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이승만, 거대한 생애 90년 9번"
 
이한우 이승만 연구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58)-6 25이후 외교노선

 6 25이후 외교노선(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58)
• "워싱턴 겁쟁이 때문에 한국 분단"
• 방미 환영식서 대한정책 노골적 비판
• 장개석과 일 배제한 반공연합체 공조
• "공산주의 있는한 평화는 없다" 미 의회 연설 박수 33차례

    6 25가 끝난 직후 국내적으로 이승만은 정치안정을 위한 권력투쟁을 수행하는 한편, 대외관계의 기본틀을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먼저 그 시점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이승만이 선택한 외교노선의 적실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이다. 6 25는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치른 전쟁이다. 그러나 휴전과정에서 이승만과 미국행정부의 대립 및 불신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결국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정립이 시급했다는 뜻이다.

 일본과는 같은 자유주의체제였지만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미국은 한-미-일 삼각구도의 방위체제를 위해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이승만의 반대와 방해에 부딪쳐 뜻을 실현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3년간의 전쟁을 치른 중공 및 북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적대적 긴장을 유지하는 관계였고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유중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한-미 불신 위험수위

 이렇게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대일관계완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어떻게 무마하며 동시에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정립은 공산세력과의 싸움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이런 틀에서 휴전 직후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살필 때 그의 공과는 제대로 가려질 수 있다.

 특히 그의 공과를 가리는데 있어 이 시기의 외교는 통상적 외교라기보다는 건국의 차원에서 이뤄진 건국외교라는 점도 고려돼야 할 것이다. 즉 단기적 성과보다는 대한민국의 장기적 외교전략이란 차원에서 그의 외교성과들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무렵 이승만의 대표적 외교활동은 크게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1953년 11월27일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 총통과 반공통일전선 결성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듬해인 1954년 7월25일 미국을 방문해 대미외교활동을 펼친 것이다.

 미국언론에서는 흔히 이승만과 장개석을 패키지로 묶어 아시아의 외곬 반공주의자 로 표현해왔다. 둘 다 분단된 나라의 지도자로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랬을 것이다. 또 일면 타당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이승만과 장개석의 관계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우선 개인적으로 이승만은 장개석을 좋게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1940년대초 이승만이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할 때 그를 줄곧 비판했던 사람중에 중국외교관 빅터후와 t v 숭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김구-김규식의 임정세력과 갈등할 때 장개석은 언제나 임정세력을 후원했다. 또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올리버는 "리박사는 장개석이 좀 더 과감히 대처했더라면 중국본토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가능케 한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그를 낮게 평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밖에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적지않게 작용했다. 한국이 수백년간 중국의 절대적 영향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이외에도 1946년에서 1950년 사이에 서울의 화교들이 보여준 암거래, 밀수, 불법통화거래 등 부정적 행태들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주변국 원거리정책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6 25 당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도 국부군의 참전을 이승만이 극력 반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김용식 전외무장관은 이와관련해 "이박사의 역사적 감각은 한국이 언제나 주변국가에 의해 침해를 당했기 때문에 주변국가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1949년 8월 장개석 총통의 방한에 대한 답방의 형식으로 1953년 11월27일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을 갖고 반공통일전선 결정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반공통일전선은 이승만의 구상에 의한 것으로 나름의 포석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1월30일 발표한 담화에서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재침을 엄단키 위해 태평양동맹을 결성해야한다 고 발표했고 2월13일에는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에게 아주반공회의 소집을 제창함으로써 일본 재침 저지 라는 명분하에 일본을 배제한 아시아반공연합체를 구체화했다. 이를 통해 아시아외교에서의 이니셔티브를 장악하는 한편 일본과의 외교수립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을 막아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이같은 반공반일 외교노선 형성은 미국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공염불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그를 달랠 의도를 가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1954년 7월25일 미국을 방문한다.

 미 공군기를 탄 이승만은 26일 오후 4시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환영식이 있었다. 리처드 닉슨 부통령 내외가 환영을 나왔다. 닉슨의 환영사가 끝난 후 이승만이 마이크를 잡았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세력의 위세만 과시해주었다"는 말로 서두를 꺼낸 15분간의 즉흥연설에서 이승만은 줄곧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고 "우리는 기어이 우리들의 계획을 달성하고야 말 것"이라고 강조하며 연설을 맺었다.

 이 때의 이승만에 대해 올리버는 "그는 싸우려는 심사를 갖고 미국에 온 것"으로 풀이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무장관이나 대통령을 거치지 않고 직접 미국국민을 상대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분명했다. 영어연설문의 경우 대부분 올리버가 직접 쓰거나 이승만이 골자만 제시하면 그가 원고를 작성하고 다시 이승만이 사소한 뉘앙스 정도를 바로잡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 때는 달랐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할 대부분의 연설은 올리버에게 초안을 잡아줄 것을 부탁하던 그가 이번 의회연설은 이례적으로 그에게 초안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올리버가 이승만에게 연설초안을 보여달라고 하자 "국회에 내놓을 이 이야기는 나 자신의 것이오. 여기에는 내가 아주 특별히 하고싶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내가 작성한 방식 그대로 정확하게 전할 것이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7월28일 오후 4시30분 이승만은 "미국 국민이 대단히 존경해 마지않는 용감한 자유의 투사"라는 조셉 마틴 하원의장의 소개를 받으며 연단에 섰다. "미국인들이 한국을 위해 베풀어준 모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인사말로 시작한 이날 연설은 33회의 박수갈채를 받을 만큼 때로는 논리적이고 때로는 웅변적이며 때로는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초안 스스로 작성

 그는 "싸우려는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자유세계는 공산세계를 타도하고 남을만한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며 "한국이 자유를 위한 싸움의 선봉이 되겠다"고 선동적으로 강조했다. 또 그는 "나는 이것이 강경한 주장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이 세계를 강경하게 만들었고 연약함은 바로 노예가 됨을 뜻하는 무서운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끝으로 그는 "나의 친구들이여! 평화는 결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반반으로 남아 있는 세계에서는 회복될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라며 연설을 끝냈다.

 이것은 이승만의 진심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이 가장 가까이 한 미국에 대해 하고싶은 말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를 자극한 결과를 가져왔고 그 후 원만한 한-미관계를 정립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이승만 자신도 그후 올리버에게 "내가 저번 미국회에서 행한 연설은 내 일생일대에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었어"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의 오판이나 능력부족 때문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국력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경력에서 이 연설은 최정점에 이른 것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시기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이 외교수습기간이고 6 25 휴전과정에서의 반공포로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등이 외교능력 가시화 기간이었다면 휴전 직후 2년간의 외교활동은 대한민국의 외교적 틀을 굳건히 한 외교의 완숙기였다고 할 것이다.

