 1875년에는 독일 노동자당의 통합을 위해 제정된 강령을 비판하는 고타강령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을 썼다. 이 저술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과도기 단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와 높은 단계인 공산주의 사회를 구분하면서, 낮은 단계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른 분배원리가 적용되고, 높은 단계인 공상주의 사회에서는 필요에 따른 분배원리가 적용된다고 보았다. , 공산주의 단계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노동자 계급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마르크스는 거의 65세가 다 되어 가던 1883년에 영국에서 삶을 마감했다. 비록 마르크스는 자신이 그토록 기대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발생한 여러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세계를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주요 예언들은 공산당선언 171, 그의 사망 136년이 된 지금 모두 빗나갔다.

 

첫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나라(예컨대 영국, 독일 등)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어느 한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의 80%이상이 농민이었고 문맹률이 70%에 달했던 유럽 최대의 빈국 제정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뿐이다.

 

둘째, 자본주의가 결국 실업, 공황, 빈부격차 및 사회적 불평등 등 자기 모순으로 멸망할 것이라던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된 것이 아니라 소련과 동구(東歐)에서 보듯 공산체제가 붕괴됐다.

 

셋째,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생산수단을 공유할 것을 천명했지만 생산수단을 공유·관리·독점하는 사회조직은 오히려 더 폐쇄적인 절대주의,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넷째,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호소했지만 이들은 단결 대신 세계무역기구(WTO)에 의해 분열됐다.

 

다섯째, 공산주의 사회 도래와 함께 법·군대·경찰과 국가가 사멸한다고 했으나 국가는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 기능과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

 

여섯째,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소득분배가 이뤄진다)는 사회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세상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재화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무제한으로 생산되지 않는 한 영원히 불가능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카를 포퍼(Karl Raimund Popper)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리 아닌 사이비 과학으로 규정했다. 그는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주요 문제를 푸는 데 서로 협력할 동반자대신 을 발견했다고 지적하고 그들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랑-협력-책임대신 대결-갈등-증오를 선택한 것은 처음부터 커다란 오류였다고 지적했다.

 

역시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겸 정치철학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저서 노예로 가는 길’(The Road to Serfdom)에서 사회주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고 설파했다. 처칠 전 영국총리는 사회주의의 고질적 약점은 불행의 공평한 분배라고 했으며 미국 작가 존 위노크어(Jon Winokur)지상낙원을 약속한 자들은 지옥밖에 만들지 못 한다며 사회주의자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고르바초프 정권의 실질적인 제 2인자로 소련 공산당 선전부장이었던 야코블레프(Aleksandr Nikolayevich Yakovlev)는 소련 해체 후 강제로 국민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범죄라고 술회했을 정도다.

 

마르크스의 교의(敎義)에 따라 일찍이 그의 충실한 제자들인 레닌·트로츠키·스탈린·마오쩌둥(毛澤東호치민(胡志明티토·카스트로·김일성 등은 공산주의자임을 자칭하고 세상을 바꾸자나섰으나 남긴 것은 그들의 인민을 거지로 만든 것뿐이었다. 자본주의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를 역사의 필연이라고 주창해오던 그들의 한 세기에 걸친 거대한 이념은 무모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주저앉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은 2005531일 미국의 보수적인 시사주간지 휴먼 이벤츠(Human Events)’에 의해 ‘19-20세기의 가장 해로운 10대 서적(Ten Most Harmful Books of the 19th and 20th Centuries) 1, 자본론은 6위에 랭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권은 지금 헌법과 경제정책, 교과서에서 실패한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의 불을 지피려하고 있다. ‘큰 정부를 외치며 기계적-산술적-결과적 평등에 함몰돼 국가개입·분배만 강조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노조, 교육현장에서도 마르크스의 투쟁구호인 세상을 바꾸자는 소리만 들린다.

  

기사입력: 2019/03/15 [00:03]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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