 박동진 전외무장관은 이 무렵 이승만의 외교활동에 대해 "외국에서 korea라면 몰라도 syngman rhee라면 한국의 대통령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만큼 거의 이박사가 가진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국제적 위상을 높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59)-불교계의 친일타파

불교정화(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59)• "우리불교는 화엄이야" 소신따라 결단
• 7차례나 "대처승은 절 떠나라" 담화
•  깡패 승려 낳았지만 왜색불교 일소
• 일제정책 후유증 54년 대처승 7000에 고유선승은 40명
 
 이승만은 1954년 5월 어느날 서울 근교 관악산의 연주암에 올랐다가 절에 치맛자락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심지어 논산의 관촉사에 갔을 때는 법당에 아직도 황국신민서사 가 나부끼고 있는 것을 보고서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에 끼친 일제의 악영향이 광복후 10년이 돼가도록 전혀 치유가 되지 않고 방치된 결과였다. 이승만은 5월21일 "대처승은 절에서 떠나라"며 왜색불교 척결을 골자로 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사실 측근들은 기독교신자인 대통령이 자칫 다른 종교계의 내부문제에 잘못 손댈 경우 정치적 곤경에 빠질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이승만은 "우리 불교의 전통은 화엄이야"라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담화문의 일부를 보자. "일인 중의 생활을 모범으로해서 우리나라 불도에 위반되게 행하는 자는 이후부터는 친일자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으니 가정을 가지고 사는 중들은 다 사찰에서 나가서 살 것이며 우리 불도를 숭상하는 중들만을 정부에서 도로내주는 전답을 개척하며 지지해 나가록 할 것이니 이 의도를 다시 깨닫고 시행하라."

 이 담화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선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일제때부터 1954년까지 불교계의 흐름을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하는 일이다. 두번째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종교계의 개혁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안의 현실적 중요성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일,승려지위 보장

 일제는 강점 이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 대해서도 일본화에 나섰다. 그에 따라 일본식 대처승이 널리 확산되고 교리상으로도 우리 전통의 화엄불교보다는 일본식 불교를 이식시켰다. 그런데 일제가 외형상으로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소외당해오던 불교계가 쉽게 일제에 종속당하는 일이 빚어졌다.

 그래서 일제 말기가 되면 대처승은 7천여명인데 반해 우리 고유의 선승은 40명 정도로 이들이 청정비구의 맥을 겨우 잇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복이 됐다. 광복후 불교계는 30본산 대표자 대회를 열고 친일파 승려 색출을 결의했다. 이어 사명대사비를 깨는등 황민화운동에 적극 앞장 선 친일 승려들은 불교계에서 내몰렸다. 그러나 진정한 친일잔재 청산에 이르지는 못했다. 불교계 전체에 배어든 일본풍 불교의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처승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대처승=왜색 혹은 친일불교라는 등식이 자동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대처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대처승들은 대부분 일제의 식민정책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분명 문제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후 좌우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각종단체들이 불교계에서도 생겨나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불교계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54년이란 시점까지 불교계가 전혀 일본식 불교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7천 대 40이라는 극단적인 세력차이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비구승들은 변변하게 밥 얻어 먹을 절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도 한국적인 불교전통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구승 진영의 노력은 계속돼 왔고 이승만은 이런 노력에 결정적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된 셈이다.

 물리적 충돌 발생

 이승만의 담화가 나오자 20~30명의 뜻있는 스님들이 선학원에 모였다. 그런데 이들 간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다. 강경파는 대처승은 일시에 절을 떠나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온건파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대처승이 모두 물러난다 해도 절을 지키고 수행할 비구승이 모자라기 때문에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대표적인 사찰 3개만 우선 접수한 다음 단계적으로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절대우세인 대처승계열은 광복과 전쟁을 거치는 혼란의 와중에도 사실상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온존돼 관계요로에 다양한 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구승 온건파의 주장인 3개 사찰 양보안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승만은 계속해서 모두 7차례에 걸쳐 대처승은 절을 떠나라 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리하여 비구승측은 일제잔재청산이라는 명분과 함께 대통령의 현실적 지원까지 받으며 적극적으로 절뺏기 싸움에 나서게 된다. 이를 불교계에서는 정화불사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물리적 힘을 앞세운 절뺏기 싸움이다 보니 이 과정에서 깡패들이 끼여들었다. 물론 7천 대 40이라고 하는 절대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불가피했다고는 하나 수준 이하의 승려들이 양산됨으로써 두고두고 한국불교에 악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승만의 불교정화 담화에 대해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화불사가 불교계에 남아있던 일제잔재를 일거에 청산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때 불교계의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가정해보라.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의 조치에 대해 이런 비판은 있을 수 있다. 온건한 방법론을 택했더라면 그후 불교계에 깡패들이 판을 치는 부정적 유산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란 비판이다. 그러나 이는 과연 그랬더라면 일제잔재를 청산할 수 있었겠느냐 는 반문에 적절한 답을 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조치는 그후 30년이 넘도록 후유증을 남기기는 했지만 국민정신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불교계의 일본풍을 일소했다는 점에서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두번째는 이 조치의 현실적 중요성을 깨닫는 일이다. 예를 들어 현재 논의되다가 좌초된 사법개혁과 비교해보자.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사법개혁에 비해 종교계의 개혁이 정치적으로 훨씬 민감하고 힘든 일이다. 이승만 측근들의 일치된 반대도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울만큼 열성적인 기독교신자 이승만은 이를 관철시켰다. 그것은 국가건설과정에서 정신적 토대를 다지는 근본적인 문제였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 깊은 이해

 사법개혁의 경우 국민 대다수가 열망함에도 불구하고 실무법조인들의 저항에 부딪혀 사실상 흐지부지 되고 있다. 상황은 비슷하다. 당시 대처승들의 저항도 법조인들의 저항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그보다 못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화불사는 성공한 반면 사법개혁은 실패를 눈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승만의 경우에는 "우리 불교는 화엄이야"라고 말할 만큼 사안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반면 현재의 사법개혁실패는 그렇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불교정화 지시와 관련해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가 불교계의 개혁 을 수행하면서 굳이 개혁 이니 뭐니 요란을 떨지 않았으면서도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불교개혁은 그러나 불교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한 테마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존의 이승만평가가 가진 함정의 대표적 사례를 보게 된다. 좌파적 이념에 입각한 맹목적 비판도 문제지만 시각을 피상적 정치행위에만 맞춰온 정치학계의 연구방식이 지닌 한계가 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승만의 불교개혁은 보다 넓은 맥락에서 파악될 필요가 있다. 이승만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속좁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고 단기연호를 사용한 것도 이승만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그가 불교의 문제에 대해 자신있는 태도로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단이었다 할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0)-사사오입 3선개헌

 3선개헌(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60)
•  신익희 대북접촉설 퍼뜨려 분위기 조성
• 이기붕-자유당에 "유고때 승계" 보장
• 국민지지 추락-강한 야당 탄생 계기돼
• 신당운동,보혁갈등으로 분열 민주-진보당 창당
 
 3대총선서 압승


 비극은 1954년 5월20일 실시된 제3대 총선에서 이뤄진 자유당의 대승에서 시작됐다. 자유당은 총의석 2백3석중 1백14석의 당선자를 내고 무소속까지 영입해 개헌선인 3분의 2, 즉 1백36석을 확보했다.

 6월9일 의장단 선거에서 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최순주와 야당의 곽상훈을 선출했다. 그리고 불과 3개월후인 9월6일 자유당은 개헌안을 공고했다. 주요내용은

 첫째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3선제한을 철폐한다,
둘째 국가안전에 관한 중요사항은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셋째 국무총리제를 철폐한다,
넷째 국무위원의 연대책임제를 철폐한다,
다섯째 대통령유고시 부통령이 이를 계승한다 등이다.

 한마디로 이승만의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놓고 부산정치파동 때 관철하지 못했던 철저한 대통령중심제를 다시금 관철하겠다는 내용이다. 동시에 새롭게 자유당의 실력자로 떠오른 이기붕이 앞을 도모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결국 이 개헌안은 이승만이 물러날 경우 정권이 야당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자유당세력과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이 맞물려서 나온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개헌안은 여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거쳐 11월18일 국회에 공식 상정됐다. 자유당은 온갖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억지로 만들어 놓은 자유당의 개헌선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각종 위협을 가하는 한편 야당에 대해서는 매수를 시도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개헌안을 둘러싼 공방전이 한창이던 10월25일 민국당 정책부위원장인 함상훈이 느닷없이 성명서의 형식으로 소위 뉴델리 회담설 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제2대 국회의장 신익희가 1953년 여름 영국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도의 뉴델리에 들러 북측의 조소앙과 접촉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키로 했다는 것이었다. 진상규명 없이 여야간의 논란만 계속된 사안이었다.

 자유당은 개헌안 중에 포함된 국민투표제를 이 사건과 연결지었다. 중립화 반대-협상배격 이라는 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자유당은 개헌안에 반대하면 곧 중립화 지지-협상배격 반대 라는 논리를 내세워 의원들을 협박했다. 그밖에도 기상천외한 투표방법, 협박과 공갈, 매수시도 등이 이뤄진 가운데 11월27일 표결이 이뤄졌다. 표결결과 재적 2백2명중 찬성 1백35명,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개헌선에서 1명이 모자라 사회를 보던 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언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개헌시도를 막아낸 야당의석에서는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는 돌이켜 보면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역사의 경고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날인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찬성표 1백35표가 과연 재적 2백3명 중 3분의 2에 모자란 것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됐고 장시간의 논의를 거쳐 1백35명이면 이미 3분의 2를 넘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며 따라서 의사록을 정정하기로 결정했다.

 "사사오입 가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당시 이재학 자유당 원내/총무가 발표한 담화는 이를 설명해준다.

 " 현 재적의원 2백3명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정확한 수치는 135.333 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4사5입(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하여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백35명이 의심할 바 없다.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이라는 것을 3분의 2초과 라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법률용어로서 3분의 2의 수를 포함해서 3분의 2의 수와 그보다 많은 수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것을 전술한 수학방법에 의하면 1백35명의 찬성으로써 개헌안은 가결되는 것이다. 이 결론은 최윤식 이원철 박사 등 수학계의 최고권위도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 "

 이같은 엉터리 주장에 입각한 자유당은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27일의 결정을 뒤집으려 했다. 회의 시작과 함께 최순주 부의장이 27일 본회의에서의 개헌안 부결선포는 정족수의 착오이므로 이를 취소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철승의원이 단상으로 달려 올라가 최순주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리는등 여야의원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야당의원들은 전원퇴장하고 자유당 의원 1백24명과 무소속 강세형 등 1백25명만이 참석해 개헌안 통과를 가결했다.

 무리한 개헌의 후유증은 컸다. 우선 이승만의 개인적 카리스마가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독립운동가요 건국의 아버지로 대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던 이승만은 이를 계기로 국민들에게 권력욕에 눈먼 노독재자 로 비치기 시작했다. 이 때 이승만의 나이 80세. 현재 생존해 있는 당시의 측근인사들은 한결같이 "54-55년을 고비로 이박사의 총명함이 현저히 둔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점은 상당부분 사실인 것같다. 그 시기 이후로 이승만의 정치나 외교면에서 뚜렷한 성과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절대적 수세에 있던 야당은 이를 계기로 뭉치기 시작해 신당결성운동으로 나아갔으며 자유당에서도 일탈세력이 나타났다.

 사사오입 개헌이 남긴 이 모든 후유증은 1956년의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현저하게 저하됐다. 그리고 야당은 약진했다. 선거결과를 보면 자유당에서는 이승만 이기붕, 민주당에서는 신익희 장면, 진보당에서는 조봉암 박기출이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나서 이승만과 장면이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때 이승만의 득표율은 55.7%. 1952년 대선에서 72%를 얻은 것과 비교할 때 민심이 이승만으로부터 상당수 떨어져 나갔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1952년과 달리 이 때는 관권개입이나 각종 부정이 행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55.7%라는 단순한 수치를 넘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독립운동가요 건국의 아버지였던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가속화된 것이다. 이 점은 부통령에 민주당 장면후보가 당선된데서도 재차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해준다.

 한편 자유당의 기상천외한 개헌추진은 야당세력으로 하여금 연합의 필요성을 제고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야당세력들은 자유당 반대 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당파적 이해관계면에서 일치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의 전횡으로 위기감이 높아진 야당세력은 통합을 추진한다. 당시 신당추진운동에 대해 김일영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윤보선 등 민국당계열을 비롯해 곽상훈 장택상 등 무소속, 장면 오위영 김영선 등 과거 원내자유당세력, 조봉암 서상일 등의 혁신계 등 원내외의 광범위한 야권세력의 지도층이 신당운동에 참여했다"며 "그러나 이 역시 이념적 공통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의견충돌이 잦았고 특히 보수세력과 혁신세력 간에 심했다"고 지적한다.

 현재도 정계영향

 특히 조병옥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좌익전향자를 비롯해 독재행위나 부패행위가 현저하여 사회적 규탄을 받은 자들과 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의도는 주로 정적배제였다는 것이 학계의 분석이다. 이러니 정치연합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결국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은 각기 민주당과 진보당을 결성해 56년 대선에 나서게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민주당의 태동이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현재까지도 한국정치가 민주당의 신파 구파 잔재세력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민주당은 개헌 직후인 1954년 11월30일 호헌동지회를 결성한 다음 신당조직추진위원회가 발족됐고 이어 민관식 현석호 등 14명의 자유당 탈당인사, 장면이 이끄는 흥사단 세력 등이 민국당 후속세력과 함께 1956년 9월19일 탄생됐다.

 민주당의 창당과 함께 한국정치는 비록 초보적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양당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이 4 19로 물러나기까지 강력한 대여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야당다운 야당 의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심어주었고 4 19이후 잠깐이지만 민주당 정권의 수립까지 이뤄질 수 있었다.

 반면 신당태동과정에서 민주당과는 별도로 성립된 조봉암의 진보당은 대한민국에서는 최초의 진보성향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이 23.8%의 지지를 얻는등 대약진의 가능성을 보였으나 진보당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진보정치의 싹은 끊기고 말았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1)-교육대통령

교육관(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61)• "가르쳐야 나라 선다" 잇단 대학설립
• "대학생은 전후복구 원동력" 병역 특혜
• 농지개혁 발판 국교 의무교육을 실시
• "한국의 MIT대 만들자" 재산털어 인하공대 설립지시
발행일 : 1995.11.13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50년대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그저 가난하고 부패했던 시절인가. 후대의 입장에서 이승만의 업적평가를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질문이다. 당대를 살았던 장년-노년세대들은 대부분 50년대에 대해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라고 이야기 한다. 보릿고개도 여전했던 시절이다. 60년대 이후 박정희시대를 이야기할 때 50년대는 그저 개발독재의 시기를 빛내기 위한 조연에 불과하다.

 과연 50년대에 아무런 준비와 축적없이 60년대 이후의 도약이 비약적으로 이뤄졌는가. 단호히 그렇지 않다는데서 이 글은 시작한다. 분야에 따라 눈부신 성과도 있었고 미미했던 성과도 있었다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눈부신 성과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교육이다. 그것은 우연적인 일이 아니다. 교육에 관한 이승만의 확고한 철학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이미 이승만은 우리 민족의 살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특히 우리나라 지성사에서는 거의 독보적으로 동서양의 학문 에 두루 통달했던 이승만으로서는 교육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일찍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흔히 그를 독립노선을 따질 때 외교노선이라고 부르지만 이승만이 줄곧 종사했던 분야는 교육이었다. 1910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처음 한 일이 ymca학교의 학감이었고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해서 1945년 환국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일관되게 정성을 쏟은 것도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이었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박용만과 대립을 빚은 것도 따지고 보면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본 이승만의 독립운동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교육관은 대한민국 건국 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뀐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고생을 해서 자식세대를 잘 가르쳐야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다"는, 어찌보면 소박하면서도 아주 핵심적인 통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더불어 그가 실시한 농지개혁은 그후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기 땅을 갖게된 농민들이 "내 자식은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 나와 같은 고생은 면하게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으리란 것은 굳이 사료를 뒤지지 않더라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6.25 전란시에도 노천학교나 천막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힘들어도 학교를 보낼 수 있게된 농민들의 여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이승만의 교육관에 대한 이같은 기본적인 인식을 가질 때 이승만이 집권했던 50년대의 교육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가능하다.

 특히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 해방 직후 우리의 문맹률은 70%를 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운운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비현실적인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시급했던 것은 문맹타파로 이는 국민학교의 의무교육화와 직결된다. 그런데 1950년 6월1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민학교의 의무교육이 실시됐으나 불과 한달도 안돼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몇년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교부는 1954년부터 6개년계획을 세워 1959년까지 학령아동 96%의 취학을 목표로 하는 의무교육실시계획을 추진했다.

 중등학교가 전시에도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부분의 교육시설이 파괴되거나 군에 의해 징발되는 상황에서도 산속, 해변 가리지 않고 노천교실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은 정부의 지원노력 못지 않게 국민들의 불타는 교육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이 끝난 후 대거 대학에 진학하면서 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특히 전시학교의 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50년대 교육의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대학교육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는 경성제대 1개와 25개의 전문학교밖에 없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이 되면서 (단과대학을 포함해) 그 5배에 달하는 1백35개교에 이르게 된다. 교원수는 9백70명에서 3천55명으로 3배, 학생수는 7천8백명에서 7만6천5백명으로 9배에 이르는 발전을 보였다. 이처럼 해방 이후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교육팽창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 이승만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장이다. 일반국민의 교육열과 교사-교수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승만이 국가건설과 관련해 교육, 특히 대학에 쏟은 열정은 분명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 전시기간 중에 대학생들은 전후 복구의 원동력이 된다하여 병역연기등 특혜를 준 것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

 "외국어의 전문적 교수와 유능한 외교관, 실업가의 해외진출을 위해 정부보조로 한국외국어대학을 신설토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대학이 특성이 사라지고 종합대 위주로 운영되고 있지만 50년대에는 연세상대, 고대법대, 건대축산과, 한양공대 하는 식으로 특화돼 있었다. 인천의 해양대, 부산의 수산대, 춘천의 농과대 등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이들 분야가 장차 국가건설에서 중추역할을 맡게될 영역들임은 그후의 역사가 이미 증명했다.

 특히 인하공대의 설립과 관련된 이승만의 일화는 "이승만은 권력을 탐하는 늙은 독재자였을 뿐 국가건설의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 반박의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03 년 1월13일 미국 데슐러 개발회사의 이민선에 오른 한국인 1백1명이 있었다. 이들은 인천에서 배에 올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첫 하와이 이민자들이었다. 1904년 이승만이 미국으로 밀사임무를 띠고 갈 때도 이민자들과 함께 3등칸에 탔으며 하와이 이민자들은 이승만의 정치적 후원자들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조국의 건국대통령이 되었던 것이다.

 50년이 지난 1952년. 조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와이교포들은 이승만에게 공업고등교육기관의 설립 을 제의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1952년 12월 중순 김법린 문교장관에게 가칭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인하라고 한 것은 인천과 하와이의 첫 음을 딴 것이었다. 하와이교포들의 성금을 기본으로 하고 1백만달러의 정부보유달러를 기금으로 하여 인하공대는 탄생했다. 여기에 이승만은 자신이 운영했던 한인학교도 처분해 보탰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53년 6월4일 이승만은 인하공대 설립과 관련된 담화를 발표한다.

 "대학의 주지는 공과대학을 만들어서 마치 미국의 mit와 같은 미국에 제일 유명한 공과대학을 의미한 것이니 우리 사람들이 자래로 문과나 철학 등으로 숭상하던 의도를 많이 변동해서 이 물질시대에 기계학과 공업발전의 물질세력을 다른 나라와 경쟁하자는 목적을 가진 것이니 모든 기술학과 기계학에 주의하는 청년들은 이 대학설치에 크게 환영할 것이요, 이런 방면을 주의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이 방면으로 주의하고 노력해서 우리가 이 정신과 이 목적을 발전시켜야만 우리나라가 자급자족하는 나라가 될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소비할 물질은 우리나라가 자급하는 나라가 될 것이니 이것을 각오하지 못하고 완고수고하던 관습으로 우리 조상 때에 지내던 그것이 풍족하니깐 구습대로 살겠다는 사람은 지금 세상에 살 수 없는 사람인고로 이것은 다 버리고 진흙집에 풀로 이어 덮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다 없애야 될 것이다. 이런 것은 20세기에는 없는 것이다."

 오랜만에 독립정신 의 저자이며 개화파 청년이었던 이승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내용들이다. 동시에 이승만의 국가건설 구상의 일단을 살피기에 충분한 글이다.

 비록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려 했던 고급인력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고 결국 대학생들은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단죄하는 역할을 우선 수행하게 됐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측근이었던 올리버가 지난 2월 방한해 가졌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계몽사상가, 독립운동가, 정치가, 외교가 등 이승만이 가진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어느 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교육 대통령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55년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교재의 집필을 저에게 부탁해 쓴 적도 있습니다. "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2)-전후 복구 구상

 전후 복구 구상(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62)
• 미 지원금,생산재-기간시설 우선투입
• 문경 시멘트-충주 비료공장 등 건설
• "허리띠 졸라 매라" 공무원 임금동결
• 미의 대일수교 압력거부 일에 상대적 자립기반 구축

 
  3년 가량의 전쟁을 겪은 후 최대의 과제가 전후복구 였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전쟁 가능성이 없을 경우와 전쟁재발의 가능성이 상존할 경우 복구의 문제는 그 성격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완전종식됐을 경우에는 경제복구에 전념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6.25처럼 휴전이나 정전으로 애매하게 전쟁을 중단 한 경우 전쟁재발의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제복구와 함께 국방력의 강화가 동시 진행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승만이 처한 현실은 물론 후자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승만과 한국국민이 직면한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일제하에서 대부분의 공업생산시설이 북한지역에 있었던데다가 얼마 남지 않은 산업시설은 전쟁으로 파괴됐다. 게다가 일본과의 국교단절로 부품공급을 받을 수 없게 됨으로써 그나마 남은 공장들은 생산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전쟁기간동안 60만명으로 늘어난 군대를 유지하는 일도 큰 문제였다. 특히 국내경제생산에 의한 군대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원조가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여러가지 형태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폐허에서 새롭게 나라를 세우는 일에 들어가는 돈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이승만의 측근에서 미국의 대한원조문제에 관여했던 올리버는 건국의 비화 에서 당시의 사정을 "필요한 액수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이 액수는 (미국이 한국부흥기관 unkra를 통해 50년부터 57년까지 제공한 9천2백90만달러와 54년부터 57년까지 국제협력관리기구 ica를 통해 제공한 10억8천4백만달러 등을 말한다) 적은 것은 아니었다"고 표현한 것은 여러모로 적절하다.

 이 시절 이승만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있어 국방 산업시설복구 및 사회간접자본건설 소비재의 순이었다는 것은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된다.

 국방을 경제분야보다 더 중시한 것은 전쟁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소비재보다 산업시설 복구 및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은 당시의 한정된 자원을 고려할 때 중대한 정치적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산업시설 복구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 의한 기부금은 두가지 면에서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첫째로 이 자금은 파괴된 폐허의 재건이 아니라 기아와 질병예방을 위한 구제용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국민경제를 돕기 위해 원조를 어떻게 건설적으로 써야하는가에 대한 한국정부로부터의 지침을 거의 받지 않고 미국관리들이 직접 사용하였다. " ( 건국의 비화 )

 올리버는 이승만이 전후복구 사업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린 시점을 1954년 후반으로 보고 있다. "이대통령이 미국여행으로부터 돌아온 후인 1954년 후반에 가서야 한국에서의 폐허와의 싸움 과 현안의 대일문제 해결이 그의 가장 긴박한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 건국의 비화 )

 여기서 대일문제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이었다. 사실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을 받아들여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소비재를 공급받았다면 잠정적으로나마 국민들의 생활고를 조금이라도 덜고 정치적 불안도 감소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두가지였다. 올리버는 당시 이승만의 심경에 대해 "한국은 아직 폐허 속에 허덕이고 있는데 일본은 이미 크게 부흥된데 대해 몹시 상심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의 선택폭은 좁았다. 우선 전후복구를 위한 국내자원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미국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일본과는 아직 국교를 맺을 수 없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는 이승만에 대해 미국은 지원축소로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한다. 일본과의 국교를 맺지 않고 한정된 미국의 지원금을 사용해 소비재보다는 생산재 건설 쪽으로 집중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대의 정치적 인기보다는 장기적 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 이승만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은 당시 공무원들에게 "자네들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돼"라고 습관처럼 얘기했다. 공무원의 월급을 낮게 책정하고 그후 월급인상 요구에 대해서도 단호히 거부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심지어 외교관의 경비인상 요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57년 서울 경무대에서 열린 유럽 공관장회의 때의 일이다. 이때 공관장들은 회의에 앞서 공관운영경비 증액을 건의키로 사전에 입을 맞췄다. 회의가 시작되고 손원일 독일공사가 입을 뗐다.

 " 국내에도 재정상 어려움이 많겠지만 저희들 공관의 경비를 증액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에 이승만은 참석자들을 둘러본 후 개탄하는 어조의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how can you expect others to respect you,while you do not resp-ect yourselves(자네들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존중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

 당시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용식 전 외무장관은 "대통령은 우리가 경비부족 운운하는 것은 대공사로서의 자존심이 없는 태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돈문제를 말하는 것은 유교사상에서 말하는 군자지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회고록 새벽의 약속 에서 밝히고 있다.

 기독교신자였던 이승만이 즐겨했던 기도문도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 민족도 다른 민족들 못지 않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올 때에 나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물론 이승만이 살아있는 동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김용식이 전하는 일화 한토막은 의미심장하다. 1955년 어느날 김용식은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각하! 언제쯤 우리 민족이 남부럽잖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이승만은 "한 30년 걸릴걸세.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바쁘게 지내야 할 걸세"라고 답했다.

 그런데 우리 학계의 50년대 경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그저 원조에 의한 최소한의 생존에 급급했던 시기 정도로 그려지고 있다. 실제로 이 점은 상당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승만시대의 경제복구가 성공적 이었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경제분야와 관련된 이승만의 시도는 의의있는 업적으로 평가될만하다.

 그 첫째가 56년부터 본격화된 수입대체산업 정책이다. 이를 통해 국내 산업시설의 육성을 위한 기반은 마련됐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둘째로 미국의 지원금을 어렵사리 돌려 문경시멘트공장, 충주비료공장, 인천유리공장 등의 건설에 사용한 것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셋째로 경제격차가 현격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반대함으로써 그후 일본경제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현실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이승만 때문에 국내자동차산업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일정책이 없었다면 과연 국산자동차가 일본과 맞서 경쟁하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와 함께 최근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유치송 전민한당총재의 월간조선 95년 10월호 인터뷰는 관심을 끈다.

 그는 여기서 "해공(신익희의 호)도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50년대 한국경제상황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이승만의 경제관을 접근할 때와 그렇지 않고 접근할 때의 견해차는 너무나 크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승만이 그리던 미래의 한국상은 부국강병 이라는 동양의 전통적인 국가관으로 요약된다. 거기에는 산업화의 비전이나 구상은 구체화돼있지 않았다.

 그러나 50년대의 최악의 여건에서 교육혁명을 이루고 미미하나마 사회간접자본시설을 갖추려 했던 것이 60년대 이후 한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자원이 됐다는 점은 인정돼야 할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3)-원자력 연구개발

 원자력 연구개발(거대한 생애 이승만90년 63)
• "과기-군사력의 핵심" 미 제안 전격수용
• 문교부에 전담행정기구-법정비 병행
• 소장과학자 3년간 1백여명 미 파견
• 73만불들여 연구용원자로 도입 59년 설치공사 기공
발행일 : 1995.12.11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1953년 12월8일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은 un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주창했다. 원자폭탄을 최초로 사용한 나라로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소련을 견제할 의도가 다분히 담긴 외교적 선언이었다. 후발주자로서 1953년 8월 수소폭탄을 막 개발한 소련은 처음엔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평화를 바라는 세계각국의 여론에 밀려 결국 1년후인 1954년 12월4일 un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위한 국제협력에 관한 결의안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IAEA회원 가입

 이 결의안에 따라 1955년 8월8일부터 2주일간 스위스 제네바의 전 국제연맹건물에서 원자력의 평화이용을 위한 제1회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신생국 한국도 박철재 이기억 윤동석 등 3명을 대표로 파견했다.

 이어 1956년 2월3일 워싱턴에서 양유찬 주미대사와 w s 로버트슨 미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사이에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 이 체결됐다.

 그리고 1955년 8월 국제회의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문제를 책임있게 다룰 국제기구창설이 시급하다는 지적에 따라 1956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가 뉴욕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un의 하부기관으로 정식발족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1957년 8월8일 정식회원국으로 iaea에 가입했다.

 이상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된 국제사회의 움직임 및 우리의 대응을 골자만 추려본 것이다.

 여기서 제기해야 할 가장 궁금한 질문은 한 가지. 어떻게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지 2-3년밖에 안된 나라 한국이 원자력에 관한 국제사회의 흐름에 초창기부터 편승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원자력20년사 를 보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55년의 한국은 과학연구란 사치품에 속할만한 그런 시절이었다. 과학연구라면 국방과학연구소가 약간의 연구를 해내고 있었다고 할까, 그밖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중앙공업연구소나 지질조사소 등은 모두 인건비 정도만을 가지고 겨우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고 대학 또한 마찬가지 실정에 있었다. "

 이런 상황에서 1955년 제네바회의에 박철재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이기억 서울대 물리학과교수, 윤동석 서울대 금속공학과교수 등 3명을 파견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미국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20년사 는 "이 초창기에서부터 우리나라는 원자력 연구개발에 대해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 관심을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며 "과학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이승만은 주로 원자력이 보여준 무한한 군사적 가능성과 또 그것이 의미하는 외교상의 힘 등에 관심을 가졌던것은 물론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점은 당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미미한 수준이었고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은 이미 입증된 점을 감안할때 설득력있는 지적으로보인다. 특히 전략가인 이승만이 적은 비용으로 일거에 방위력을 증대시킬수 있는 원자력에 깊은 관심을가졌다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후에 원자로 설치 및 연구소의 장소선정이 문제가 됐을 때 이승만은 "군의 지원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군사기지 근처에 자리잡아야 보안 등 여러모로 유리하다"며 진해에 원자로와 연구소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보더라도 당시 이승만은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가능성에 더욱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 원자력의 잠재력에 대해 일찌감치 눈뜰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1989년 발간한 한국원자력3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원자력 연구개발은 일반국민에게는 무관한 이야기로 들렸겠으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미국의 제안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영향을 준 분이 w l 시슬러(cisler)였는데 그는 유럽주둔 미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전후 유럽의 전력계통 복구사업의 총책임을 지고 단시일 내에 임무를 완수한 공로로 기술자 영웅대접을 받고 있는 전기기술의 대가이다. "

 진해에 설치 주장

 이 시슬러가 한국의 전력계통 복구사업을 돕기 위해 방한했다가 1956년 7월 8일 인사차 경무대로 이승만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에너지박스 라 부르는 25㎠의 상자 하나를 내보이며 이만한 양의 석탄으로 4.5㎾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지만 같은 양의 우라늄으로는 무려 2백20만배인 1천2백만㎾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으로서는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언제 그것을 가질 수 있겠소?" "20년후면 가능할 것입니다, 각하!"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오?" "우선 원자력문제를 전담하는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연구개발기관이 있어야 하며 특히 인재양성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50여명의 젊은 과학기술자를 해외에 보내 연수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 이 말을 듣고 이승만은 "그렇게 해보겠소"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 이후 사태진행을 보면 이날 시슬러의 조언이 이승만에게 크게 작용했던 것같다. 기구설치, 원자력개발기관설립, 인재해외양성 등이 차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기구설치를 보자. 1956년 3월 문교부 기술교육국 안에 원자력과가 처음 설치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행정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연구생으로 윤세원 김희규 두 사람이 미국 아르곤(argonne)연구소에 파견됐다. 그후 연구생은 급속도로 증가해 2-3년후에는 1백여명에 육박했다.

 과는 설치됐지만 과장은 공석상태였다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윤세원이 1957년 가을 첫 원자력과장에 취임했고 이어 계속된 예산 및 인력확보를 통해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이 설치됨으로써 원자력의 기구설치 작업은 일단 완료됐다. 이승만이 당시 원자력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초대원장으로 문교부장관과 자유당 원내총무를 거친 거물 김법린을 임명한데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법률정비에도 나서 1957년 10월 원자력법이 국회에 제출돼 이듬해 2월22일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3월11일 법률 제483호로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원자력원의 발족과 함께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에는 1959년 2월3일자로 초창기 원자력도입의 산실역할을 했던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박철재가 초대소장으로 취임했다.

 인재해외양성과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당시 이승만이 외화절약에 관한 한 외무부장관의 해외출장비까지 확인할 만큼 철저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원자력 연수를 떠나는 소장과학자들이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손수 연수생들에게 달러를 쥐어주며 "자네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우리나라가 부강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네"라고 당부했다.

 과학한국 견인차역

 그밖에 연구용 원자로 구입에도나서 미국원조 35만달러에 국내예산을 합쳐 73만달러를 들여 비행기로 친다면 연습기에 해당되는 triga mark-Ⅱ를 도입키로 결정하고 1959년 7월14일 원자로 설치공사가 기공됐다.

 시험용 원자로가 최초로 가동된 것은 1962년 3월30일. 이 때 이승만은 이미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시작한 사업의 완결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로와 관련해 이승만이 뿌린 씨앗은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성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나라는 원자력분야에서 선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당시 연수를 보냈던 수많은 소장과학자들이 원자력보다는 자신이 희망하는 다른 분야들을 공부해 결과적으로 다양한 연구분야의 전문지식을 습득함으로써 과학 한국 건설의 견인차역할을 담당하게 됐다는 점이다.

 원자력과 관련된 이승만의 구상과 업적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전혀 다뤄진 바 없다. 단지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발간하는 연구소사의 서두에 잠시 언급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국가지도자의 장기구상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본다면 이에 대한 연구소홀은 분명 우리 학계의 문제점으로 지적돼도 좋을 것이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4)-4 19학생대표 증언

 4 26학생대표 유일나씨 35년만의증언(거대한생애 이승만90년 64)
• 경무대서 30분간 대화 이 박사 충격
• 동행한 송요찬 장군과 원탁서 대좌
• "학생 2백명 사망"알리자 망연자실
• "잘왔네 젊은이가 이런 일하는건 당연"
• 군정제의는 단호히 거절 대화마친뒤 "물러나겠다" 성명 발표
발행일 : 1995.12.18 / 11 면 기고자 : 이한우

 4 19 당시 민권의 승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1960년 4월26일 이승만의 하야성명 발표이다.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하게 된 시점 및 과정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당시 하야성명이 나오게 된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유일나씨(본명 주봉 59)가 35년만에 처음으로 당시 경무대에서 있었던 대화내용 전부를 털어놓았다. 유씨는 1960년 4월26일 데모대 대표 5명중 수석대표로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결심을 받아낸 장본인이다.

 그의 증언은 시민대표가 이승만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었던 배경에 군의 도움이 있었다는 비화,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를 결심했다는 결정적 증거, 사태 직후 군정실시의 움직임이 일부 있었지만 좌절된 이야기 등을 가감없이 밝히고 있다. 다음은 유씨의 증언을 시간대별로 요약한 것이다.

 26일 아침 7시 동대문운동장 근처로 나갔다. 연일 그곳에서는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서울에 주둔한 15사단의 본부가 설치돼 있었다. 서울 시민들은 사실 군대의 등장에 대해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대문운동장 근처에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군중의 수는 2만~3만명 정도. 나는 당시 고려대 정치학과를 휴학중인 상태였는데 우선 질서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를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범국민혁명으로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생-교수-시민대표를 뽑자고 제안했고 시민들이 찬성해 시민대표 김기일 구경서 김사백씨, 학생대표로 나와 당시 오산고등학교 학생 이성화가 선출됐다.

그렇게 해놓고 15사단 본부가 있는 동대문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나병삼 소령을 만났다. 그에게 지금 국민들이 저렇게 질서정연하게 연좌를 하고 있는 것은 군을 신뢰하는 증거라고 말하고 사단장 면담을 요청했다.

나병삼 소령은 나의 신분을 확인하고 조재미 사단장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다른 네명의 대표는 밖에 있으라고 했다. 조재미 사단장은 내가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당신도 깡패아냐"라며 기분나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진압을 하러 온 것입니까, 아니면 평화적으로 해결하러 온 것입니까. 만일 군이 직접 나서게 되면 19일보다 더한 사태가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장군은 이에 "물론이다. 우리는 보다시피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왔다. 군인에게 무기는 쓰라고 있는 것이다"고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한 마디로 거절했다.
 8시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 이석봉 장군(당시 준장)이 도착했는데 그는 대뜸 "밖에 데모대들을 보니 참 평화적이군"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장군에게 인사를 한 후 나를 소개하고 "계엄사령관을 면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조장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 육본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데모대에 가서 전후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갈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50~60 여명이 몰려나왔는데 대표 5명과 그밖에 28명이 함께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군용트럭에 탔고 나는 이장군의 지프에 올랐다. 차안에서 이장군은 "학생은 군대를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합니다. 우리는 군을 신뢰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는 개인이 아닌 국민의 군대다. 지금 사태는 올 때까지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에게 총부리를 댈 수 없다"며 "조금전에 실탄제거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문제로 실탄지급을 고집하는 조재미장군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8시30분쯤 우리는 용산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거기서 30여명의 대표들은 회의를 갖고 나를 수석대표로 선임했다. 나는 이들에게 "계엄사령관이 이박사 면담을 하게 해주면 하야권고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야란 말은 전날 교수데모에서 그 말이 등장했기 때문에 내 머리속에 강하게 각인돼 있었다.

 그리고나서 다시 이석봉장군에게 가니 이장군은 "계엄사령관 송요찬장군은 여기에 안계신다"며 경무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송사령관에게 나에 관해 아주 믿음직한 청년이라고 설명하며 경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다시 우리는 군용트럭과 이장군 지프에 나눠 타고 경무대를 향했다. 용산에서 경무대로 가는 길에도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한참 데모를 하고 있었는데 차에 하야권고 대표단 이란 플래카드를 조그맣게 써붙였더니 시민들이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경무대로 가는 차안에서 이장군은 나에게 "정말 하야권고를 할 수 있느냐","애급의 나세르를 아느냐","군이라고 해서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등의 얘기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 우리는 경무대에 도착했다.

 9시30분쯤이었다. 입구에는 송요찬장군이 나와 있었다. 송장군은 전부 들어갈 수 없고 대표만 들어오라고 해서 사전에 뽑은 다섯명만 경무대로 들어갔다. 송사령관은 경무대로 들어가면서 우리에게 하야권고는 곤란하다며 "자유당 12년 정권이 어떤 정권인데 자네같은 사람이 대통령 관두라고 한다고 그만두겠느냐"고 말했다.

 우리는 대기실로 따라 들어갔다. 송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올라간 동안 우리 다섯명은 역할분담을 했다. 잠시후 비서가 와서 "후원에서 만나자고 하신다"고 전했다. 거기에는 박찬일 비서실장, 허정 외무장관, 김정렬 국방장관, 송사령관과 우리 다섯명이 먼저 자리를 함께 했다. 잠시후 이승만박사가 애견 해피 를 안고 곽영주경호실장과 함께 나타났다. 우리는 동그란 원탁에 앉았는데 송사령관만이 뒷자리에 서고 나는 이승만박사의 바로 옆에 앉았다.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 앉은 상태였고 모두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승만박사가 "자네들은 누구야. 무슨 일로 온거야"라며 입을 뗐다. 다른 대표들은 이미 입이 굳어버렸다. 내가 용기를 내어 "국민으로서 각하를 뵈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박사가 "그래,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곳이지. 잘왔어.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가"라고 말했다.

 곽영주 실장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위압적인 시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다른 대표들은 더욱 위축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19일의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이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며칠 전에 다친 학생들 있는 병원에 나도 다녀왔어"라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이박사는 "내 후계자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야. 그러나 민주-법치 국가에서 부정으로 당선됐다면 그건 안되지"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대표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김기일씨가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 정치깡패가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박사는 약간 놀라며 "깡패라니. 법치국가에서 무슨 깡패가 있을 수 있어.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역정을 내면서 김정렬장관과 곽영주실장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리고 이박사는 대표들에게 "정치깡패가 있다면 단호히 처벌해야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

 나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3 15부정선거를 규탄하던 학생 2백여명이 죽었습니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표정의 이박사가 사방을 둘러보며 "누가 죽였단 말이냐"고 말하자 주변에 있던 고위관리들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이박사가 나를 보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죽였단 말이냐"고 묻길래 나는 "경찰이 학생을 죽였습니다"고 말했다. 이박사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 때 한 비서가 이박사에게 가더니 귓속말로 "미국 매카나기대사가 오셨습니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 있던 나는 그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이박사가 대표들을 돌아보며 "외국손님 만나고 다시 오면 안되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일이 잘못하면 수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박사는 비서에게 "대사에게 조금 기다리시라 그래"라며 우리와의 면담을 계속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이박사는 하야 라는 말을 못들었는지 "어떻게 하라고"라며 되물었다. 잠시후 곽영주실장이 이박사의 귀에 대고 영어로 step down 이라고 발음했다. 이 말에 이박사는 놀라는 표정으로 "하야라니. 그러면 날더러 물러나라는 얘기냐. 또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으로 가서 살라고"라며 얼굴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안고 있던 개 해피도 놓쳐버렸다.

 나는 "국민이 원합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에 이박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체념한 듯 "국민이 원해?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이 나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라고 되뇌였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온 몸이 땀에 젖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박사는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경무대로 가던 지프안에서 이석봉장군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애급의 나세르를 아시죠. 우리는 반공국가이고 적과 대치중이기 때문에 2년 정도 군정을 실시해 질서를 회복한 다음 민간정부를 출범시키면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박사는 내 말을 유심히 들으며 송요찬장군을 쳐다보고 잠시후 허정장관을 쳐다봤다. 송장군은 괜한 오해를 받게 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온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허정장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박사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군정은 안돼. 우리는 애급과 달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재차 "바로 하야성명을 발표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박사는 "알겠다. 잘 왔다. 젊은이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나도 젊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많은 일을 했었지. 이제 나가서 내가 하야한다고 말해도 되네. 가보게"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는 길에 허정장관은 "자네 정말 대단한 일 했어. 장하네"라고 말했다. 경무대를 나온 것은 10시쯤이었다. 그리고 10시10분쯤 라디오에서는 이박사의 하야성명이 흘러나왔다.  <이한우 기자>


이승만, 그 거대한 생애(65)-하와이 생활(끝)
 
하와이 생활(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65 끝)
• 향수-병마 62개월 "언제 우리땅 가나"
• 외유압력에 출국 망명 한적 없어
• 귀국 거듭 연기에 "나라위해 나쁘다면 참아야지"
• 프란체스카 "날마다 김치찌개 " 자작곡 지어 위로
• 요양원서 90세 일생 마감 가족장 으로 국내서 장례치러
발행일 : 1995.12.26 / 16 면 기고자 : 이한우
 
"2-3주 쉬고 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은 망명을 한 적이 없다. 망명의 기본요건 중 하나가 본인의 망명신청이고 또 하나가 해당국가의 망명수락이다. 이승만은 망명신청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미국도 망명을 거부하거나 받거나 할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승만의 하와이 5년2개월을 그저 습관적으로 망명 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를 사실이 아닌 감정에 의해 써온 결과가 아닐까.
 
1960년 4월27일 이화장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한달후인 5월29일 오전 김포공항에서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기간동안 이승만은 이화장에 머물며 일요일에 정동교회를 찾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활동을 않고 지냈다. 이화장을 찾은 시민들에게 종종 담장으로 나와 손을 흔들어주기는 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측근이었던 오중정 전하와이 총영사에게 보낸 5월8일자 편지에서 심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 편지에는 내가 평생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해왔다는 것은 오직 시간만이 증명해 줄 것 이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비행기에 오를 때 이승만은 옷가지를 넣은 트렁크 2개와 타자기 가방 그리고 식료품을 담은 가방 등 모두 4개의 가방만을 휴대하고있었다. "2~3주 정도 쉬고 온다"는게 이승만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그 여행이 상당히 길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정부측의 외유압력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출발하기전 기자들이 몰려오자 이승만은 내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말했고 프란체스카는 아이 러브 코리아 라며 울었다는 우석근 전경호원의 중앙일보 1986년 3월8일자 증언도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해준다. 그러나 이승만의 출국과 동시에 국내에는 이박사 망명 이라는 호외가 뿌려졌다.
 
미국에 도착한 초기 이승만의 생활에 대해 프란체스카는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했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 싶었다. 우리는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에 나가기도 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
 
그러나 예정된 2-3주가 훨씬 지나도 귀국이 늦어지자 이승만은 답답해했다. 건강도 악화돼 트리풀러 육군병원을 수시로 찾았다. 이 무렵 이승만이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요즘 우리나라는 어떻게 돼가나"였다고 한다. 하와이로 온지 6개월이 될 때쯤 이승만은 마키키가 2033번지에 있는 주택으로 거처를 옮긴다. 여기서 이승만은 1년4개월동안 생활했다. 이 시기에 대한 프란체스카의 회고. "우리의 생활은 몹시 단조로웠으며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하였다. "
 
이런 가운데 이승만은 1961년12월13일 이인수씨(명지대교수)를 양자로 맞았다. 6대 독자에다가 자식이 없어 늘 외로워했고 한번 맞았던 양아들 이강석은 비참한 최후를 마쳤기 때문에 새로 양자를 맞은 이승만은 오랜만에 큰 기쁨을 맞볼 수 있었다. 그날 마키키집에서 양아들 이인수씨를 맞은 이승만이 던진 첫 질문은 역시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게 돼가지"였다고 한다. 이에 이인수가 "잘 되어갈 것입니다"고 말하자 "그래, 나라가 잘 되어간다면 좋은 일이지 , 그런데 너는 남이 잘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 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국내 환국운동 일어
 
이 무렵 이승만의 귀국에 대한 열망은 병이 돼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인수씨에게 다음날 "얘야, 우리나라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이에 "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되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이승만은 돈이 없어 한국으로 못가게 될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가 시장을 봐오면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려고 그렇게 물건을 많이 사느냐"고 곧잘 신경질을 부렸기 때문에 시장도 몰래 다녀올 정도였다. 또 5달러 하는 이발비를 아끼려고 머리도 프란체스카가 맡아서 했다.
 
이승만은 종종 이인수씨에게 "언제나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인수씨가 그냥 "한 서너달 지나면 한국이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고 답하자 "내가 전에 가려고 할 때도 석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아 그런데 또 서너달이야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라며 답답해했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62년 이승만의 귀국열망은 더욱 커져 종종 분노로 표출됐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여기 데려다 붙잡아 두고 있는가 하는 거야"라며 흥분하기도 하고 "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갈테다"라고 신발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노인성 치매현상이 나타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측근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귀국을 추진한다. 귀국예정일은 1962년 3월17일. 국내에서는 이박사 환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이승만의 귀국을 꺼렸다. 또 언론들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모르는 이승만은 출발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기분이 좋아져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3월17일 아침 출발준비를 끝내고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에게 김세원하와이 총영사가 찾아왔다. "아직은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는 통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눈시울을 붉히며 "내가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 하기 바라오"라며 귀국을 체념했다. 상심한 87세의 노인 이승만에게 당연히 찾아든 것은 병마. 뇌출혈로 인해 수족이 마비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3월29일 이승만을 좋아했던 한 미국인 유지의 도움으로 마우날라리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동맥경화증도 생겼다. 프란체스카의 간호는 극진했다. 서툰 우리말로 아리랑이나 도라지타령을 불러줬다.

또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는 이승만을 위해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이란 노래도 직접 지어 불러주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렀다. 마우날라리요양원 생활이 3년을 넘긴 1965년 6월20일 이승만은 위출혈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의식도 거의 없어졌다. 계속 위독한 상태에 있던 이승만은 결국 7월19일 0시35분 마지막 숨을 거뒀다. 향년 90세.
 
가족들 국민장 반대
 
21일 오후 8시40분 영결식이 시작됐다. 이 때 거구의 한 미국인이 이승만의 관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베일을 걷어내고 이승만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 이인수씨가 전하는 이 말을 한 주인공은 이승만이 1920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위해 관 속에 숨어 상해로 잠입할 때 그 관을 짜준 평생친구 보스윅이었다.
 
문제는 이 승만의 국내 장례절차. 가족들은 국장을 주장했고 정부에서는 국민장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가족들의 반대로 이승만은 가족장 으로 국내에서의 장례를 치렀다. 한인기독교회에서의 장례를 마친 이승만의 유해는 그날밤 11시 미군에서 주선해준 c-118 군용기에 실려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이한우 기자>
 
[출처: safelee 엔파람 논객: http://www.nparam.com/]
기사입력: 2007/12/31 [10:48]  최종편집: ⓒ allinkore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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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 10/02/04 [12:55] 수정 삭제  
 
sleep

[url=http://www.126.com/]sleep[/url]
한 많은 영웅의 일대기 11/05/23 [02:58] 수정 삭제  
  위 글을 읽고 북바치는 울음 참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뉘가 딴지거나. 11/05/23 [09:49] 수정 삭제  
  누가 뭐래도 승만리는 잘했다지요.딴지걸고 있는놈들은 간첩 빨개이 개정일놈 충견들 제갈대중놈 개무현 패거리놈들일 것이요.이개놈들이 지금 이시간에도 적화통일 사회주의건설 하자고 발광을 하고 있징요.군이 한번더 혁명를 일어켜서 이개놈들 사정없이 총살 처형 살처분만이 나라를 구하는것이고 국민을 복되게하는것이야,이개놈들 속히 살처분하라.멸공반공방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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